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트 투빈의 교향곡과 오페라: 음반
투빈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공은 지휘자 예르비(Neeme Ja¨rvi)와 비스(BIS)의 사장 로베르트 폰 바르(Robert von Bahr)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 교향곡 제4번 ‘서정 교향곡’/ 제9번/ 토카타, 베르겐의 무지크젤즈카베트 아르모니넨(제4번)/ 와테보리 심포니/ 예르비(지휘), BIS CD-227
교향곡 제4번은 투빈의 어느 작품보다 시벨리우스에 가장 근접해 있는 곡이다. 서정적인 선율들은 처음 듣는 순간부터 바로 귀를 잡아끌 정도로 아름답다. 투쟁과 질주의 에너지는 한 발 물러서고 자연의 아름다움이 도도하게 흐른다. 교향곡 제9번은 원숙한 표현과 구성미가 돋보이는 걸작으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로 가득차 있다. 소품인 토카타는 졸탄 코다이의 교향곡에서도 발견되는 유사한 리듬 동기의 운용이 인상적이다. 비스의 첫 투빈 음반으로 실황의 열기가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연주이다.
◎ 교향곡 제3번/ 교향곡 제8번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 예르비(지휘), BIS CD-342
다양한 성부들을 절묘하게 대위하고 발전시키면서도 명료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투빈의 어법이 능숙하게 표현된 교향곡들이다. 두 교향곡 사이에는 20년 이상의 시간적 간극이 있다. 전쟁 중에 작곡되어 1943년 초연된 제3번 교향곡은 에스토니아의 역사적 비극을 표현함과 동시에 애국심을 고양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감동적인 음악이다. 1966년 완성된 제8번은 강한 운동감을 지닌 걸작으로, 표현의 밀도가 매우 높다. 연주도 훌륭하지만 그라모폰 상을 수상한 녹음은, 세월을 감안하면, 단연 최상급이다.
◎ 교향곡 제5번/ 발레음악 “크라트”(Kratt) 밤베르크 심포니/ 예르비, BIS CD-306
1946년 작곡된 제5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제5번에 견줄만한 걸작이다. 작곡가 페르가망(Moses Pergament)은 이 곡에서 에스토니아 민족의 비극과 자유를 찾는 메시지를 들었다고 한다. 투쟁과 승리라는 베토벤 이후의 정신에 충실한 작품으로 강렬한 에너지의 흐름과 폭발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첫째 악장의 코다 부분에서 제1주제를 폭발적으로 연타하는 팀파니의 리듬은 압도적인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함께 수록된 “크라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농부의 비극을 다룬 발레 음악으로, 민속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 교향곡 제2번 ‘전설’/ 교향곡 제6번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 예르비, BIS CD-304
1937년 작곡된 교향곡 제2번은 제목 그대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신비, 전쟁, 암흑, 격정 등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1954년 완성된 교향곡 제6번은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을 유발하는 작품이다. 색스폰이 효과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첫째 악장에서 쇼스타코비치를 연상케하는 대목이 보이기도 한다. 둘째 악장은 룸바 리듬을 재난을 연상케하는 음악과 대조시켜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트롬본의 글리산도는 대중음악 어법을 절묘하게 원용한듯하다. 비극적 분위기를 지닌 셋째 악장은 샤콘느 형식에 깊은 울림을 담아 전하고 있다.
◎ 교향곡 제1번/ 발라라이카 협주곡/ 현을 위한 음악, 에마뉴일 쉐인크만(발라라이카)/ 스웨덴 방송교향악단/ 예르비(지휘), BIS-CD-351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작곡된 교향곡 제1번의 첫 부분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듯한 서주부의 아디지오로 막을 연다. 위대한 교향곡 사이클의 서막답다. 백스(Bax)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당시 에스토니아 상황에서 투빈이 백스를 알고 있었을 것같지는 않다. 여하튼 여러 주제들이 복잡하게 엮이면서도 명료함을 잃지 않는 투빈의 개성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발라라이카는 관현악과 어울리기에는 음량이 너무 빈약하다는 약점이 있지만, 멋진 관현악과 이질적인 발라라이카가 부조화 속의 조화를 이루는 것같이 진행되는 투빈의 협주곡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작은 협주곡(Concertino)/ 교향곡 제7번, 롤란드 푄티넨(피아노)/ 고텐부르크 심포니/ 예르비(지휘), BIS CD-401
3악장 동안 쉬지 않고 연주되는 작은 피아노 협주곡은 그 이름과는 달리 대립과 조화라는 협주곡의 모든 매력을 응축적으로 지니고 있는 ‘위대한’ 협주곡이다. 서정적인 부분을 거쳐 폭발적인 리듬의 고양으로 마무리짓는 곡의 흐름은 연주회장의 청중을 열광시킬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 롤란드 푄티넨(Rolland Po´ntinen)은 훌륭한 연주자이고 그의 톤은 명료하다. 1958년에 완성된 제7교향곡은 내성적이고 강한 구성적 밀도를 지닌 음악이다.
