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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동행하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마태복음'

영화 이야기

by 최용성 2007. 8. 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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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1964년 작품 <마태복음>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예수영화를 우습게 보는 많은 평론가들이 최고로 꼽는 예수 영화입니다. 흑백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예수가 처한 시대상황이나 고증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것들은 관객이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니 그냥 넘어간다는 투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현대 이탈리아 사람들같고 별다른 분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배우들은 대부분 무성영화에서 튀어나온 사람들 같습니다. 의상(특히 모자)이나 세트 디자인은 중세 이탈리아 회화를 연상시킵니다. 영상의 거의 대부분은 자연광을 그대로 사용한 야외 촬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화면의 구도는, 몇몇 독창적인 장면이 있지만, 대체로 단순하고 평범합니다. 극영화에 걸맞는 편집이나 구성조차 시도하지 않아 영화의 이야기는 단조롭게 진행됩니다. 각본도 예수를 제외한 인물들은 곁가지처럼 보일 정도로 단선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가 비싼 향유로 예수의 머리를 닦아주던 여자를 비난하였다가 예수의 핀잔을 듣자 그 자리를 떠나 예수를 팔아 넘긴다는 식이니까요.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런 식으로 연출하였다면 캐릭터 구축에 실패하였다고 난리가 날 터이지만, 이 영화는 공인된 걸작이니 상관없겠지요. 음악도 바흐에서 프로코피예프, 러시아 혁명가(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1번의 셋째 악장에 사용된 음악)에서 흑인영가까지 다국적군이 동원됩니다. 역사적 정격성은 아예 고려할 대상조차 아니었던 게지요

 

    2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시간 내내 영화는 마태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쉴새 없이 전하느라 정신없이 바쁩니다. 파솔리니는 마태복음을 액면 그대로 전하겠다는 우직한 열정을 영화 속에 담아냈겠지만, 일반 극영화에 익숙한 시각으로 보면 솔직히 말해 지루하고 엉성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이 영화는 영화배우 지망생들을 모아 야외에서 열심히 연기하게 하고 이를 다큐멘터리 풍으로 찍은 실험작품처럼 느껴집니다. 파솔리니는 구경거리 즉 스펙터클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말씀을 전하느라 분주한 예수와 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을 집요하게 현장 중계합니다.

 

 

    영화의 시작 부분부터 특이합니다. 성화 속에 서 있는 듯한 마리아를 만나러 온 요셉은 임신한 그녀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다가 천사를 만난 뒤 다시 마리아에게로 옵니다. 이 과정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전혀 대화를 주고 받지 않습니다. 이때 파솔리니는 클로즈업된 두 사람의 얼굴표정을 교차편집하여 보여줌으로써 성서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아는 관객이라면 금방 그들의 마음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때의 영화어법이나 배우들의 연기는 무성영화의 전통에 가까워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배우들의 연기에는 상업영화의 전형에 오염(?)되지 않은 단순함과 사실성이 있습니다. 배우들은 역사적 현장에 구경나온 사람처럼 그냥 되는대로 연기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파솔리니의 영화언어와 결합되어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두 가지 예만 들어 보겠습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이집트로 떠나며 마굿간을 뒤돌아보는 마리아의 표정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기억에 담아두려는 듯 관객의 뇌리에 강렬한 이미지를 남깁니다. 예수를 세 차례나 부정하고 눈물을 흘리던 베드로의 평범한 모습은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파솔리니가 예수를 그려내는 장면일 겁니다.

