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북경에서 1938년 홍콩시절을 회상하면서 시작되는 <색, 계>(Lust, Caution)의 이야기 구조는 단순합니다. 항일운동에 뛰어든 연극부 대학생들이 친일 괴뢰정권의 정보관료인 이장관(양조위)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왕 치아즈(탕웨이)를 막부인으로 둔갑시켜 이장관의 부인(조안 첸)과 친하게 만든 다음 이장관에 대한 미인계를 써서 암살에 유리한 상황을 만든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제목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욕망(본능)과 주의심(이성) 사이에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쪽이 이기느냐 하는 문제라고 할까요(더 복잡한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이것이 이장관 뿐만 아니라 왕 치아즈에게도 해당되는 양면적인 문제로 다루어지기에 영화 내내 흐르는 긴장의 진폭이 매우 커지게 됩니다.
여주인공인 왕 치아즈는 공작원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타고난 미모와 연기력으로 이 어려운 일을 해나갑니다. 이야기 얼개는 1940년대 미국이나 유럽을 무대로 한 미녀 첩보원의 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건 다른 사람이 아닌 리안의 영화이고, 늘 그렇듯이 그는 표면에 드러나는 소재를 뛰어넘어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다룹니다. 그 결과 영화는 불신과 경계심이 지나친 나머지 너무 외로워 영혼이 고갈된 듯한 중년남자 이장관과, 아버지의 사랑이 결핍된 젊은 여자 왕 치아즈 사이의 소통방법과 마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한 심리적-철학적 고찰로 보일 정도입니다. 두 남녀의 주된 소통방법은 성(性)이고 마음은 그 결과이지만, 거꾸로 그들의 소통방법을 처음 만들어내는 것은 마음 속 깊은 울림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육체의 한계 속에 갇힌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깊이 통찰해 들어갑니다.
이 영화에서 개연성의 부족을 지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긴 왕 치아즈(정확한 중국어 발음인지 모르겠습니다)가 이장관 암살계획에 동참하는 과정은 언뜻 보면 동기가 미약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 몰살당하거나 애인이 죽는다거나 하는 식의 극적인 장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홍콩에서 항일연극을 공연하던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의 강경노선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어떤 집단이든 강경노선은 집단 안 사람들을 쉽게 장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계획에 가담합니다. 그녀의 동기라고는 잘 생긴 남자친구에 대한 애정과 항일애국심 정도일 터이고, 다른 친구들의 경우도 별반 나을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 이유로 위험을 감수하고 애정도 없는 상대와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까지 나서기에는 아무래도 그녀의 심리적 동기가 부족해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아무리 연극을 잘 한다고 하여도 왕 자이즈는 직업 첩보원은 아니니까요. 이처럼 그녀의 동기가 강하게 부각되지는 않기에 왕 자이즈가 미리 처녀성을 떼는 장면은, 유난히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탓도 있지만, 관객의 실소(失笑)를 불러일으킬 정도입니다. 리안이 무리를 한 것일까요?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영화를 음미해가다 보면 이런 설정이야말로 오히려 사실적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리안은 곳곳에 복선을 깔아놓았고, 잘 살펴보면 개연성이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살아간 시대는 선과 악이 분명하였던 시절입니다. 애국활동을 하자며 연극을 벌인 청년 집단의 이념에서 보자면 선을 위하여 투쟁하자는 대의명분을 대놓고 거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집단심리로 시작된 일은 어느 지점에 이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됩니다. 처음에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항일연극)에서 시작한 일이더라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수준까지 나아가 결국 돌이키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영화의 배경인 전쟁의 시대뿐만 아니라 평화시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요. 사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데에 무슨 거창한 동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들 인생을 돌아보면 금방 이해가 되기도 하지요. 왕 치아즈의 성적 결단과 우스꽝스러운 첫 경험만 해도 보수적 가치관에 반발하였을 당대 여성 지식인들이 성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려는 경향을 이해하고 보면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시대 아닙니까. 그러나 영화의 이야기 전개는 이 정도 설명을 부족한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사실적으로 냉혹하고 처참하여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살인극이 벌어진지 무려 3년이 흘러 무리를 떠났던 왕 차이즈가 이장관 암살계획에 너무 쉽게 다시 동참하기 때문이지요. 이 정도면 뭔가 생략된 것이 있지 않나 이야기의 개연성을 의심할만도 합니다. 왕 치아즈가 이장관과의 성관계를 불사하기로 마음먹게 되는 진짜 심리적 동기를 찾아야 이 문제가 모두 풀립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의 마음 속에는 아버지와도 연결되는 이장관, 그리고 그가 표상하는 안정되고 풍요로운 생활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국에 사는 아버지의 부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남자 친구는 너무 신중하고 대의명분에만 빠져 있어 그녀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반면 계(戒)의 영역 속에서 시작된 관계이지만 이장관은 그녀가 여자임을 일깨워주면서 아버지의 자리를 채워주면서 살아있는 남성으로 그녀의 몸과 마음 안으로 파고 들어 옵니다. 그 결과 이장관은 오히려 그녀의 색(色)을 자극합니다. 유혹은 왕 차이즈 뿐만 아니라 이장관도 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그녀가 두 차례 영화관을 찾는 장면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장면은 시대상을 보여주는 단순한 장치가 아닙니다. 주목할 점은 두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모두 중년의 미남배우 케리 그랜트라는 것이지요. 케리 그랜트는 원숙하고 안정감있으면서도 로맨틱한 남자의 전형과도 같습니다. 그녀는 젊은 풋내기가 아니라 원숙하고 안정감있는 중년남성을 통하여 아버지의 결핍을 채우려는 무의식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지요. 그녀가 가까이 있는 남자친구에게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지 않으면서도 이장관에 대한 미인계를 수락하고 별 의미없는 첫 경험으로 처녀성을 던지는 계기에는 이런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었을 겁니다. 