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음악은 밝고 경쾌하며 즐겁다. 춤곡(앤드류 페니가 퀸스랜드 심포니를 지휘한 낙소스의 음반이 입문용으로 적당하다. Naxos 8.553526), 서곡(아놀드 자신이 런던 필하머닉을 지휘한 Reference Recordings RR-48CD 음반은 연주도 좋지만 오디오파일 음향도 매력적이다), 영화음악, 신포니에타, 협주곡(세 곡의 신포니에타와 플룻 협주곡, 오보에 협주곡을 모은 Hyperion CDA 66332 음반은 가볍고 바로크적인 아놀드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등등의 많은 곡들에는 통속적이고 소박한 매력이 있다. 그의 음악은 ‘경음악’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가볍고 유머러스한 세계의 외피 안에는 어둡고 복잡한 심연이 숨겨져 있다. 특히 아놀드의 교향곡들에서 그러한 세계가 가장 잘 드러난다. 크리스토퍼 파머(Christopher Palmer)의 표현처럼, 광대에게도 어두운 세계가 있다. 그것도 아주 어두운.
그의 교향곡 안에서 어둡고 무거우며 비극적인 세계는, 잃어버린 꿈을 동경하는 듯한 경쾌하고 통속적인 선율이 지배하는 세상과 만나면서 서로 심하게 흔들린다. 무거움과 가벼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비극과 희극이라는 두 이질적 세계가 충돌하면서 생겨나는 긴장의 미학, 그것이야말로 아놀드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비극적인 혼돈과 절망 속에서라도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누구도 우리에게서 꿈을 빼앗아갈 수는 없다.
1921년에 태어나 2006년 9월 23일 사망한 영국 작곡가 말콤 아놀드는 12살에 루이 암스트롱의 연주에 빠져들면서 처음으로 음악의 세계에 접한다. 듀크 엘링턴도 그의 우상이 되었다. 그 시대 10대 아이들이 그랬듯이 그도 영화관을 드나들면서 자연스레 영화음악과 조우하였다. 어린 시절에 스쳐간 강렬한 경험은 평생 따라 다니는 법. 그에게 재즈와 영화음악은 음악적 본능처럼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 암스트롱의 영향으로 트럼펫을 불기 시작한 어린 아놀드는 16살에 왕립 음악원에 들어가서야 정식으로 제도권 내의 공부를 시작한다. 아놀드의 트럼펫 실력은 아주 뛰어났는가 보다. BBC 심포니를 거쳐 1941년부터 런던 필하모닉의 트럼펫 주자로 활약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수석주자가 되었다. 연주자로 활동하던 기간 동안 그는 수많은 레퍼토리를 접하면서 시야를 넓혔다. 말러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베를리오즈, 베토벤, 모차르트, 하이든 등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베를리오즈는 아놀드가 자신과 가장 동일시하는 작곡가라고 한다.
제2차 대전 당시 스스로 발을 쏘아 병역을 거부할 정도로 그는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음주벽이나 자살충동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신적 방황과 기행도 심했다고 하니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그의 독특한 인격은 9개의 교향곡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연주와 작곡을 병행하던 그는 1948년부터서야 작곡활동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 자신이 뛰어난 트럼펫 주자여서인지 관악기를 다루는 솜씨가 특히 탁월하다. 정서의 극단을 오가는 변화무쌍한 표현법에도 불구하고 말러, 시벨리우스, 쇼스타코비치, 영국풍의 소재, 재즈, 경음악, 할리우드 영화음악이 여기저기 나타나서인지 그의 교향곡은 그리 낯설지만은 않으며 관현악의 화려한 음향 효과가 대단하다.
교향곡 제1번(1949)은 영국적 기질이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첫째 악장은 월튼의 제1번 교향곡이나 시벨리우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서정적인 둘째악장의 주제는 처음 듣는 순간 바로 기억될 정도로 아름답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는 피날레는 활력이 넘친다. 클라리넷 솔로에 의한 소박하고 인상적인 주제로 시작되는 제2번 교향곡(1953)은 목가적인 첫째 악장에서 활달한 넷째 악장에 이르기까지 명쾌한 악상으로 전개된다. 제1번과 제2번을 수록한 음반으로는 안타깝게도 너무 이른 나이에 작고한 리처드 히콕스가 지휘한 런던 심포니의 화려한 연주(Chandos CHAN 9335)가 첫 번째 선택이 되겠지만, 페니가 지휘한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의 연주(Naxos 8.553406)도 좋다. ‘여섯 번째 행복의 여인숙’의 전주곡 도입부를 그대로 첫째 악장에 원용한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동물의 사육제’(특히 마지막 곡 ‘박쥐’는 기발하다), ‘그랜드, 그랜드 서곡’과 함께 수록된 버논 핸들리, 로열 필하머닉의 제2번 교향곡 연주(Conifer 75605 51240 2 UK : CDCF 240. 절판)도 훌륭하며 아놀드의 여러 가지 특징을 알기에 좋다.