 

 

    예수가 보여주는 첫 기적장면은 간결하고 명쾌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어떤 회의도 용납하지 않는 듯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기적을 생중계합니다. 예수는 진짜 물 위를 걷고,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사람들 눈 앞에서 일으키며, 그의 기적은 즉각적입니다. 이때의 편집과 음악의 사용은 거칠지만 강력한 기운을 우리에게 전달해줍니다. 파솔리니는 기자가 되어 예수가 움직이는 현장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취재합니다.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따라다니는 헨드 헬드기법이 많이 사용된 것도 그 때문이지요. 이런 조작된 사실성에 맞게 이라조퀴의 예수 연기도 다른 예수영화의 전형을 벗어나 있습니다. 파솔리니의 영화가 독특한 아우라를 갖게 된 것은 이야기의 중심을 오직 예수에 둔 덕분입니다. 정말이지 <마태복음>은 말 그대로 예수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예수말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파솔리니가 다른 세부에도 신경을 썼더라면 <마태복음>은 가장 잘못 만든 예수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감독을 제외한 영화의 일등공신은 누구보다 예수 역을 맡은 엔리크 이라조퀴에 돌아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엔리크 이라조퀴와&nbsp;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루이스 쟈네티는 니콜라스 레이의 <왕중왕>(1961)을 가리켜 예수의 역은 마음씨 좋은 멍청이 역할이 전문이었던 제프리 헌터에게 맡겨졌는데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역사적 인물의 배역을 정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로서, 예수와 같이 존경받는 인물인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아마 가장 성공적으로 역사적 인물을 묘사해 낸 것은 이라조퀴의 예일 것이다. 이라조퀴는 아마추어 연기자로 그의 조용한 소박성과 유태인 같은 외모는 적어도 역사적인 정확성을 보이고 있다”(쟈네티/김진해 옮김, 영화의 이해 : 이론과 실제, 현암사, 1991, 259)라고 이라조퀴를 극찬합니다. 그러나 이라조퀴는 우리가 마음 속에 담아둔 예수와는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라조퀴의 예수는 대학에 갓 들어온 젊은 이상주의자 또는 혁명가,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철부지 운동권학생 같아 보입니다. 이라조퀴의 예수는 자기 정열에 들떠 급한 말투로 쉴새없이 떠들며, 그가 전하는 말씀은 복음서에 나타난 그대로 모순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행동과 표정은 예측할 수가 없고, 세상의 상식이나 편견을 순식간에 벗어납니다. 이라조퀴의 예수에는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거룩함이나 평화로움, 온유한 아름다움, 그리고 권위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오는 생경함은 불편할 정도이지만, 이를 참아내고 기다리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이라조퀴의 예수에 동화(同化)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예수는 공생애가 3년 밖에 되지 않는 점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쁘게 급한 어조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도 상대방과 소통이 별로 없는 일방통행식 발언입니다. 어떤 대목은 숨이 막힐 정도로 지루하고 답답합니다. 영화 속에서 예수는 우리를 계속 불편하게 합니다. ‘평화의 왕이라는 호칭과 어울리지 않게 예수는 세상과 쉽게 화해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가는 곳마다 분란을 일으킵니다. 당대의 민중을 지배하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분노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관념화하여 온 점잖은 예수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분노야말로 예수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라조퀴의 예수는 정말 타고난 싸움닭처럼 수시로 싸워댑니다. 심지어 듣기 거북할 정도로 독한 저주를 퍼부어대기도 합니다. 그의 말투는 공격적이고 거칠고 급합니다. 복음을 듣지 않거나 무시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또는 초조감 같은 것이 그에게서 느껴집니다. 그렇게 불의에 분노하며 싸우던 예수의 모습이 있기에 그가 자신을 환영하는 아이들을 보고 환하게 웃음짓는 장면이나 소외된 자들을 옹호하고 나올 때에는 벅찬 감동같은 것이 밀려옵니다. 이처럼 이 영화의 예수는 우리 입맛에 맞게 가공된 존재가 아니어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마태복음에 담긴 그대로 예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나름의 진정성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 예수는 불가사의한 복잡성을 지닌 생생한 존재로 화면을 통하여 부활하는 듯합니다.

 

 

    보편적으로 이 영화를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을 우리 시대에 불러와 그 진실을 나름대로 충실히 전하려고 함으로써 예수의 참모습을 다시 성찰할 계기를 제공하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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