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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없어 아름다운…로버트의 올드리치의 '소돔과 고모라'(Sodom & Gomorrah)

영화 이야기

by 최용성 2010. 7. 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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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분노로 멸망한 쌍둥이 도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나온다. 유일하게 롯(아브라함의 동생)과 그 아내, 두 딸만은 천사의 계시를 받아 멸망 바로 전에 탈출한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겠다는 경고를 무시한 탓에 소금기둥이 된다. 그러자 롯의 두 딸은 아버지의 후손을 잇겠다며 롯에게 술을 먹여 잠들게 한 뒤 근친상간하여 후손을 낳는다. 

  이 정도 내용으로 대작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존 휴스턴은 <천지창조>(원제: 성경 창세기)에서 성경의 범위 안에서 짧게 다루었다. 다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가던 중 소돔과 고모라의 폐허를 지날 때 이삭의 질문에서 존 휴스턴의 인간중심주의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아이들도 죄가 있어 벌을 받아 죽었나요?” 아브라함의 혼란스런 심경을 잘 묘사한 이 대목은, 평면적이던 영화에 생생한 긴장을 불어넣는다. 진정 아이들까지 절멸시켜야 할 정도로 집단의 죄악이 존재하는 것일까?  

 

  로버트 올드리치는 <소돔과 고모라>(1962. 또는 '소돔과 고모라 최후의 날')에서 지나칠 정도로 독특한 해석을 시도했다. 서부극 또는 현대물을 주로 만들던 그는, 처음 도전한 대형사극에서 연출 뿐만 아니라 각본에도 참여한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 1960년대 초반에 3,600만 달러나 되는―또는 그리 주장되는―제작비를 쏟아 부었음에도 이런 유의 영화에서 하나 둘은 나오는 명장면이 아예 없다. 전투 장면이나 소돔성의 멸망 장면은 엉성하고, 다른 영화의 스펙터클한 장면들을 차용해 만든 것같은 느낌. 소돔성의 재앙은 폭탄으로 폭발되는 현대전의 참화 같아서 그것을 바라본 사람을 소금기둥으로 만들만한 영적인 힘이나 신비가 전혀 없다(하기야 구약성경의 신과 천사가 외계인이라고 보는 견해에 따르면 오히려 사실적인 묘사일 수도 있다).

  당대의 명배우들을 주연으로 캐스팅했지만, 불행히도 조연배우들의 연기는, 비영어권 관객이 보더라도, 이탈리아 억양의 영어에 과장된 제스처로 사실감이 떨어진다. 대사는 고급 사극에서 맛볼 수 있는 시적 분위기나 절제된 맛이 없다. 장엄해야 할 장면들은 엉성해서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관능적이어야 할 장면에 관능이 없다. 예를 들어 무희들의 춤은 엉성해 흡인력이 없고 도리어 유치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이처럼 엉성하고 과장된 말, 아마추어 수준의 춤동작이 당시 사회 풍속의 실제와 더 맞을지도 모르지만 현대인이 공감할만한 영화적 사실감이 아주 부족하다.

 

   성경 내용이 어떻게 왜곡되었고 이 영화의 어떤 점이 주목할 만한지 생각하기 위해 줄거리를 요약하여 본다. 소돔과 고모라의 지배층은 사막 한 가운데서 노예들이 생산하는 소금을 독점하여 부와 권력을 누린다. 부패를 경고하는 선지자(세례자 요한을 연상시킨다)는 추방당해 롯(스튜어트 그렌저)에 의해 구조되기까지 골짜기에 버려진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베라 여왕(아누크 에메)은 당시 세계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권력을 휘두른다. 일디스(피어 안젤리)는 여왕이 총애하는 시녀. 그러나 다른 시녀(기이하게도 일본인으로 보인다)의 등장으로 둘의 관계는 끝난다(이 부분이 동성애를 암시하지만, 당시 성서극의 전통에 따라 점잖게 다루고 있다). 헬라미트 족의 위협을 받고 있던 여왕은 히브리 족이 소돔성을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고 롯이 이끄는 히브리 민족에게 땅을 빌려 준다. 그리고 그에게 일디스를 떠넘긴다. 롯은 일디스와 사랑에 빠져 일디스를 아내로 맞이한다.

