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일반화된 것은 외환위기 이후일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달러를 빌려주면서 내건 여러 조건 중 하나가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경직된 것을 유연화하는 것은 좋은 뜻 같지만, 단어에 현혹되지 말자.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것은, 결국, 노동자를 쉽게 해고하고, 정규직 수준의 노동조건 보장이 필요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쉽게 쓸 수 있도록 노동법과 제도를 바꾸고 운용하라는 뜻이다. 고용이 유연하지 않은 사회에서 이러한 조치는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것이었다. 실직자가 넘쳐나고, 가정이 붕괴되었으며,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외환위기는 극복하였지만, 그 후유증은 강고한 비정규직 체제로 남았다.
비정규직의 실상을 보면, 일시적 노동제공이 아니라 오랜 기간 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규직과 대비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현저히 낮은 급여 외에도 노동조건 전반에서 여러 가지 차별을 받았다. 심지어 파견근로자 형태로 악용되어 기업은 최소한의 책임에서도 벗어나려고 하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해고불안에 시달리며 이류시민 취급을 당하였다. 노동운동을 할 만 한 조건도 안 되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 중 일부는 불이익을 무릅쓰고 생존의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힘겹게 투쟁하여 왔다. 2020년 인천국제공항 보안담당 직원의 정규직 전환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그런데 특이한 일이 일어났다. 무한경쟁에 내몰려 취업 불안에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청년들 중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를 ‘공정’의 관점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특이한 현상이라고 한 것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값싸게 양질의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제공받고 싶어 하는 자본의 입장에서는 반대할 이유나 동기가 많지만, 아직 사회에 기득권을 갖지 않은 청년세대가 오랜 세월 누적된 불평등을 개선하는 정책을 나서서 반대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조건의 불평등을 개선하는 일은 장기적으로는 청년세대 일반에게도 유리한 일이니 더욱 그렇다.
왜 그랬을까? 좋은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고 엄청나게 높은 경쟁률의 채용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현실에서 시험 없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는 것을 불공정으로 보았을 터이다. 그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공정한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위키백과를 보면,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정치철학”이다. 능력주의는 개인이 각자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얻은 재산이나 지위, 명예, 학벌 등 결과물을 챙기는 것을 장려하고 그 결과물을 정당한 것으로 옹호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경쟁 과정에서 공정함이 보장되어야 한다. 누군가 정해진 경쟁 규칙을 위반하여 자신의 능력을 넘어 보상을 받거나, 아니면 규칙 자체가 불공정하여 능력 발휘의 기회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할 경우 능력주의는 무의미해진다. 여기서 능력주의와 ‘공정’은 결합된다.
원래 공정은 공평하고 바른 것을 뜻하므로 평등이나 형평의 개념과 연결되는 인권친화적 개념이지만, 능력주의와 연결된 공정은 경기장에서 지켜야 할 경쟁규칙이 제대로 지켜지는가, 반칙하는 사람을 제대로 배제시키는가를 정하는 좁은 개념이 된다. 이런 관점에 서면, 능력에 따른 보상이 공정한 과정에서 주어지기만 하면 그 결과로 초래되는 불평등은 정당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다.’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능력주의와 결합된 ‘공정’의 신화는 바람직한 것일까? 독문학자인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마이클 샌델을 인용하여 능력주의가 사회의 공동선, 노동의 존엄,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폭군이라고 단언하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는 불공정이 아니라 불평등에 있다고 진단한다(“능력주의는 폭군이다”, “공정의 덫에 걸린 한국 사회” 『한겨레』 칼럼). 저널리스트 박권일은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주어진 재능은 개인에게 속한 것이지만 ‘각자의 재능이 차이 나는 상황’ 자체는 단지 우연적인 사건이므로 개인이 그 재능의 배분 상황에 대한 자격까지 가질 수는 없[다]”는 존 롤즈의 주장을 원용하면서, 능력주의가 불평등과 차별, 혐오와 배제를 재생산하여 불평등이라는 사회구조적 모순을 온전히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불평등으로 가야 할 문제의식은 모두 불공정 논란에 빨려 들어가고 만다.…격차와 불평등을 동력 삼아 모두가 전쟁처럼 살아야 하는 사회는 정의롭지도, 행복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불공정이 아닌 불평등 자체를 새삼 환기하여 시민적 관심사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안선희,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K-능력주의”, 『한겨레』 2021년 10월 1일자 서평에서 재인용).
능력주의는 결과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출발선의 불평등도 외면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자산을 넘어 학벌의 대물림마저 일어나고 있다. 한국장학재단의 통계를 보면,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신입생 중 부모의 월소득 인정금액이 9분위(949만원) 이상인 고소득 가정 출신은 2017년 41.4%에서 2018년 51.4%, 2019년 53.3%, 2020년 55.1%까지 늘었고, 서울대는 고소득 가정 출신 신입생 비율이 2017년 43.4%에서 2020년 62.9%로 3년 새 19.5%포인트 높아졌다고 한다. 한편 전국 40개 의대 신입생의 52.4%가, 전국 25개 로스쿨은 51.4%가 고소득층인 것으로, 특히 SKY 대학은 의대 신입생 중 고소득층 74.1%, 로스쿨은 58.3%에 이른다(『세계일보』 2021. 5. 19.자 기사). 이 결과를 두고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한 헌법 제31조 제1항 규정이 제대로 실현되었다고, 교육현실이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답한다면 당신이 믿는 능력주의는, 불평등으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하는 능력에는 별 관심이 없는, 편향된, 가진 자를 위한 능력주의일 것이다.
‘공정’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주의는 실은 진정한 능력이나 공정에는 관심이 없다. 일정한 소득이나 지위를 위하여 경쟁하고 그것을 획득한 다음 그로부터 생겨나는 기득권의 온갖 혜택도 능력의 당연한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공정한 규칙에 따라 능력 발휘한 결과를 누리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를 온전히 구현하려면 능력 평가가 수시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설계해야 공정하다. 기업주나 상인은 시장에 맡겨둔다고 하더라도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같이 국가에서 독점적 자격을 부여하는 전문직이나 교육자, 공무원, 군인, 기업에 고용된 회사원은 그 능력을 수시로 검증 받아야 한다. 1년 단위로 시험이나 평가를 거쳐 일정한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의 자격을 박탈하고 탈락시키는 대신 그 자리를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이 차지하게 하는 사회야말로 공정한 능력주의가 최고로 구현된 체제 아니겠는가. 특히 기업은, 부당 해고를 제한하는 노동법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공정한 능력주의’의 이름으로 검증에 불합격한 직원을 수시로 ‘공정하게’ 해고할 수 있는 환상의 길이 열린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시험으로 입사한 정규직 노동자나, 오랜 기간 같은 업무를 수행하면서 불평등한 처우를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 자본에 고용되어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일 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적게 지급되는 급여로 절감된 비용이 정규직으로 입사한 나의 고액 연봉이라는 불공정한 결과물—사실 그것도 생산직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을 통하여 달성한 성과임에도 관리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거나 노동운동과는 무관하다고 착각하기 일쑤이다— 이어진다고 생각을 바꿔보자. 내가 누리는 큰 이익이 내 능력으로 인한 당연한 보상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의 결과로 얻어진 것일 수 있다면 그것은 진짜로 공정한 결과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진정한 공정함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불평등이 주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능력주의를 벗어나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에 눈을 돌리고, 그것을 줄이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야말로 모두가 공정하게 잠재된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세상에 다가가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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