◎ 교향곡 제10번/ 죽은 병사들을 위한 레퀴엠 룬트 학생 합창단/ 고텐부르크 심포니/ 니메 예르비(지휘), BIS CD-297
단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 제10번은 1973년 작곡되었다. 만년의 작품임에도 신선하고 명료하다. 현악 파트가 호흡이 긴 비장한 선율을 연주하면 금관악기군이 신호음처럼 이에 응답하는 식의 진행은 투빈이 자주 사용하는 어법인데, 첫 대목에서 아주 원숙하게 사용되고 있다. 팀파니가 점점 빠르게 연타하면서 질주와 투쟁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1950년에 시작되어 1979년에 가서야 완성된 <죽은 병사들을 위한 레퀴엠>은 1919년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당시 비스나푸가 쓴 시를 첫째 악장으로 삼고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조국을 위하여 죽어간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다.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진혼곡은 팀파니, 작은 북, 트럼펫, 오르간이라는 소편성이지만 장대한 교향곡을 듣는 것 같은 다이나미즘이 있다. 대립과 투쟁 속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운동해가는 투빈 음악의 미학이 평화를 갈망하는 인류 보편의 메시지와 결합되어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 교향곡 제11번(패르트, 튀르의 음악과 커플링된 “뿌리를 찾아서” 음반), 파보 예르비/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Virgin 5 45212 2
에스토니아 작곡가들의 음악을 담은 이 음반은 투빈의 미완성 교향곡 제11번의 완성판을 수록하고 있다. 팀파니의 연타로 막을 여는 이 곡은 한 악장 속에 초창기에서부터 원숙기에 이르는 투빈의 특징이 총망라되어 있는 듯하다. 투빈의 영감은 쇠퇴하기는 커녕 마치 젊은이가 막 작곡한 음악처럼 에너지가 가득하다. 파보 예르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세계를 설득력있게 그려보이고 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의 훌륭한 전통을 세우기를!
◎ 더블 베이스 협주곡/ 슬픈 왈츠/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발라드/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에스토니아 춤 모음곡, 하칸 에렌(더블 베이스)/ 구스타보 가르시아(바이올린)/ 고텐부르크 심포니/ 예르비(지휘), BIS CD-337
보스톤 심포니 단원이었던 유트의 위촉을 받아 1947년 작곡된 더블 베이스 협주곡은 투빈의 개성이 원숙하게 발현된 걸작이다. 단악장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부분이 들어 있다. 첫 대목의 질주를 들을 때마다 로자가 1972년 작곡한 트리파르티타(Tripartita) 작품 33의 첫 악장이 떠오른다. 하칸 에렌의 베이스는 부드러우면서 표현력이 풍부하다. 예르비의 협연도 한치의 오차가 없다. 슬픈 왈츠는 춤곡이라기 보다는 작곡가의 어두운 내면을 파고들어간듯한 걸작이다. 1945년 작곡된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은 바이올린의 짧은 독주로 막을 연다. 독주악기와 관현악은 대립하기보다는 대화하듯이 이야기를 풀어간다.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BIS CD-286)과 더불어 투빈의 서정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곡 중 하나일 것.
◎ 피아노 전곡집 바르도 루메센(피아노), BIS CD-414/416 (3CDs)
투빈이 남긴 피아노 곡은 길이로는 소품에 가깝지만 개성은 여전하다. 1976년 작곡된 7개의 전주곡은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인 맛이 있다. ‘북극의 빛’(北極光) 소나타라고도 불리는 제2번 소나타(1950)는 투빈의 피아노 음악 중 최대 걸작으로 손꼽힌다. 투빈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하여 필요없거나 피상적이거나 반복적인 것들을 생략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 정도로 그의 창작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스크리아빈의 영향을 받은 작품임을 투빈 스스로도 강조하고 있다. 바르도 루메센(Vardo Rumessen)은 강한 집중력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연주한다. 녹음은 자연스럽다. 연주자가 쓴 장문의 북클릿 노트는 투빈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이다. 연주, 녹음, 자료 세 가지 점에서 가치 있는 전집이다.
◎ 레이기의 목사(The Parson of Reigi) 에스토니아 오페라 컴퍼니/ 파울 매기(지휘), ONDINE ODE 783-2D
투빈은 모두 2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레이기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의 완고한 목사, 그의 아름다운 아내와 젊은 성직자 사이의 불륜, 그로 인한 파멸을 그린 이 작품은 어둡고 위협적인 분위기로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을 자아낸다. 극중 등장인물의 수도 적고 내용이 복잡하지 않지만 연주자나 청중의 집중력을 강하게 요구한다. 투빈의 교향곡이 지닌 특징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 그 연장선에서 들어도 무방할 것같다. 에리 클라스가 지휘한 ‘죽은 병사들을 위한 레퀴엠’이 커플링되어 있다.
◎ 바르바라 폰 티젠후센(Barbara von Tisenhusen) 에스토니아 오페라 컴퍼니/ 피이터 릴예(지휘), ONDINE ODE 776-2D
1967년 완성된 이 오페라는 1시간 30분이 조금 넘는다. 평민과 사랑하였다는 이유로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는 형제들에 의하여 잔인하게 살해된 귀족 여인의 비극을 그린 작품으로 단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오페라의 마지막까지 변주하고 발전시켜간다는 독특한 발상으로 작곡되었다. 역시 ‘레이기의 목사’처럼 사람들의 편견과 아집이 사회적 인습과 결합되어 생겨나는 불행을 그리고 있는만큼 음악은 드라마틱하고 갈등적이다. 투빈 교향곡의 어법이 관현악 부분에 잘 녹아들어 있어 비교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다.
* 2001년에 발표된 원고입니다. 그 이후 나온 투빈의 음반은 다음에 살필 기회가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