   한편 여왕의 남동생 아스타로스(스탠리 베이커)는 헬라미트 족과 내통하여 왕이 되려고 획책하고 있으니 소돔성의 방어선이 되준 롯의 민족이 달가울리 없다. 자유의 땅으로 선포된 히브리 거주지로 소돔성의 노예들이 탈출하자 아스타로스는 그들을 추적한다. 롯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은 그는 치료를 받는 도중 롯의 첫째 딸 수아를 유혹하고는 사라진다. 히브리 사람들은 댐을 건설해 황무지를 기름진 땅으로 만든다. 이때 헬라미트 족이 침공하고 롯은 댐을 파괴하여 적을 수멸시킨다. 대신 옥토는 사라지고 롯의 백성들은 터를 잃는다. 그런데 그 옥토 위에 물에서 떠밀려 온 소금기둥이 생겨난다. 롯은 선언한다. 이 소금을 싼 값에 팔아 정직한 ‘신용사회’를 만들고 소돔의 백성들을 개종시키겠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롯은 백성들과 함께 소돔성에 들어가게 된다(당시 대작 서사극의 전통에 따라 여기까지 제1부이고 인터미션을 거쳐 제2부가 시작된다). 

그러나 롯의 소망, 그 거대한 실험은 성공하는가(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롯의 백성들은 부를 축적하면서 소돔인처럼 죄에 물들었고 집단 탈출한 노예들을 거부하는 냉혹한으로 변했다. 롯 또한 귀족 생활에 젖어들다가 아스타로스 왕자가 수아는 물론이고 둘째딸 칼렙마저 범한 것을 알고는 결투 끝에 왕자를 죽이고 딸의 저주를 받으며 투옥된다. 감옥에서 롯은 처형당하는 탈출노예들을 보면서 자신의 오만을 회개한다. 그때 천사가 임재하여 롯은 풀려나고 민족 대이동 즉 엑소더스가 시작된다. 소돔의 여왕이 ‘자연현상’에 불과하다고 비웃었던 천둥과 불, 지진, 강풍에 의하여 소돔과 고모라 성은 붕괴되고, 믿지 못해 멸망 광경을 뒤돌아 본 일디스는 소금기둥으로 변한다(피어 안젤리가 뒤를 돌아보는 이 장면은 내 생각에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고,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 그 소금기둥 옆에 롯과의 인연을 만들어준 빗을 남긴 채. 롯은 좌절과 슬픔 속에 도시를 빠져 나간다.

 

   성서의 몇 구절을 따서 이 정도로 부풀린 상상력이 일단 놀랍지 않은가. 성서에 정면으로 반하는 부분―예를 들어 롯은 전쟁영웅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구해온 전쟁포로였고 하나님의 천사도 아브라함에게 먼저 나타났다, 히브리 민족이 무리를 지어 소돔을 탈출한다는 이야기는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성서에 나오는 좋은 사람 중 롯만큼 무능하게 묘사된 인물도 드물다―이 있어 사이비 성서극이라는 비판도 받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제목이 주는 연상작용(동성애)과는 달리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 타락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주로 정치권력의 문제와 전쟁, 애정관계 등이 장황하게 균형을 잃고 무절제하게 표현되는 이 영화에서 올드리치가 유일하게 절제력을 보인 부분은 성에 관한 것뿐이다. 성서사극과 같은 교훈적인 영화는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어야 흥행실적도 올라간다는 시대상황적 고려 때문이었을까, 작가적 의도 때문이었을까? 굳이 답하지 마시기를.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현대적 상황과 소재 설정이 눈에 들어온다. 노예 노동력을 착취하여 소금을 얻고 그것을 독점하여 부를 취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사회경제구조, 사람의 몸에 낙인찍기, 비판세력에 대한 사회의 냉소와 정치 탄압, 죄악에 물든 소돔성에 외세를 끌어들여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집단들 사이의 암투, 소돔성의 소금독점권을 타파하고 경제적 우위를 점하려는 제국주의적 동기에서 전쟁을 도발하는 헬라미트족, 히브리 민족에게 땅의 사용을 미끼로 국제적인 힘의 균형을 달성하는 여왕, 사회 변혁을 위해 소돔성에 들어갔다가 자신들이 악인으로 변화해버린 히브리인들…이런 소재들은 어딘가 낯익지 않은가. 바로 우리 시대의 한 모습이 아닌가. 타락하려는 속성, 갈수록 집중되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세력균형을 통한 국제 역학, 노동통제와 독점을 통한 부의 축적, 비판자 또는 소수자에 대한 억압, 전자신분증(낙인)에 의한 사회통제 시도, 사회변혁운동의 근거없는 낙관과 필연적인 좌절 등등.

