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상 최악의 졸작은? 이런 어리석은 물음에 뜻밖에도 답이 있다! 에드워드 데이비스 우드 주니어(에드 우드. 오른쪽 옆 사진)의 <외계 9호 계획>이 바로 그것. 외계인들이 시체를 살려내 지구 정복을 꾀한다는 황당무계한 내용의 이 영화에서는 영화의 전형적 문법이 깡그리 무시된다는데, 문제는 영화 문법을 무시한 것이 의도적이라거나 패러디가 아니라 오히려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진지성과 성실성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
에드 우드가 영화를 보는 시각은 이런 것같다. 영화라는 큰 세계에서 사소한 실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 바로 앞 장면에는 낮이었던 것이 다음 장면에서는 갑자기 밤이 되고, 연기자가 실수로 부딪쳐 셋트가 흔들리더라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하물며 배우가 대사를 잊은들, 그럴 수도 있지!
세련된 기교로 무장된 ‘전문’ 영화인들만이 대접받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같은, 참 마음 편하고 무책임한 영화철학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기본이 안된 감독이니 최악의 졸작을 만들만 하겠다라는 조소도 가능할 것. 그러나 한 번 뒤집어 생각해보자. 영화는 어차피 허구이다, 영화 속 세계가 왜 논리적으로 정확하여야 하는가. 어차피 세트라면 그것이 티가 난다고 문제될 것은 또 뭔가. 밤과 낮이 뒤바뀌면 또 어쩌랴. 배우가 대사를 잊은채 헤매는 상태대로 촬영된다고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인가. 일상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논리적이고 앞뒤 정확하게 실수 없이 잘 산다고 말이지. 실은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삼류’ 는 아니라는 착각 속에서 실은 ‘삼류’ 인생을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런 가당치 않은 생각에 반론할 근거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실감나는 영상이나 논리필연적인 시나리오, 배우들의 정교한 연기나 한치의 빈틈없는 카메라 워킹, 그리고 실사(實寫)를 방불케 하는 현장감 등등의 요소는 어쩌면 영화에서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고 잠시만 생각해보자. 기존의 영화에 길들여진 우리가 틀렸고 에드 우드가 옳을지도 모른다. 만약 ‘삼류’ 속에 진실이 숨어 있다면?
그런 열린 마음으로 생각하면, 팀 버튼의 <에드 우드>가 코미디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사랑을 독창적(?)으로 구현한 실존 영화인에 대한 찬사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 영화는 졸작 전문(!) 영화감독 에드 우드가 세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벌이는 해프닝을 정말로 우스꽝스럽고, 정말로 눈물겹도록 유머러스하지만 진지하게 그려내고 있다. 복장도착에 빠져 있던 에드 우드 자신의 자화상 같은 <글렌이냐, 글렌다냐>에서부터 <원자의 지배자(혹은 괴물의 신부)>, <외계 9호 계획>에 이르기까지 에드 우드와 그 주변 인물들이 벌이는 좌충우돌 속에서 삶의 일상과 예술적 창조행위에 담긴 여러 가지 비밀을 읽어낼 수 있다.
팀 버튼은 50-60년대 미국의 B급 공상과학 영화에서 느낀 개인적 애착에서 이 영화를 시작하였겠지만, 그가 담아낸 의미는 늘 그렇듯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다소 소박하게 표현하자면,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세상 눈치보지 않고 자기 세계에 빠져들기), 이윤동기로 지배되는 영화산업의 논리에 종속되어 늘 ‘삼류’일 수밖에 없는 개인의 운명, 같은 ‘삼류’인 동료들에 대한 계산없는 연민과 우정 그리고 대책없는 신뢰 등이 바로 에드 우드의 ‘삼류’ 영화 속에 담긴 ‘삼류’ 진실이 아닐까. 오로지 기술만 남고 진지한 애정은 사라진 채, 가짜 공간 속에 매몰된 세련된 현대 헐리웃 영화에 대한 우회적 비판도 담겨져 있는 것같다. 영화의 첫 부분에 나타나는 관 속의 인물(이것도 에드 우드의 영화 한 장면에서 따온 것)이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세계를 팀 버튼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그려낼 수 있을까.
