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허먼(Bernard Herrmann) : 이아손과 아르고호
버나드 허먼은 완벽주의자여서 영화음악의 오케스트레이션도 스스로 하였다(로자는 그러한 작업방식이 허먼의 건강을 일찍 빼앗아갔다고 아쉬워하였다).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는 할리우드 시스템에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방식이지만, 이러한 허먼의 성실성으로 인하여 그의 영화음악 악보는 상당 부분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아이반호’와 ‘줄리어스 시저’에 이은 인트라다의 엑스칼리버 컬렉션의 세 번째 음반은 원래 로자의 ‘이중배상’(Double Indemnity)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악보 복원에 쏟은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두 개의 앨범이 상업적으로 실패하자 기회는 허먼의 음악에게로 왔다. 오늘날 영화음악팬들 사이에서 허먼이 누리고 있는 최고의 인기는 물론이고 악보의 복원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상업적으로도 아주 큰 장점이다. 더욱이 단 한번도 전곡이 녹음된 일이 없는 악보라면 더더욱.
영어로는 제이슨으로 읽는 이아손과 황금양털, 그리고 메데이아에 얽힌 그리스 신화는 유명하다. 1963년 영화에서는 황금양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모험들을 래이 해리하우젠(Ray Harryhausen)의 특수촬영에 담아 환상적 세계를 보여주는데, 인간의 운명과 신들에 대한 도전, 조국을 배신하고 사랑을 택하는 메데이아의 이야기 등 극적으로도 흥미진진한 대목이 많다. 메데이아가 이아손에게 행하는 무시무시한 복수이야기는 다루지 않았고 전형적인 헐리웃 코스튬 드라마의 해피엔딩으로 마감하고 있다. 해리하우젠은 스톱모션 방식의 인간적인(!) 특수효과로 청동거인 탈로스, 인간박쥐 하피, 떨어지는 바위와 트리톤, 머리가 일곱 달린 뱀 히드라, 해골군단을 재창조해냈다. 영화사에 남는 이 명장면들은 지금 보아도 아찔한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1999년 10월 2일 오후 10시 40분 교육방송에서 이 영화가 방영되었다).
영화마다 독자적인 악기 편성을 하는 허먼은 이 영화를 위하여는 현악기를 완전히 제외시켰다. 그리스 신화와 낭만적 소재를 다루면서 현악을 쓰지 않는다는 발상을 어떤 다른 작곡가가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더 정격성에 맞을지도 모른다. 현악기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은 음악사의 한참 뒤이고, 목관과 타악기, 하프가 신화적 악기의 원형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제작자인 더글러스 페이크(Douglas Fake)에 따르면, 4개의 플루트와 피콜로, 6개의 오보에, 6개의 잉글리시 혼, 베이스와 콘트라베이스 클라리넷이 포함된 6개의 클라리넷, 8개의 프렌치 혼, 6개의 트럼펫, 6개의 트롬본, 4개의 튜바, 2개의 독립된 5개의 팀파니, 4개의 서스펜디드 심벌즈, 별도의 큰 크래쉬 심벌즈 2개, 큰 탐탐(공), 중간 크기의 탐탐, 서로 다른 사이즈로 된 탬버린들, 차임들, 작은북들과 큰북들, 비브라폰들, 캐스터네츠들, 테너 드럼들, 글로켄스필, 실로폰들, 트라이앵글들, 우드블록들, 4대의 하프 등등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 편성이다.
이처럼 일반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뛰어넘는 거대한 편성의 금관, 목관, 타악기, 하프 군으로 편성된 음악은 리드미컬하며 다이나믹의 편차가 큰 특이한 음향을 뿜어낸다. 관악과 타악, 하프가 뿜어내는 음향효과는 그야말로 소리의 장관(sonic spectacular)이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고 한 번 들어보시라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관악과 타악기가 주는 박진감넘치는 음향과 리듬 효과는, 예를 들어 이 음악을 최근의 공상과학영화나 팬터지 영화에 바로 삽입해도 될만큼, 야성적이고 공격적이며 직설적이다. 이 거대한 음악은 "영화음악이란 진정 이런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브루스 브로튼은 ‘아이반호’나 ‘줄리어스 시저’를 지휘할 때보다 훨씬 더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충실한 해석을 보인다(한 인터뷰에서 브라우턴은 이 작업에는 대만족하지만, 사실 허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곡가는 아니라고 말한 일이 있다). 리듬이나 다이나믹은 영화에 나온 그것과 거의 같으면서 연주의 수준은 탁월한 관악기 주자들로 인하여 사운드트랙보다 더 뛰어나다.