 

   올드리치는 소돔의 왕자 아스타로스가 롯의 두 딸을 범한다는 설정(즉 성경의 근친상간 부분을 드리치는 소돔인에 의한 간음의 결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을 통하여 소돔과 고모라의 유전자가 오늘날에도 살아남아 세상을 죄악으로 물들고 있음을 암시하려고 한 것도 같다. 이처럼 영화 속에 일관되어 나타나는 현대적인 사고의 함축은 이 영화를 단순한 실패작으로 단정하다가 중요한 대목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기도 한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도 있다. 바로 자끄 엘룰이 <하나님의 정치, 사람의 정치>나 <무정부와 기독교>에서 통찰한 내용 즉 기독교에 의한 정치, 기독교 국가의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이 바로 그것. 이것은 수세기를 거쳐온 신학 논쟁의 하나였는데, 올드리치는 엘룰처럼 “우리는 언제나 일단 어떤 방법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종속되거나 또한 하나님이 찾는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모든 방법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중략)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모든 수단이 선한 것은 아니다”(<하나님의 정치, 사람의 정치>, 두란노서원, 116면)라는 말을 지지하는 것같다. 정직한 부를 통한 사회개혁이 헛된 꿈임을, 하나님에게 자신을 전인적으로 맡기는 완전한 전복이 없다면 인간의 개혁 열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이 부분은 정치학적으로는 보수주의와 통할 수도 있는 부분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물론 실천적으로는 비슷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니 오해가 아닐 수도 있다), 엘룰이나 올드리치의 문제의식은 기존 체제를 죄로 보는 점에서 보수주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로버트 드리치는 부의 축적이 죄임을, 따라서 선한 자본주의란 없음을 영화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맥락에 따라 엉성한 스펙터클을 자제하고 롯이 이끄는 히브리 민중이 한 체제의 악에 물들어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다루었다면, 문명의 몰락이라는 관점으로 일관되게 접근하였다면, 영화는 걸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늘 그렇듯이, 시작에서 약간의 차이가 큰 결과의 차이를 가져온다. 여하튼 의욕과잉과 연출 사이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영화는 표류하여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흥행은 이탈리아에서만 성공했고 가장 중요한 미국과 영국에서는 흥행이나 비평 모두 실패하였다.

  그래도 이 영화를 그냥 잊기에는 어딘가 아깝다. 과잉해석일게 틀림없지만, 혼성모방이 시도된 서사극 영화로 볼 여지는 없을까. <왕중왕>의 세례 요한을 연상케 하는 소돔성의 선지자, 그가 막상 엑소더스에는 동참하지 않고 소돔성에 남아 장렬히 전사하는 모습은 서부극이나 전쟁영화에서 수없이 되풀이되었던 부분이고, 수공으로 적을 몰살하는 부분은 <십계>의 홍해장면을 판박이한 것이며, 노예들이 히브리 민족의 땅으로 도망하는 장면들은 영낙없는 <엉클 톰스 캐빈>이나 남북전쟁 전후의 상황을 그린 모든 작품들의 소재였다. 그 뿐인가. 영화의 여러 장면들은 범죄, 고문, 3각 관계, 첩보, 엘렉트라 콤플렉스, 동성애 등등 현대영화의 다양한 장르에서 볼수 있는 것들이 마구잡이로 혼합되어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졸작이 걸작이 되는 건 아니다.

 

   아마 내가 이 영화에 집착하는 이유는 제임스 딘의 연인이던-지금은 거의 잊혀진- 이탈리아 여배우 피어 안젤리(Pier Angeli)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끌렸던 추억과 더불어, 미클로시 로자(Miklos Rozsa)의 강렬한 음악 때문일 것.


  <소돔과 고모라>는 로자의 마지막 성서사극 음악이다. 원래 디미트리 티옴킨이 내정되어 있었다는데, 그의 갑작스런 병환으로 로자에게 기회가 왔다. 영화를 처음 접한 로자는 마치 “침몰하는 배”를 위하여 큰 노력을 쏟아야하는 듯한 두려운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하였지만, 영화의 주제와 소재는 음악가의 영감을 일깨웠다. 시대와 장소에 대한 정격접근법을 유지하는 바탕 위에서 다채로운 음악을 선보이고 있는데, 비극적이면서도 파멸의 씨앗을 담은 듯한 관능미, 그리고 덧없는 아름다운에 대한 찬가를 연상시키는 사랑의 주제는 로자의 다른 사극음악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매력을 안고 있다. 데이빗 위샤트(David Wishart)의 표현처럼 이 뛰어난 음악은 “말도 안되는 드라마를 고귀한 드라마로 만들고,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장엄하게 보이게 하며, 형편없는 대사를 시어(詩語)처럼 들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 뛰어난 음악은 영화음악의 운명은 영화의 성공에 달려 있다는 듯이 영화와 함께 거의 잊혀져 왔다. https://blog.daum.net/miklos/8063575

 

  모든 아름다운 것은 짧은 순간 피어나고 덧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덧없어 더 절실히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그것을 찬양하고, 기억하는 것. 허나 그것이 인간다운 길 아니겠는가. 

이 실패한 오락성서극영화에도 그런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면, 공감하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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