영화 이야기

벤허 : DVD 이야기

최용성 2007. 7. 17. 13:36

 

 

    평론가들은 윌리엄 와일러의 <벤허>를 외면하기도 하지만, 대중들은 이 영화를 좋아해 왔습니다. 그런데 DVD 시대에 들어서는 기이하게도 구박을 받게 됩니다. 일단 첫 정식 버전 출시가 상당히 늦었습니다. 게다가 리마스터링에 정성을 들이지 않아 화질은 좋다기보다는 그럭저럭 볼만한 수준이었고, MGM65 카메라로 촬영한 70밀리 영화의 원래 사이즈의 좌우가 꽤 잘린 상태였지요. 그러니 이 DVD로 처음 <벤허>를 감상한 사람들은 영화를 온전하게 본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제작사의 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서플먼트에는 1994년 나왔던 LD 디럭스 버전에 이미 수록되었던 다큐멘터리 "벤허 : 서사극 만들기"와 예고편, 짧은 스크린 테스트 정도만 실려 있었습니다. 본편에 더하여진 찰턴 헤스턴의 부분적 코멘터리조차 한글자막을 지원하지 않았지요. 같은 내용을 처음에는 1, 그 뒤에 2장으로 나누어 담아 출시하였지만 별다른 정성을 기울이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출시되던 다른 작품들의 스페셜 에디션과 비교하여 보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작에 대하여 정당한 대우는 아니었던 셈이지요

 

1959년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자들. 시몬느 시뇨레와

    <벤허>가 이처럼 DVD로 출시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제작물의 내용 면에서도 푸대접을 받았던 배경에는 총기협회 회장이라는 찰턴 헤스턴에 대한 판권소유자 터너의 증오심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엠지엠은 자신들의 고전 대작들을 터너 엔터테인먼트에 팔았고, 그 때문에 사자 레오가 포효하는 많은 영화들이 워너 브라더스의 DVD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터너 엔터테인먼트의 주인장 격인 터너는 총기소지 규제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그 반대편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던 찰턴 헤스턴을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헤스턴의 대표작품인 이 영화의 DVD 출시가 계속 연기되었고 오랜 시간이 걸려 기껏 나온 결과물조차 기존의 LD에도 못미치는 무성의한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실망한 팬들은 이 대작에 걸맞는 스페셜 에디션의 출시를 염원하였고, 결국 워너는 2005년에 4장으로 구성된 특별판을 내놓게 됩니다. 

 

 

 

세월의 아이러니: 찰턴 헤스턴은 원래 리버럴한 민주당 지지자였다. 마틴 루터 킹의 시민권 운동에 열심히 동참하고 메커시즘, 베트남전쟁,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였던 그는 존 웨인의 <알라모>가 극우적인 냉전의 알레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출연을 거부할 정도로 진정한 진보적 자유주의자였다. 그런 그의 면모는 영화에서 보여준 청결한 이상주의자의 이미지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 그랬던 사람이 불행히도(?);1980년대 들어서 차별금지와 총기 문제에 관하여 급격히 보수화되면서 공화당 지지자로 돌아선다. 결과는 사진에서는 보는 바대로이다. 총기소지 문제는 미국헌법과 관련된 문제여서 우리가 그 당부를 논하기는 쉽지 않지만;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에 감화되어 결국 무력노선을 포기하는 평화주의자 벤허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별판의 특징을 살펴 볼까요. 우선 화면 사이즈가 달라졌습니다. 70밀리 대형화면의 좌우 옆면이 훨씬 더 많이 살아난 덕분에, 완벽하지는 않으나, 종전의 DVD에서 놓친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니콜라스 레이의 <왕중왕>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도 강조했듯이 <벤허>와 같은 대작영화에서 화면 사이즈는 무척 중요합니다. 인물들, 배경 등과 관련된 섬세한 디테일이 큰 화면 속에 치밀하게 자리잡고 있으니까요. 그것을 보고 안보고에 따라 영화에 대한 근본 인상마저 바뀔 정도입니다. 화질도 대폭 개선되었습니다. 물론 더 개선할 여지는 있겠지만, 종래 나온 DVD와는 차원이 다르게 좋아진 선명한 화질이어서 만족할만 합니다. 마치 다른 영화처럼 보이게 할 정도입니다. 5.1채널 돌비디지털로 리마스터링된 음향도 흘러간 시절을 감안하면 괜찮은 편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극장에서 듣던 6채널의 위력을 제대로 재현하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합창이나 빵과 서커스행진곡같이 특정한 음악이 리어 스피커에서 재생되거나, 사람이 이동하면 음향도 따라 이동하는, 구식이지만 효과적인 6채널 입체음향이 펼쳐져 관객들을 압도하여야 할 터인데, DVD의 음향은 이런 고전적인 입체음향의 효과를 그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로자의 훌륭한 음악을 독립된 트랙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입니다(이전에 디럭스판 LD에서도 가능하였습니다). 

