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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박하사탕'을 찾아서

영화 이야기

by 최용성 2007. 7. 3.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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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이 던지는 물음

   ‘박하사탕’을 보셨습니까. 영혼을 뒤흔드는 영화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2000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는 그토록 절망에 빠져 목숨을 버릴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영화는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그의 절규를 뒤로 한 채 흐트러진 모자이크 조각을 맞추어가듯이 시간여행을 떠나 답을 찾아갑니다. 그 여행이 거쳐 가는 곳은 90년대와 80년대 어딘가에 있었을 우리에게 낯익은 공간입니다. 그런 점만 보면 그 시공간에서 청춘을 보냈을 이른바 ‘386 세대’는 공감하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겠지만, 신세대에게는 이제 아무도 사먹지 않는 박하사탕같이 생경하게 느껴진다는 일부의 감상법이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박하사탕’은 결코 ‘386세대’를 위한 영화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이고 보편적으로 울리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시간에 구속된 인간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역사는 무엇인가. 조금 소박하게 다시 표현하자면 이런 물음입니다. 지금 당신은 누구이고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과거는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시간-인과의 그물망 속에서

   영화 속의 주인공 김영호처럼 극단적인 삶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부정하고 싶은 과거와, 잠시만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이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해도 과거는 그대로이고 바꿀 수 없습니다.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과거는 엎지른 물처럼 다시 담을 수가 없습니다. 주변 세계와 다른 인간들, 자신이 만들어온 과거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시간의 인과율에 사로잡힌 인간의 운명입니다. 과거를 망각하려는 몸부림도, 돌아가려는 염원도 모두 부질없습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시간의 그물망은 지독할 정도로 촘촘하여 김영호라는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옭아매고 욱죄어듭니다.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현재는 지나간 시간의 결과일 뿐이라는, 당연하지만 아주 무시무시한 통찰.

 

   인간존재가 시간에 구속된다는 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궁극적인 답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개인적 차원에서는 바로 지금이 과거의 산물이라는 것, 나의 지금이 나의 미래를 이룬다는 성찰을 하면서 살아가는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말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주위에서 사랑이나 우정, 심미적 추구, 존재에 대한 성찰, 선행 등을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일단 성공하고 나서 나중에 보자는 식입니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없는 일은 실은 앞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가늠해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 충실하려면, 진정으로 미래를 보려고 하면 우리가 먼저 눈을 두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곧 어제가 될 오늘을 포함한 과거가 아닐까요. 개인이 과거의 아픔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려면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 따라야 함은 상식에 속하지 않습니까. 요컨대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그것이 현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돌아보지 않으면 지금은 물론이고 미래를 더 좋게 만들 수도 없을 것입니다. 

     

임옥상 <우리시대의 초상> (1986. 120x67cm/종이부조+아크릴릭)

 

망각의 결과?

   문제는 이 당연한 이야기가 개인의 이익과 무관해보이는―오히려 더 중요할 수도 있는데, 무관해보일 뿐입니다―역사적-사회적인 차원에 오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성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좋은 미래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역사적-사회적 영역에서는 과거를 쉽게 잊고―아니면 잊어버리려고 애쓰고―시간의 존재구속성에 대한 통찰을 포기하는 현실을 한 번 보십시오. 이런 기이한 현상은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영화는 1980년 5월의 광주로 돌아가고, 그때 비로소 청산되지 않은 학살의 과거를 잊어버린채 파시즘, 물질만능의 신자유주의 시대로 바쁘게 진입하며 과거를 잊고 살아가기로 작정한 듯한 우리 시대의 천박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학살자들, 고문기술자들, 독재의 주구들이 지역감정을 등에 업고 아직도 행세하는 사회, ‘조선일보’처럼 1980년의 광주가 피로 물들 때 학살자를 찬양하기 바빴던 신문이 여전히 1등인 사회, 독재체제 확립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21세기의 주역으로 자처하는 사회, 독재와 맞서 싸웠던 사람들이 독재자들이 만든 정당의 후신에 당당하게 들어가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사회. 이게 정상이라고 당신은 생각하십니까. 그 수혜자들 말고는 아무도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과거를 성찰하지도, 심판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망각의 댓가를 치르고 있는 셈입니다.         

                                       

   망각의 댓가가 이처럼 심각한데도 이제 과거를 말해 무엇하냐고 자포자기하고마는 집단심리적 태도가 형성되는 원인은 어디 있을까. 친일파나 독재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경험에서 냉소적인 태도가 생겨났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는 역설적으로 나름의 역사적 성찰, 과거에 대한 생각은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역사허무주의나 정치냉소주의를 부르짖으며 자신들에게 불리한 과거 망각의 담론―냉전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잊지말자’라고 하면서 친일-독재 관련 부분에서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반복하는 기막힌 이중성을 상기해보십시오―을 확대재생산해내는 주류 언론과 지식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데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로부터 이익을 보는 것은 심판받아야 할 과거를 가진 자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망각하고 역사를 외면할 때 우리는 방향을 잃고 김영호처럼 파멸의 길로 가고,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의 지위는 거꾸로 영속화될 것입니다.

 

희망을 찾아서

   ‘박하사탕’의 김영호는 진실을 망각하려고 몸부림치면서 한국사회가 걸어간 파시즘과 천민자본주의의 길을 충실히 따라갔지만, 과거의 진실을 외면하고 도피한 댓가로 결국 파멸에 이릅니다. 그 점에서 김영호의 삶은 우리 사회의 축도(縮圖)입니다. 시간여행을 통하여 김영호의 본래 모습을 찾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를 병들게 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지금 우리는 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잃어버린 ‘박하사탕’을 누가 빼앗아갔는지 발견하고 찾아 나설 때 희망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당신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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