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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형 제도의 변화

인권과 법 이야기

by 최용성 2007. 7. 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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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살인이라고 비난하면서 국가는 법의 이름으로 같은 행위를 실행한다. 이것이 사형제도의 역설이다. 이 역설은 국가가 개인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국가주의 사고를 전제로 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는 일이 국가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형을 폐지되어야 할 ‘악’(惡)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견해를 지지하던 간에 사형제도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실천적으로 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잘못된 사형선고를 어떻게 발견하고 바로잡을 것인가 하는 점에 있을 것이다. 사형은 다른 형벌제도와는 달리 원상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판에 기한 사형선고와 집행은 형사사법에 대한 근본 신뢰를 파괴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미국 사형제도의 희생자 바바라 그래험의 실화를 다룬 로버트 와이즈(Robert Wise) 감독의 영화 "나는 살고 싶다" (I want to live. 1958) 중 한 장면. 흑백 영화이지만, 지금 봐도 동시대의 작품같이 느껴지게 하는 설득력이 있다. 사실적인 연출과 촬영기법,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당대의 명배우 수전 헤이워드(Susan Hayward)의 혼신을 다한 열연이 특히 인상적이다. 우리 나라에도 DVD로 출시되어 있다.

 

 

  인디애나 주립대의 죠셉 호프만(Joseph L. Hoffmann) 교수가 우리 나라를 방문하여 “미국 사형제도와 실체적 정의의 복원”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은 미국 형사사법에서 잘못된 사형선고에 따르는 문제와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호프만 교수의 강연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우리 사형제도에 관련된 유익한 시사점을 찾아보기로 한다.

 

   미국 형사절차는 사실심 재판(trial)이 끝나면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의 검사 상소가 금지되고 항소심부터는 사후심이어서 오로지 절차적 쟁점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반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 나라에서는 실무상 항소심이 원칙적 속심으로 운용되고 있고, 법률심인 상고심조차 사실인정의 오류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므로 전체 형사절차에서 실체에 대한 관심이 앞서는 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호프만 교수의 생각을 우리 실정과 비교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2. “미국 사형제도와 실체적 정의의 복원”: 호프만의 강연내용

  가. 신뢰의 위기와 실체적 정의

   최근 미국에서는 사형제도에 대한 신뢰의 위기가 생기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사형제도 뿐만 아니라 미국 형사사법제도 전반에 중대한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 뉴 햄프셔에서는 주의회가 사형폐지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주지사가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 메릴랜드에서는 퇴임 주지사가 사형집행 정지를 선언하였으나 새 주지사가 이를 번복하였다.

- 네브라스카에서는 주의회가 사형집행 정지를 입법화하였으나 주지사가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 인디애나에서는 전(前) 주지사가 사형제도에 대한 포괄적인 재조사를 명하였다.

- 연방의회는 사형수가 DNA 증거에 기한 평결과 선고에 이의할 수 있는 권리를 확장하려고 하였다.

- 2003년 1월 일리노이 주지사가 사형수 164명 전원의 형을 감경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언론학 교수와 학생들이 일리노이 주의 사형선고 사건을 조사하여 13명의 사형수에 대한 유죄평결과 선고가 잘못되었다고 최종 결론을 내린 데에 따른 것이다.

 

   어째서 이러한 위기가 생겨난 것일까. 최근 들어 갑자기 사형선고 사건에서 실체적 오류(사실오인)의 위험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사형제도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감소하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사형폐지를 둘러싼 법적 투쟁은 거의 절차의 차원에서 이루어져 왔다. 판사는 배심의 평결에 수긍할 수 없어도 절차적 오류를 찾기 전에는 이를 뒤집을 수 없다. 끊임없이 절차적 문제를 제기하여 사형 집행을 방해하는 것이 변호사들의 전략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형사건에서 절차법은 폭발적으로 팽창하였고, 실체에 관한 재심은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상황이 최근 실체적 정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만약 미국에서도 무고한 사람에 대하여 사형이 집행된 사례가 밝혀질 경우(미국에서는 최근 25년 동안 무고한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은 경우는 있었지만 실제 사형에 처하여진 것으로 밝혀진 사례는 없었음) 40여 년 전 영국에서 일어난 다음 세 개의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출발점이 될 상황이다.

 

* 루스 엘리스(Ruth Ellis) 사건에서는 1955년 대중의 사면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모의 여성이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 벤틀리-크레익(Bentley-Craig) 사건에서 19살의 지체장애자인 벤틀리는 살인죄의 주범이 아니었음에도 1950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반면 주범인 크레익은 16살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지 않았다.