 

    서플먼트도 보강되었습니다. 우선 1994년 다큐멘터리와 별도로 2005년판 다큐멘터리 벤허: 영화를 변화시킨 사극이 추가되었습니다. 새 다큐멘터리에서는 여러 영화계 인사들이 나와 <벤허>가 현대영화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제대로 보았듯이 <벤허>는 구식 영화가 아니라 무척 현대적인 영화입니다! 로자의 음악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코멘트도 나옵니다(여기서 미국 영화계 인사들이 '로사' 또는 '로샤' 또는 '로셔'라고 발음하는 것을 듣고 로자라는 표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이 잘못 발음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한글자막은 로사로 일관합니다 ). 그밖에 스틸 등으로 재구성한 벤허: 그림을 통한 여행”, 스크린 테스트, 빈티지 뉴스릴, 예고편, 그리고 1959년 오스카 상 발췌본(로자가 음악상을 수상하고 소감을 말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등이 서플먼트로 제공됩니다. 본편의 코멘터리는 첫 버전에 수록된 헤스턴의 것에, 영화역사가인 진 햇처의 것이 새로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번에는 코멘터리에도 한글자막이 지원됩니다. 아쉽게도 진 햇처의 코멘터리는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것이 적지 않아 진짜 <벤허> 애호가들이라면 짜증낼만한 대목이 많습니다.

 

1925년 영화 '벤허'

 

    이 스페셜 에디션이 특히 흥미를 끄는 대목은 일부를 컬러로 촬영한 1925년 판 무성영화 <벤허>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프레디 니블로가 감독하고 라몬 노바로가 주연한 이 엠지엠 영화는 1959년판보다 원작소설에 더 충실하고 규모가 엄청나게 큰 대작입니다. 특히 해전 장면은 엄청나게 큰 실제의 배를 만들어놓고 수많은 사람들을 물에 빠트리며 촬영하여서 상당한 리얼리티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수영 못하는 엑스트라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전차경주 장면도 상당히 야성적이고 격렬합니다. 1959년판처럼 정교한 황금분할 편집으로 관객이 몰입하도록 만드는 힘은 부족하지만 1959년판의 원조라고 할 만큼 정말 잘 찍었습니다. 1925년판에서는 전차들이 충돌하는 대형사고가 실제로 터졌고 이 사건으로 엑스트라가 사망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옵니다. 이 충돌사고는 영화에 그대로 담겨져 전차경주 마지막 부분에 임박하여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무성영화이니 사실성 면에서는 한계가 있고 인물묘사도 표면적인 데다가 의상이나 미술도 1959년판에는 못 미치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경탄할만큼 놀랄만한 대목이 많고 영화 자체도 꽤 재미있습니다. 역사에 우연이 없다는 말처럼 1959년판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1925년판의 성과가 누적되어 온 결과임을 깨닫게 됩니다. 역시 헐리웃 영화의 저력은 놀랍습니다. 칼 데이비스가 새로 작곡한 관현악곡은, 로자의 위대한 음악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무리없이 영화감상에 빠져들도록 배경음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편입니다.

  

 

    윌리엄 와일러의 <벤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차경주 장면입니다. 혼신을 다한 야키마 카누트로 대표되는 제2제작팀, 전차를 모는 배우들과 스턴트맨들, 그리고 무엇보다 달리는 말들의 노고가 정말 돋보이지요. 이 부분을 와일러의 공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직접 망치질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완성된 건축물이 설계사의 작품이 아닐 수는 없겠지요. , 단순한 이치 아닙니까. 참 별것 가지고 다 트집을 잡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전차경주 장면의 촬영 현장에 직접 나와 배우들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카메라의 구도를 고민하며 좋은 장면을 연출하려고 애쓰는 윌리엄 와일러의 모습을 보면 - 경주 시작 전의 퍼레이드 장면이나 경주 후의 장면 현장만 연출하였다고 하더라도 - 이런 트집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제2팀을 이끈 야키마 카누트의 공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영화제작이라는 관점에 집중하여 보자면 전차경주가 영화사의 가장 유명한 액션 장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훌륭한 촬영과 편집의 조화를 통하여서입니다. 큰 화면에 단순명료하게 핵심을 담아내는 로버트 서티스의 탁월한 구도감각이 돋보이는 촬영과, 정확한 리듬을 타고 황금분할되어 있는 랄프 E. 윈터스와 존 D. 더닝 두 사람의 음악적인 교차편집이야말로 전차경주 장면이 바로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일처럼 생동감있게 만들어낸 일등공신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결과물에 윌리엄 와일러의 감각과 견해가 반영되어 있음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요즘은 <벤허>에서 다루는 종교적 주제를 부담스러워 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에 무지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차경주를 끝으로 영화를 마쳤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할 정도이니까요. 참으로 제멋대로인, 어처구니 없는 감상법입니다. 벤허의 인생역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평행으로 진행되다가 세 차례의 교차점을 통하여 연결되면서 삶과 구원의 의미를 찾아 나가는 영화의 기본구조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메인 타이틀과 엔드 타이틀에 이 영화를 함축하는 상징이 나옵니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가 그것이지요. 절대타자(絶對他者)인 신과 인간은 서로에게 손을 내밉니다. 그 의미는 단순하지만 심오합니다. 제멋대로 감상하는 이들은 도대체 이런 것들을 제대로 보기나 하는 것일까요

 

    절망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희망을 찾아 몸부림치는 인간의 운명적 고뇌를 복수극이라는 대중적 장치를 통하여 보편타당하게 보여주면서 어느덧 예수신앙의 정수에 도달하여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영화 <벤허>. 그에 관한 본격적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