팀 버튼은, 날이 갈수록 획일화되어 가고 있는 헐리웃 영화세계에서 정말로 드문 천재이다. 그의 상상력과 직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재능은 지금까지 많은 작가들이 놓치고 있었던 감춰진 세계를 드러내보인다. 그것은 차라리 계시에 가깝다. 그는 쓰레기에서도 예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화작가이다. 그러니 이 천재감독이 영화사상 가장 재능없고 괴팍한 감독을 숭배하며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논리적 필연일지도 모른다(팀 버튼이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무시되어 온 3류 영화들의 화려한 복수처럼 보일 정도이다. 특히 <화성인 침공>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에드 우드 정신의 천재적 부활을 보여준다. 3류 영화의 형식을 빌려 아메리칸 이데올로기에 대한 풍자와 조롱을 일삼는 팀 버튼의 촌철살인같은 표현력이란 정말!).
팀 버튼은, 날이 갈수록 획일화되어 가고 있는 헐리웃 영화세계에서 정말로 드문 천재이다. 그의 상상력과 직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재능은 지금까지 많은 작가들이 놓치고 있었던 감춰진 세계를 드러내보인다. 그것은 차라리 계시에 가깝다. 그는 쓰레기에서도 예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화작가이다. 그러니 이 천재감독이 영화사상 가장 재능없고 괴팍한 감독을 숭배하며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논리적 필연일지도 모른다(팀 버튼이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무시되어 온 3류 영화들의 화려한 복수처럼 보일 정도이다. 특히 <화성인 침공>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에드 우드 정신의 천재적 부활을 보여준다. 3류 영화의 형식을 빌려 아메리칸 이데올로기에 대한 풍자와 조롱을 일삼는 팀 버튼의 촌철살인같은 표현력이란 정말!).
이 영화는 잊혀진 배우 벨라 루고시(바로 위 사진)에게 바치는 찬가이기도 하다. 한때 드라큘라로 유명했던 벨라 루고시는 이 영화를 통하여 불멸성을 획득한다. 마틴 랜도(마틴 랜도는 텔리비전 영화인 오리지널 시리즈 <미션 임파서블>(제5전선), <스페이스 1999>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배우이다. 엘리저베스 테일러의 <클레오파트라>에서는 리처드 버튼(안토니)의 충성스런 부관으로 나온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다)의 루고시 연기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이 정당했음을 입증한다. 쟈니 뎁은 마치 그 자신이 에드 우드가 된 듯하다.
영화 속에서 남자 배우의 대명사로 로버트 테일러가 거론되는 부분이라든가, 찰턴 헤스턴을 멕시코인으로 출연시키라는 제작진의 압력에 대하여 오손 웰즈가 에드 우드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장면은 영화사의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 역사에서 ‘최고’의 감독과 ‘최악’의 감독이 만나는 역사적 허구는 영화애호가들의 흥분을 불러일으킬만한 장면이다(영화 속에서 오손 웰즈가 말하는 작품은 <악의 손길>이다. 필름 느와르 최후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에서 제작진의 반대에 맞서 오손 웰즈를 끝까지 고집한 사람은 찰턴 헤스턴이었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위한 음악에는 팀 버튼의 단짝인 대니 엘프만이 적격일 것같은데, 뜻밖에도 <양들의 침묵>에서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하워드 쇼어가 맡았다. 그러나 쇼어 자신의 개성보다는 엘프만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가 곳곳에 깔려 있다. 라틴 리듬을 타고 흐르는 메인 타이틀의 음악은 무척 매력적이다. 특히 타이틀 장면에서 천둥소리와 미키마우징되는 “천박한” 음악 수법은 세련되고 정교한 표현방법을 추구하는 현대 영화음악에게 던지는 기발한 농담이다. 50년대에 유행되었던 전자악기 테레민의 빈번한 사용도 재미있다(물론 그 유행은 미클로스 로자가 <스펠바운드>와 <잃어버린 주말>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이 악기를 사용한 데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뒤 공상과학영화나 괴물, 유령영화에서는 로자의 고품위한 기법과는 전혀 거리가 먼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남용되었다).
흑백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국내에서는 개봉되지 않았으나 DVD로는 구해 볼 수 있다. 얼마나 박장대소하는지, 얼마나 가슴저린지, 얼마나 무릎을 치고 ‘아하!’라고 할 수 있는지, 당신의 ‘미국’ 영화에 대한 애정과 상식을, ‘삼류’ 인생에 대한 공감도를 시험해볼만한 진정한 가늠자이다. ‘삼류’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에드 우드를 두고 ‘삼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흑백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국내에서는 개봉되지 않았으나 DVD로는 구해 볼 수 있다. 얼마나 박장대소하는지, 얼마나 가슴저린지, 얼마나 무릎을 치고 ‘아하!’라고 할 수 있는지, 당신의 ‘미국’ 영화에 대한 애정과 상식을, ‘삼류’ 인생에 대한 공감도를 시험해볼만한 진정한 가늠자이다. ‘삼류’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에드 우드를 두고 ‘삼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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