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모폰 상의 영화음악 부문은 1997년에 신설되어 2년 동안 유지되다가 무슨 일에서인지―당시 새로운 발행인이 ‘순수주의자’여서 영화음악을 클래식 분야로 취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소문이 있었다―1999년에는 사라졌다. 그 첫 수상작이 버나드 허먼이 히치콕의 <현기증>을 위하여 작곡한 음악을 다시 녹음한 이 음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환상>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영화는, 여주인공이 관련된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겪게 되는 혼돈을, 고소공포증과 연결시켜, 형상화해낸 걸작이다. 많은 영화애호가들이 히치콕의 최고걸작으로 꼽는 이 영화 속에서 허의 음악은 낭만적이면서도 심리적으로 혼란스러운 암울함을 담아내고 있다.
영화음악가이기도 한 지휘자 조엘 맥닐리는 어느 한곳도 흐트러짐이 없이 허먼의 세계를 설득력있게 펼쳐 보인다. 긴장감 속의 우수, 몸을 감싸오는 듯이 밀려오는 향수, 본질적인 실존의 불안 등이 인상주의적이고 낭만적인 아메리카니즘에 담겨져 오는 허먼의 음악세계를 이토록 잘 살려낸 연주를 달리 찾기 어렵다. 심지어 허의 자작자연을 능가할 정도이다. 템포와 리듬, 아티큘레이션, 프레이징, 다이나믹, 뉘앙스 어느것 하나도 소홀한 부분이 없다.
연주는 생동감이 넘친다. 사운드트랙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맥닐리의 해석이 가지고 있는 해석 자체의 설득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홀의 공명이 좋아서인지 특히 현악기의 울림이 매우 아름답다. 녹음은 풍성하고 자연스러우며 세세한 소리가 선명하게 잘 살아난다. 아마 로열 스카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수많은 녹음 중 가장 우수한 음반일 것. 다만 ‘악몽’ 부분에서 액센트의 처리는 다소 맥이 풀리는 것같다. 유일하게 아쉬움을 주는 대목이다.
타이틀 곡은 흔히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비견된다. 현악 파트가 운명을 연상케 하는 리듬 패턴을 불길하게 반복해나가고 그 위로 금관이 비극적인 동기를 뿜어낸다. 마치 종잡을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미로 속에 빠진 주인공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이 들린다. 트랙 2는 매덜린의 주제가 8분이 넘게 다양하게 엮어 짜여진 중요 대목이다. 트랙 2의 첫머리(매덜린의 첫 등장)는 허먼의 음악 특히 그의 클라리넷 5중주곡 ‘항해의 추억’이나 초기 영화음악 ‘제인 에어’에서 느낄 수 있는 노스탤지어와 낭만적 아름다움이 강하게 밀려오는 현악 중심의 곡이다. 1:23부터 전개되는 부분의 적막감과 긴장감은 마치 ‘사이코’의 한 부분을 연상하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원초적 본능’의 제리 골드스미스가 허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도 한다.
트랙 3 ‘캘롯타의 초상’에서는 불길한 느낌의 리듬을 깔고 불안정한 음악이 흐른다. 캘롯타는 매덜린과 매우 유사한(실은?) 느낌을 주는 여자이다. 긴 음표들로 이루어진 선율이 현을 타고 흐르는 기법은 매우 도시적인 느낌을 주며 역시 제리 골드스미스의 ‘원초적 본능’을 위한 음악에 이 곡이 미친 영향을 실감나게 한다. 트랙 3은 호흡이 긴, 그러나 짧은 동기가 이어진듯한 선율이 흐르며 불길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매우 아름답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빠져드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곡이다. 1:50에 가면 분위기가 일변하여 격렬한 음악이 터져나온다. 이러한 독특한 분위기는 마지막 곡에 이르기까지 시종 일관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다양하게 전개되며 그 흐름의 일관성으로 인하여 전곡 자체에 통일성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거대한 관현악 오페라나 교향시를 감상하듯이 들으면 된다.
이 음반을 들으면 현대의 심리스릴러 영화음악들 상당수가 버나드 허먼의 영향권 아래에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로자의 느와르 스타일이 전설이 되고 최근의 느와르 풍 영화에서는 재즈 스타일이 지배하는 것과 달리 허먼은 영화음악의 관현악 전통에서도 현대적 공명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영화음악 팬들 사이에서 허이 누리는 최고의 인기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
오늘의 영화들이 허먼의 음악을 홍보해준다. 제리 골드스미스, 대니 앨프만, 그밖의 쟁쟁한 작곡가들이 어둡고 불안한 심리를 조성하는 음악을 사용할 때마다 나타나는 것이 바로 허먼의 거대한 그림자이다. 그러니 새로운 세대도 허먼의 고전 영화음악을 지금 작곡된 곡처럼 듣게 될 수밖에 없는 것. ‘원초적 본능’을 본 젊은 세대에게 허의 ‘현기증’은 동시대의 영화음악과 전혀 다르지 않다. 개성이 너무 강해 누구도 추종하지 않으려고 했던 로자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축복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인상파적인 선율과 동기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편린들이 일관되고 긴장감있게 짜여진 이 곡을 맥닐리와 로열 스카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연주로 1시간 동안 계속 듣고나면 마치 긴 환상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든다. 볼륨을 줄이고 늦은 밤에 이 음악을 들어보라.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경험한 듯한 묘한 기분이 물밀같이 밀려 올 것. 영화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결코 놓쳐서는 안될 음반이며, 허먼의 영화음악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겠다.
◐ 허먼, 현기증, 로열 스카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 / 조엘 맥닐리, 지휘, 1995년 녹음, 1997년 그라모폰 영화음악 부문 수상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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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허먼(Bernard Herrmann) : 이아손과 아르고호 (0) | 2010.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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