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 브루크너, 브람스, 바그너 중 어느 하나만 잘 해도 그 지휘자는 거장으로 숭앙받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귄터 반트는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브루크너 외에 달리 특별한 명반을 남긴 것같지 않지만, 모두 그를 거장으로 부르는 데에 별 다른 이론이 없습니다. 반면 엘가나 본 윌리엄스, 백스, 심슨의 명반을 남긴 영국 지휘자를 거장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듣는 사람들 대다수에게는 아직도 영국은 훌륭한 작곡가를 내지 못한 창작 후진국이고, 독일-오스트리아 계 음악가들이 클래식의 진수라는 ‘편견’이 자리잡고 있는 것같습니다.
버논 조지 토드 핸들리(Vernon George Tod Handley)를 기억하십니까. 영국 사람들이 토드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그가 안타깝게도 2008년 9월 1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1930년 11월 11일생이라고 하니 우리 나이로는 79세가 되는군요. 평균수명 이상은 사셨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휘자로서는 한창인 나이이니 애석할 뿐입니다. 지휘자 버논 핸들리의 이름은 늘 영국의 작곡가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음반만 보더라도 말콤 아놀드(Malcolm Arnold), 아놀드 백스(Arnold Bax), 레이프 본윌리엄스, 에드워드 엘가, 그랜빌 밴톡(Granville Bantock), 러틀랜드 바우튼(Rutland Boughton), 케네스 레이튼(Kenneth Leighton), 제랄드 핀지(Gerald Finzi), 로버트 심슨(Robert Simpson) 등등 영국 작곡가의 것이 압도적이네요. 아, 물론 로열 필을 지휘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제2번이 담긴 훌륭한 SACD 음반도 있기는 합니다만, 저 자신도 이상할 정도로 핸들리가 지휘한 다른 나라 작곡가 음반을 한 번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국 작곡가의 수호자로 각인된 사람인게지요.
그가 지휘한 영국 작곡가의 음악들은 언제나 믿음직스럽습니다. 그는 이들 영국 작곡가들이 진정 위대한 거장임을 증명해냅니다. 그가 지휘한 연주의 특징을 일반화시켜 말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단순화시켜 요약하면 역동적인 리듬감이 만들어내는 추진력을 바탕으로 적정하게 밀고 당기는 명료한 프레이징이 이루어지기에 그가 지휘하는 음악은 늘 신선하고 생생합니다. 전체적인 구성을 아우르면서도 각 성부의 세세함을 잘 살려냅니다. 그 과정에서 곡이 가진 복합성이나 모순성도 드러나게 하는데, 이것이 괴팍한 방식이 아니라 쉽고 율동적인 해석을 통하여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한다는 점에 버논 핸들리만의 매력이 있습니다.
그 동안 그가 다른 나라 작곡가들의 음반을 얼마나 남겼는지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 뒤늦게라도 찾아 들어봐야 겠습니다.
『그라모폰』에서 행한 인터뷰에서 핸들리는, 덴마크의 거장 반 홀름뵈(Vaghn Holmboe)의 교향곡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었는데, 그가 홀름뵈 사이클을 진행하였다면 또 얼마나 훌륭한 연주가 탄생하였을까요. 핸들리가, 하이페리언 레이블을 통하여 진행된, 로버트 심슨의 교향곡 사이클에서 들려준 빼어난 해석에 미루어 보건대, 홀름뵈는 물론이고 닐젠(Carl Nielsen)이나 브루크너의 교향곡 사이클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음반 역사의 큰 손실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버논 핸들리는 영국의 잘 나가는 지휘자들에게 곧잘 수여되는 작위를 받지 못했습니다. 실력에 비하여 합당한 명예를 얻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건강 문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잦은 스케줄 번복, 연주회 취소 등으로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했고, 유럽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는 더더욱 일정 소화가 힘들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음악평론가들과 애호가들이 상당수 존재하여 왔고, 수많은 음반을 남긴 데다가 그 음반들 중 일부는 이런 저런 상도 타곤 했으니 반드시 그를 불운한 지휘자로만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진정 위대한 관현악곡들이 19세기말과 20세기 영국에서 작곡되었고, 이것을 제대로 해석해 숱한 명연을 들려준 거장이 바로 버논 핸들리입니다. 그가 영국 음악에 대하여 이룬 업적은, 반트나 프루트벵글러가 독일계 음악에서 이룬 업적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마츄어 조류학자로서 한 해의 몇 주간 동안은 야생의 새를 연구하고 촬영하는 데에 몰두하였다고 하지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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