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 인권 조항을 두고도 사람들의 인권을 마구 유린하던 때가 군사독재 통치기간이었다(박정희 체제와 그 뒤를 이은 전두환 체제 사이에 현상의 차이는 있다. 아래 묘사되는 풍경 중 일부는 각 체제에만 해당되는 것도 있다). 다 큰 남자의 머리털이 경찰의 ‘가위손’에 잘려 나가고, 미니 스커트의 치마길이를 자로 검사하는 풍경. 심지어 어른들이 서너 명 씩 몰려다니는 것도 ‘사회 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밤 12시만 되면 밖에 다닐 수도 없었다. 이 정도는 애교에 가깝다. 민주주의를 외치던 대학생, 시민, 종교인들은 고문을 받으며 감옥살이를 하거나 수배당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해야 했다.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였다는 이유로 기자들이 해고되기도 하였다. 비판적인 주장을 하는 교수나 교사들은 학교에서 추방당하거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영화나 연극, 소설, 시의 표현, 신문과 방송은 정권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국가에 헌납하라며 개인의 재산을 빼앗는 일도 있었다. 좌절감에 세상을 비판하다가 빨갱이로 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전두환 체제는 저 5월의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경찰이나 공무원만 보면 죄없는 사람들도 겁을 먹고 피하는 세상이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검열하면서 권력의 눈치를 쉴 틈 없이 보아야 했다. 법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전체주의 시대였다.
이런 삶의 양식이 일상화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인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밥 먹게 해준 은혜’라는 주술에 걸린 사람들은 억압의 역사를 망각하고 ‘멍멍이’처럼 ‘주인’인 독재자에게 충성하는 집단 무의식 속에 빠지게 된다. 인권을 외치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주인’의 은혜를 잊은 배신자 또는 방해자로 여겨진다. 이런 집단 무의식의 뒷받침을 받으며 독재와 인권침해는 더더욱 공고해진다. 이런 과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면 억압의 내면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심해지면 인권 의식이 아예 마비된다. 처음에는 권력이 두려워 다른 사람의 인권이 침해당하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다가 이어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하찮게 여기는 심리적 과정이 진행된다. 그것이 더 심해지면 독재자의 억압 메커니즘에 스스로 동참하여 반대자나 소외받은 계층에 대한 공격적 성향을 키우게 된다.
우리 사회의 집단 의식/무의식에는 이처럼 군사독재 체제 아래에서 겪은 심리적 상처들이 숨겨진 채 치료되지 않았다. 정작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언론이나 교육이 철저히 개혁되지 못한 채 정치의―어쩌면 정치가들의―민주화만 진행된 결과이다. 그러다보니 군사독재가 사라진 지금에 와서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집단심리적인 상처가 재발하고 만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인권 사각지대가 존재하게 만드는 독소 중 하나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인권 문제가 흘러간 옛노래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이처럼 역사를 망각하고 지금 여기에 우리가 선 자리를 모른채 인권에 무관심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박정희 향수’와 같은 미신이 판치고(하긴 누구에게나 젊은 시절은 황금같이 빛났을 터이니 지나간 옛날에 대하여 착시 현상이 생기는 것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성공 이데올로기’나 ‘약자 왕따시키기’, ‘줄서기(대세 따라가기)’가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정신을 압도하는 사회심리적 현상에서 그 단서를 볼 수 있겠다.
물론 우리 사회는 인권 영역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 사각지대에 양심적 병역기피자, 동성애자, 매춘여성,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근로자, 그리고 아동-청소년 등등이 있다(아직도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 대부분은 두발이나 옷의 선택에 관한 자유가 없다). 독재시대에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이들의 인권이 논의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들 약자, 소수자가 받는 대접이 바로 우리 사회 인권의 수준이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 사회에서 인권이 보장되는 정도를 사슬에 비유해보자. 100개의 고리로 만들어진 쇠사슬이 있다. 그 중 99개의 고리는 무척 강해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다. 그런데 단 1개의 고리가 약하면 바로 그 1개의 고리 때문에 그 쇠사슬은 제 구실을 못하게 된다. 즉 쇠사슬의 강도(强度)는 가장 약한 고리로 결정된다(<공포의 계곡>에서 셜록 홈즈가 한 말). 인권은 고립된 것이 아니다. 인권이란 쇠사슬과 같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들 중 단 한 사람의 인권이라도 부당하게 침해당하고 유린되는 것을 방관한다면 튼튼해보이던 인권의 연결고리는 끊어지고 언제라도 우리들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파렴치범에게조차 최대한의 인권을 보장하고 그가 제대로 사람 대접을 받는지 여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권 침해는 망각과 무관심이라는 독버섯을 먹고 자라난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부터 인권 체험과 교육을 통하여 타인에 대한 배려를 체득하도록 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다가올 미래의 인권 현실은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국 청소년은 인권 문제에서도 미래의 주인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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