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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이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1번, "1905"

음악가와 음악

by 최용성 2009. 5. 18.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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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1905년은 러시아 혁명에서 잊지 못할 해이다. 러일전쟁의 패배로 데모와 스트라이크가 빈발하던 러시아. 190519일 모스크바 광장은 황제에게 자비를 청원하기 위하여 행진하는 노동자들로 가득 찼다. 여자, 아이들도 많이 참가한 평화적 행렬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군인들은 무차별 발포하고 칼을 휘둘렀다. ‘피의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대학살극이 벌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하였다. 이때부터 러시아 민중들 사이에 남아 있던 황제에 대한 애정은 사라지고 그해 10월 소비에트의 모체가 되는 노동자 대표 평의회가 생겨난다. 결국 1917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는 전복되고 황제 일가는 몰살당한다.

 

 Bloody Sunday in St. Petersburg. Imperial War Museum/Wikimedia Commons

 

루나차르스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비극의식,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러시아 혁명 후 문화에 대한 소비에트 당국의 공식적 입장은 초대 교육인민의원이기도 했던 문예이론가루나차르스키의 말에 그대로 압축되어 있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면 그 즉시 종교는 불필요하게 되고 따라서 비극의식도 삶에서 사라질 것이다. (조지 스타이너/윤지관 역,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 종로서적에서 재인용)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생산대중의 정신건강을 증진하는 목적의식적 예술형식이니 비극적이거나 모호한 감정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당 엘리뜨들은 생각하였다. 음악이라면 러시아 대중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곡이어야 했다. 노골적으로 말해 스탈린 정도의 식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면 사회주의 리얼리즘 음악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동음악이라는 식. 인류해방과 정치경제의 진보를 내세운 자들이 예술세계에서는 극히 보수적이고 회고적인 취미에 빠져 구예술에 저항하는 진보적인 전위예술을 싫어했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소련의 문화관료란 자들은 애당초 아놀드 하우저의 경구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일이다.소수에 의한 항구적 예술독점을 방지하는 방법은 폭력적인 예술의 단순화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능력을 기르고 판단하는데에 있다. 문화적 독점을 해소하는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의 창조를 위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  (하우저/ 백낙청염무웅 역,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창작과 비평사, 마지막권)

 

    스탈린 치하에서 폭력적인 예술의 단순화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찬양받는다. 당 엘리뜨들은 예술의 형식과 내용을 이데올로기로 규정할 수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신앙에 사로잡혔다. 쇼스타코비치의 걸작 오페라 <무셴스크의 맥베스 부인>(정명훈이 지휘한 좋은 음반이 있다)는 초기의 열광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기호에 따라 퇴폐음악으로 규정되고---코른골트의 음악을 타락한 음악(또는 퇴폐음악)”으로 규정한 나찌 문화정책과의 일치!---비열한 일부동료 음악가들조차 정치적 곧 음악적인 출세의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그의 사상 문제까지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에 몰린 작곡가를 구해낸 곡이 제5번 교향곡이다. 19371121일 레닌그라드에서 한 초연은 큰 성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솔로몬 볼코프, 증언, 종로서적)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기쁨과 행복감이 오케스트라에 충만하여 봄바람과도 같이 홀 안에 넘쳐 흘렀다”(‘증언에서 재인용)라고 극찬하였다. 스탈린마저 이 곡을 인정하자 모든 것이 갑자기 달라진다. 그때까지 쇼스타코비치를 매장하려던 자들의 일치된 찬양이 따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5번 교향곡은 혁명 교향곡으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회주의 관료와 문화인들이 제5교향곡의 피날레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찬가 내지 개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쟁을 유발하는 자서전인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 쇼스타코비치 회고록>을 보면 쇼스타코비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나는 놀랍게도 스스로 훌륭한 해설가로 자처하는 사람이 내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내가 제5, 7번 교향곡의 피날레를 힘있고 기쁨에 넘친 것으로 쓰기를 원했다고 주장했다. 5번이 그렇게 끝나는 것보리스 고두노프에서처럼 기쁨은 공포 속에서 강화되고 창조된다. 그것은누군가 당신의 머리를 막대기로 때리면서 너의 작업은 기쁨이다라고 말하면, 당신은 벌떡 일어나 우리의 작업은 기쁨이오라고 중얼거리면서 걸어가는 것과 같다. 파데예프는 제5번의 피날레가 돌이킬수 없는 비극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의 러시아적 알콜성의 영혼으로 그것을 느꼈음에 틀림없다.(증언)