시벨리우스를 연상시키는 교향곡 제3번은 피날레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홀스트와 유사한 리드미컬한 질주로 압도적인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1960년 노팅 힐 인종폭동 뒤에 작곡된 교향곡 제4번의 첫째 악장은 아프리카-쿠바의 타악기 군을 동원하여 원시적인 이국색을 드러낸다. 그 위압적 긴장을 뚫고 전혀 무관심한듯 유유히 나타나는 라운지 음악 같은 아름다운 주제는 바다와 모래와 열대림에 둘러싸인 휴양지에 온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절망적 현실 속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행복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다. 두 곡이 함께 수록된 히콕스/런던 심포니의 음반(Chandos CHAN 9290)이 음향의 충일성이나 화려한 색채감이 돋보이는 훌륭한 연주이다. 페니/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의 연주(Naxos 8.553739)도 부족한 점이 별로 없다.
1961년 작품인 교향곡 제5번은 50년대에 요절한 동료들, 클라리네티스트 잭 써스톤이나 저 유명한 데니스 브레인, 제라르 호프눙 등에 대한 추억을 담은 곡이어서인지 비극적이다. 모호한 음향의 대비 속에서 첼레스타와 글록켄스필, 하프가 수수께끼 같은 아름다운 음향을 만들어내는 첫째 악장은 혼돈스럽지만 신비롭다. 음렬주의 기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악이 연주하는 둘째 악장의 서정적이고 따뜻한 주제는 말러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아름다운 음악이다. 금관악기의 돌발적인 강주와 숨가쁘게 교차하는 목관악기, 타악기의 위압적인 리듬을 뚫고 갑자기 흘러나오는 경쾌한 멜로디가 인상적인 셋째 악장은 잊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다. 팡파르와 경쾌한 행진곡이 반복되다가 둘째 악장의 말러 풍 주제로 돌아가 끝나는 마지막 악장은 적막하다. 교향곡 제6번(1967)을 두고 평론가들은 흔히 찰리 파커에 대한 헌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말러를 연상시키는 장송행진을 담고 있는 둘째 악장이 특히 인상적이다. 두 곡을 함께 모은 히콕스/ 런던 심포니의 음반(CHANDOS CHAN 9385)은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연주로서 녹음도 아주 풍윤하고 좋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연상시키는 리드미컬한 음형 패턴이 인상적으로 반복되면서 시작되는 제7번 교향곡(1973)은 어딘가 쓸쓸하고 비극적이다. 첫째 악장의 발전부에서 호흡이 긴 현악의 선율이 금관악기군에 의하여 재즈 밴드처럼 변환되는 대목은 기발하다. 그러나 곡의 진행을 잘 들어보면 치밀하게 준비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 곡은 아놀드 자신의 세 아이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마지막 악장에 들려오는 카우벨을 작곡가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어둡고 격렬한 음향으로 막을 여는 교향곡 제8번(1978)의 첫째 악장에서는 아일랜드 풍의 행진곡이 가볍게 나온다. 슬픔의 노래가 펼쳐지는 둘째 악장을 거치면 삶의 낙관을 노래하는 셋째 악장이 기다리고 있다. 핸들리/ 로열 필하머닉의 음반(Conifer 74321-15005-2. 절판)은 세계초연녹음으로 곡의 핵심을 포착한 명연이다.
교향곡 제9번에서는 앞의 교향곡에 담겨져 있던 낙관이나 아련한 추억, 동경, 통속적인 선율은 거의 사라지고 고독과 절망만이 두드러진다. 둘째 악장의 목가는 아름답지만 적막하다. 심연으로 들어가는 듯한 피날레는 장대한 규모의 애가(哀歌)로 앞의 세 악장을 합한 것과 길이가 비슷하다. 페니/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의 연주(Naxos 8.553540)는 녹음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충분히 감동적이다.
다른 작곡가들처럼 아놀드 역시 생계수단으로 영화음악을 작곡하였지만, 장르의 매력 또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카데미 작곡상을 받은 저 유명한―특히 케네스 알포드의 ‘보기 대령 행진곡’―‘콰이강의 다리’와 함께 경쾌한 ‘Whistle Down the Wind', 'The Sound Barrier',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Hobson's Choice', 그리고 ’여섯 번째 행복의 여인숙‘이 수록된 샨도스 레이블의 음반(Chandos CHAN 9100)은 영화음악의 선곡과 편곡, 연주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훌륭한 영화음악이 갖는 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명반이다. 크리스토퍼 파머가 'The Sound Barrier'를 제외한 나머지 모음곡들을 원곡을 최대한 살려 편곡하였고, 리처드 히콕스는 런던 심포니의 화려하고 정밀한 합주력을 바탕으로 고품격의 순수음악을 들려주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지휘자들이 놓치기 쉬운 영화음악의 극적 맥락도 잘 살려낸다. ‘일곱번째 행복의 여인숙’의 피날레에서 아름다운 주선율과 ‘This Old Man’의 행진곡이 멋진 대위를 이루며 클라이맥스로 상승할 때의 고양감은 압도적인 흥분을 불러일으켜 음반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더할 나위없다. 영화음악과 콘서트 음악을 가리지 않는 아놀드의 일관된 창작정신을 보여주는 훌륭한 기록이다.
* 이 글은 신나라 레코드에서 발간하던 격월간지 『음악과 음반』에 연재되던 ‘미지의 작곡가를 찾아서’ 시리즈에 기고한 첫 번째 원고였다. 이후 미클로시 로자, 아놀드 백스, 에두아르트 투빈,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등에 관한 글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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