 

* 에반스―크리스티(Evans-Christie) 사건에서 1950년 티모시 존 에반스라는 남자가 자신의 처와 유아를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크리스티의 증언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에반스가 처형되고 3년이 지나 진범은 크리스티였고, 그가 자신의 처와 다른 여자들도 살해하였음이 밝혀졌다. 크리스티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들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절차가 아니라 유죄자임이 확실한가, 사형에 처할만한 행위였는가라는 실체 문제였던 것이다. 사형제도에 대하여 비판적인 여론은 위 세 사건과 같이 실체적 부정의가 드러났을 때에 비로소 형성된다. 사형제도에 대한 신뢰의 위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위기의 씨앗을 뿌린 것은 1990년대의 오 제이 심슨(O.J.Simpson)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배심은 모든 미국인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인들은 형사사법제도를 신뢰하여 왔지만, 이 사건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특히 배심제도에 대한 대중의 오랜 신뢰가 무너졌다. 배심원들이 실체에 관하여 실수할 수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오 제이 심슨 사건에서는 피고인이 유죄평결을 받지는 않았지만, 배심원의 실수로 피고인에게 유죄평결이 내려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는 언론매체가 떠들썩하게 다루는 사건에서 특히 심각하다. 이 경우 대중매체를 통하여 사건을 미리 알게 된 사람 대신 무지하고 정보에 어두운 사람들만을 배심원으로 선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실체에 대한 오류의 위험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나. 구체적 개혁작업

   (1) 일리노이 주

   일리노이 주의회는 실체적 오류의 위험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최소화하기 위하여 사형법 개정작업을 하고 있다. 호프만은 주 의회에 어떤 사형선고판결이라도 특정 사건의 사실과 정황에 비추어 ‘근본적으로 불공정한 점’이 발견될 경우 이를 번복하고 자유형으로 대체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주 대법원에 부여하자고 제안하였다. 법원이 사형선고를 번복하기 위하여 절차적 오류를 찾아낼 필요는 없고, 그 대신 사형선고에 동의하지만 않으면 충분하다는 것이 제안의 핵심 내용이다. 몇 달 전 일리노이 의회는 제안을 받아들여 수정법안을 입법하였다.

 

   (2) 매사츄세츠 주

   매사츄세츠 주에는 사형제도가 없지만 이를 지지하는 주민들이 있어서 주지사는 사형사건의 실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라고 위원회에 명하였다. 호프만이 공동의장인 이 위원회에서 고려하는 내용으로는 목격자, 경찰의 진술과 같은 인증(人證)에 대한 의존을 줄일 것, DNA 검사와 같은 과학적 증거의 중시, 이러한 과학적 증거가 적절히 다루어졌는지 검증하는 독립된 연구기관의 감시, 유죄에 대하여 사소한 의문이 들더라도 배심원이 사형선고를 하지 못하도록 입증책임의 강화, ‘무고사건 위원회’를 만들어 사형수가 사형사건의 유죄평결에 실체적으로 오류가 있거나 불공정하다고 이의를 제기할 경우에는 재심을 할 것 등이 있다.

 

   다. 전 망

   위 개혁 입법안은 사형사건의 실체적 오류를 제거하거나 최소화하도록 고안되어 있어 사형사건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만약 이러한 개혁이 무위에 그친다면 사형제도 자체도 실패할 것이다. 설령 무고한 사람이 사형을 당한 사건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형사건에서 실체적 오류가 빈번히 일어날 뿐만 아니라 정부가 문제의 본질을 숨기고 있다고 대중들이 믿게 된다면 사형제도는 폐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미국 사형제도의 장래는 실체적 오류의 가능성, 아니 확실성을 인정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변호인과도 협력할 수 있는 검사와 법관의 의지에 달려 있다. 실체적 정의에 대한 강조는 결국 형사사법제도 전반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사형제도는 미국형사사법제도를 더 광범위하고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하는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3. 덧붙여

   사형사건에서 실체적 정의를 강조한다는 미국 형사사법제도의 최근 동향을 법의 적정절차를 후퇴시키고 실체진실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에서 실체적 정의는 국가가 아니라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서만 강조되고 있다. 무고한 사람이 사형에 처하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실체적 정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법의 적정절차를 보충하여 피고인(또는 사형수)의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데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적정절차와 조화되는 진실주의, 즉 소극적 진실주의와 일치된다.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사람도 처벌하여서는 안된다"라는 것은 형사소송에서 포기할 수 없는 대원칙이다. 여기에 범인필벌주의나 국가주의 철학에 기초한 적극적 실체진실주의가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다.

 

   우리도 사형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사형선고 사건에 대하여 재심의 문호를 대폭 개방하고 사형 집행을 정지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식으로 과도기적 개선안이라도 마련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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