 

    승리의 나팔과 불길한 개선행진 속에서 비극의식의 결여가 강요되는 초억압적 긴장감 때문에 제5교향곡의 피날레는 역설적으로 비극성을 얻게 된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속에 내재된 비극의식은 기쁨과 승리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고 또다른 모순의 계기를 함축한다. 투쟁적이고 변증법적으로 갈등을 극복하고 해결에 이르는 베토벤의 교향곡 세계와 겉으로는 많이 닮아있지만, 불안과 갈등의 씨앗이 끝까지 숨어서 더 강화되며 종결되는 아이러니로 인하여,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독특한 중의성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익이나 좌익 어디에서도 그의 음악에 서로 다른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이념과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예술성을 얻게 되었고 또한 논쟁거리가 된다. 바로 이러한 본질적 비극의식이 제11번 교향곡에도 여전히 살아 있고 몇개의 작품을 제외한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대부분을 관통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의 교향곡은 죽은 사람들을 위한 묘비이다.(증언)

 

    쇼스타코비치는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혼에 더 가까운 음악가였던 것. 조지 스타이너의 깊이있는 평론서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를 일관하는 주제는 바로 이 비극의식의 문제이다. 민중의 벗이고 그 자신이 하류층이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혁명의 판테온에서 추방되고, 거만한 지주계급이었던 톨스토이가 사회주의 혁명의 판테온에 안장되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지적정신적 기원은 그들의 작품 속에 비극의식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달려 있었다는 것, 그 결과 인간개조에 대한 자신감과 이성신뢰의 진보적 메시지를 담은 톨스토이의 귀족적 작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아 떨어져 소비에트 당국에 의하여 수용되었고, 인간의 본질적 비극의식에 파고든 민중적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추방될 운명이었다는 것이 스타이너의 통찰이다. 이러한 통찰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담겨진 비극의식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학살을 그린 교향곡

    제5번이나 제7번 교향곡에서 그랬던 것처럼 쇼스타코비치는 언뜻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따르는 듯한 어조로 1905피의 일요일학살을 교향곡 제11번에 담았다(교향곡 제12번이 <1917>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두 곡은 러시아 혁명 2부작이다. 그러나 레닌을 찬양하는 듯한 내용의 교향곡 제12번은 적어도 내 생각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사이클 중 가장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해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되었다. 묘하게도 헝가리 민중들이 소련군에게 학살당하고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이 교향곡은 표제음악이고 음악적 재료는 주로 러시아 혁명가요이다. 첫째 악장은 <왕궁의 광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아다지오 악장이다. 학살 직전 왕궁 앞의 불길하고 답답한 고요를 현악의 깊은 울림으로 나타낸다. 러시아 죄수들이 즐겨불렀다는 <들어라, 사람들이여><갇힌 사람>이라는 노래를 주제로 하고 있다. 둘째 악장에 이르면 시위대의 움직임이 부산하게 묘사된다. 군대의 움직임, 총소리가 묘사되고 처참한 학살의 현장이 작은 북, 팀파니, 심벌즈와 관현악이 어우러져 절규하듯이 극히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압권이다. 둘째 악장의 어느 부분은 프란츠 왁스먼이 1951<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 드라이저의 그 유명한 소설 <아메리카의 비극>의 뛰어나고 감상적인 영화화! 조지 스티븐스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엘리저베스 테일러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섬세한 연출력을 보여주고 있다)를 위하여 작곡한 음악(새 애인과 그녀의 부를 위하여 임신중인 옛애인을 죽이려는 주인공의 갈등을 나타내는 대목)과 거의 일치한다.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 헐리웃 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을 쇼스타코비치가 왁스먼의 음악을 표절하였을리는 만무하고 유사한 작풍을 지녔던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음악역사의 드문 우연일 것. 여기서는 쇼스타코비치가 1951년 발표한 <10개의 시>라는 무반주 합창곡집 중 6번째 곡 <19>의 주제를 사용하고 있고 그것이 바로 둘째 악장의 제목이 되었다