나는 사운드트랙의 리듬이나 해석을 그대로 따라야만 훌륭한 연주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운드트랙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다면 훌륭한 영화음악을 영화와는 무관하게 음악 그 자체로 연주하고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사운드트랙보다 더 음악적이고 훌륭한 해석이 여러 차례 나와야 영화음악의 내재된 음악적 가능성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될 것이고, 마치 ‘백조의 호수’를, 발레를 보지 않고도 즐겁게 감상하듯이 ‘벤허’나 ‘이중배상’을 그렇게 감상하는 풍토가 조성될 것. 그러므로 사운드트랙과 다르게 해석하는 지휘자의 노력을 부당하게 깎아내리는 식의 평가는 옳지 않다. 여하튼 브라우턴이 택한 접근방법은 이 곡의 경우에는 무척 성공적이다. 짧은 모티브, 길게 늘어지는 음표, 과격한 음향 등을 고려할 때 이 곡을 느리고 세밀하게 잡아가는 것은 지루한 접근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음반은 대부분의 악보를 살리고 있지만, 모든 음악을 싣고 있지는 않다. 과도하게 반복된 부분이나, 아주 짧은 부분은 음악적 감상을 위하여 배제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영화음악의 전곡 녹음에서 반드시 행하여져야 할 작업이다. 물론 10초 미만의 주제라도 새로운 주제라면 그것은 가능한 한 살려야 하겠으나 똑같은 테마, 리듬, 관현악법에 기초한 곡을 사용된 회수대로 연거푸 녹음한다면, 자료가치야 높겠지만, 음악의 자연스런 흐름에는 무리가 따르게 마련. 다만 작곡가의 미학적 관점에는 충실하여야 할 것인데, 그 점에서도 이 음반은 성공적이다.
녹음은 홀의 공명을 다소 과장되게 포착해내는 방식이 아니라, 근접 마이크로 악기의 소리를 포착하고 있다. 좌우 분리가 명료한 구식 방식을 택한 것도 특이하다. 그 결과 악기의 직접음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초기 스테레오 녹음을 현대화한 음향을 듣는 것같다. 하프 소리가 좌우 채널을 왔다갔다하면서 귀를 자극하는 녹음 효과가 주는 즐거움도 크다. 타악기와 관악기의 향연을 듣는 듯한 음향의 쾌락은 다른 음악에서는 쉽게 맛보기 어려운 이 작품만의 독특한 개성이다. 다소 건조한 음향은 세부를 잘 보여주어 이 곡의 특수한 편성이 갖는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관악기의 깊은 울림을 20비트 디지털로 잡아낸 녹음은 오디오파일들에게도 특별한 즐거움이 될 것.
비교음반으로는 허먼 자신이 1975년 내셔널 필하머닉을 지휘한 4곡의 녹음(Bernard Herrmann Music from Great Film Classics ◉ London Phase 4 Stereo 448 948-2)이 있다. 처음 전주곡부터 템포가 느리고 여유있게 전개되는 것이 브로튼 /신포니아 오브 런던과의 가장 큰 차이점. 음악을 차분히 음미하기에는 허먼의 녹음도 장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위압적인 금관악기와 타악기 무리가 뿜어내는 긴장감이 주인공이 되는 이러한 곡은 역시 브로튼처럼 속전속결로 직설적인 표현을 하여야 재미있다. 허먼 팬과 오디오파일들은 물론이고 관악과 타악기가 뿜어내는 찬란한 소리 향연을 즐기고자 하는 분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