동시에 그녀에게는 영국에 있는 아버지의 존재와 연결되는 서구적인 생활스타일을 동경하는 젊은 여성의 허영심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북경에서 배급을 받아가며 어렵게 살면서도 헐리웃 영화를 기웃거리며 화려한 세계를 동경하던 그녀에게, 새로운 임무는 홍콩에서 거짓으로나마 경험하였던 상류사회의 생활을 다시 누릴, 다르게 말하자면 궁핍한 전시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날 기회이기도 했을 터이니까요. 그녀가 맡을 임무가 시작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녀를 지배하였던 것은 계(戒)가 아니라 색(色)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이장관의 색과 계는 무엇이었을까요?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인 그는 사람들을 잡아 고문하고 죽이는 잔혹한 사람입니다. 그는 계로 뭉쳐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외로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는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닫은 냉혈동물이지만 그의 존재 안에 갇힌 영혼은 진정 자유로운 사랑과 소통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의심과 경계심은 그가 사람이 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가 왕 차이즈와 벌이는 첫 정사장면에서 가학적 강간을 저지르는 것도 그가 계에 사로잡혀 세워둔 마음의 장벽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그녀를 철저히 불신하면서, 즉 본능적으로-이성을 지키는 데에도 본능이 필요하다는 역설-계(戒)의 영역을 지키기 위하여 벌이는 두 사람의 첫 성관계는 고문의 연장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려는 한 남자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장관은, 부정(父情)을 그리워하는 순수와 성인여자의 욕망을 함께 뿜어내는 묘한 매력의 미녀 왕 치아즈에게 점점 마음을 열어가게 됩니다. 일식집에서 이장관을 위하여 노래를 부르는-여기서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고 그 누가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왕 치아즈와 이를 지켜보는 이장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사회관계 속에서 자신을 속이고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적 비극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장관이 마음을 열어갈수록 그는 물론이고 왕 치아즈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점점 보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할리우드 고전과 같은 품위를 지닌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점점 강력하고 대담한 정사 장면으로 돌입합니다. 성기를 화면 가득하게 클로즈업하는 블루 무비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리안 감독은 어떤 에로틱 영화보다 적나라하게 두 사람의 정사를 사실적으로 담아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놓고 노출의 수위 운운하는 것은 이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오히려 꾸밈없이 찍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겁니다. 그래서 여자의 음모나 남자의 성기가 일부 나오고, 마치 두 배우가 실제 성행위를 한 것같이 느껴지더라도 그것이 에로틱하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습니다(에로틱하기로는 그녀가 잔에 남기는 립스틱 자욱이나 귓볼이나 손목에 향수 뿌리는 것을 묘사하는 장면이 더 앞설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숨막힐 정도로 사실적인 성행위 장면에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두 사람의 깊은 마음이 변하여 가는 과정이 화면 밖으로 전달되어 나옵니다. 그 효과는 대단히 충격적이어서 보는 사람을 어지럽게 할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이장관의 가학에서 시작한 정사장면은 뒤로 갈수록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이야기 얼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영화의 종말로 질주해갑니다. 왕 차이즈가 여성상위로 이장관의 얼굴을 베개로 덮는 장면에 이르면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왕 차이즈와 이장관 사이의 정사장면은 두 사람의 불꽃튀는 기운이 몸과 마음의 밑바닥까지 쓸고 진행되어 가기에 마치 보는 사람이 그 관계를 직접 경험하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 일으킬 정도입니다. 결국 마음이 육체를 만들고, 육체가 마음을 만듭니다.
배역에 관하여 말하자면 아마도 탕웨이보다 왕 차이즈를 맡기에 더 훌륭한 배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성형미인이 가득한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물게 그녀에게는 순수함과 색기(色氣)가 자연스럽게 함께 어우러진 고전적 미인의 품격이 느껴집니다. 그녀의 늘씬한 큰 키는 1940년대 코트 패션과도 잘 맞아 떨어집니다. 영화 속에서 탕웨이는 왕 치아즈를 우리 앞에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어냅니다. 양조위(그의 이름만은 중국식으로 발음하고 싶지 않습니다. 장국영, 주윤발, 유덕화, 이연걸, 성룡, 이소룡 같은 스타들처럼)는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배우입니다. 그는 눈빛만으로 많은 것을 그려내는 탁월한 배우인데, 이 영화에서는 온몸으로(!) 열연하였으니 더 빛이 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두 주인공이 뿜는 기(氣)가 대단하여 영화를 보고 난 뒤 오랫 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즘 같이 가벼움이 숭앙받는 시대에 이런 영화를 보기는 흔치 않습니다. 역시 리안은 상업영화의 평범한 소재로도 무엇인가 인간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끌어내는 혜안을 가진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러 모로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색과 계 가운데 어느쪽을 택하든 남는 것은 후회이고 비극입니다. 특히 극단의 시대에서는 더더욱. 아, 물론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쉽게 말한다면 답이야 뻔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너무도 일차원적인 감상법일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와 색과 계를 오가며 살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의미있게 기억에 떠올리게 되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요? 색(色)일까요, 계(戒)일까요?
* 이 영화에는 원작소설이 있습니다. 영화와 비교하여 잘 정리한 글로는
ttp://djuna.cine21.com/bbs/view.php?id=review&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762
덧 없어 아름다운…로버트의 올드리치의 '소돔과 고모라'(Sodom & Gomorrah) (0) | 2010.07.06 |
---|---|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 (0) | 2008.04.06 |
데보라 카(1921-2007) (0) | 2007.10.20 |
예수와 동행하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마태복음' (0) | 2007.08.04 |
벤허 : DVD 이야기 (0) | 2007.07.17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