 

    셋째 악장은 장송곡이다. 제목은 <영원한 추억>. 혁명가 <동지는 죽지 않는다><영원히>에 기초한 다소 통속적이지만 가슴을 울리는 선율 위로 목관의 불길하고 현대적인 음향이 제시된다. 넷째 악장의 피날레는 <광란의 폭군>이라는 혁명가를 기초로 한 행진곡 풍의 론도이다. 리드미컬한 음의 움직임이 압도적 긴장감을 자아낸다. 소비에트 정권과 그 앞잡이 음악가들은 이를 혁명의 예고 또는 프롤레타리아(사실은 볼셰비키)의 궁극적 승리로 단순해석하였고 누군가는 지금도 그렇게 왜곡하고 싶겠지만, 내가 듣기에 이 피날레 부분의 음악은 피할 수 없는 비극성을 그안에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이다. 종이 울리는 마지막 순간에는 승리도 결말도 희망도 없다. 새로운 모순이 잉태된다. 제목 그대로 <경종>을 울리며 우리 모두의 각성을 요구한다. 죽은 자들을 기억하라, 잊지 마라, 억압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시작이다!

 

마지막 악장 "경종"에서 실제 종소리가 울려 더 깊은 감동을 주는 실황 음반이다;

 

    아무런 간이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곡을 의문부호로 마무리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어법은 학살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그리고 루나차르스키나 소비에트 문화관료들이 그토록 싫어하였던 인간의 원초적 비극의식이 역사 속에 계속 살아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1905년 러시아라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학살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절규를 전한다. 더 이상 5월을 아름다운 계절로만 느낄 수 없게 한 19805월 광주 이후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그의 제11번 교향곡은 잔혹한 학살을 잊지 말고 제대로 기억할 것을 절절하게 호소한다. 학살 이후를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그것을 함께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양심적인 작곡가의 음악은 무엇인가 보편적인 울림을 전하여만 한다. 그 일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1번은 해내고 있고, 여기서 음악예술의 구체성과 보편성이 만난다.

                         

 

우리나라와 쇼스타코비치

    냉전 시대 우리나라에선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빨갱이 음악으로 분류되어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그러나 작곡가의 아들과 손자가 서방세계에 망명하자 모든 것이 바뀐다. 갑자기 쇼스타코비치는 반공투사로 선전되었고 그의 음악은 해금되고 심지어 장려되었다. 그의 교향곡은 공산독재에 대한 내면적 저항의 음악으로 선전되었다. 또 다른 왜곡이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에는 그의 아들과 손자를 우리나라에 초빙하여 아들은 서울 시립 교향악단을 지휘하고 손자는 피아노 협연을 한 일(여기서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제5번이 연주되었다. 특히 제5교향곡의 연주는 열기와 힘이 가득찬 명연으로 내가 들은 서울 시향의 연주중 몇 손가락 안에 꼽고 싶은 좋은 연주였다)이나, 이미 종로서적에서 발간한 좋은 번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서전 <증언>을 다시 번역출간하는 일이나 막심의 초청에 조선일보사가 앞장섰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대목이다. 현재는 이론과 실천에서 나온 번역본을 구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음악을 듣는가 - 산 자여 따르라!

    인류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한 학살, 그 다음에 음악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무서운 세상에서 왜 우리는 음악을 듣는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1번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을 솔로몬 볼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해답의 한 실마리는 되지 않을까.

 

“19589, 예프게니 므라빈스키가 레닌그라드 필하머닉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제11번 교향곡을 지휘했다. 1956년의 헝가리 봉기후에 작곡된 교향곡 제11번은 민중과 지배자, 그리고 쌍방의 모순관계를 다룬 것으로, 특히 제2악장은 무방비 상태의 민중들의 처형을 사실적 진지함으로 예리하게 그려내고 있다. 충격의 시학이었다. 내 일생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타인을 골똘히 생각하며 연주회장을 나섰다.(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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