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기품을 지닌 사람답게 그녀는 도도하고 당당하다. 잔인한 운명과 마주하여도 전혀 굴복하지 않을 기세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순결하고 호기심이 넘친다. 흑백 사진 속의 그녀에게서는 세상을 초월한 듯한 아름다움, 긍지 그리고 끝없는 슬픔이 함께 느껴진다. 고고한 처녀의 모습 속에서 시간은 영원히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현대의 중요한 작곡가들인 아론 코플랜드, 레너드 번스타인, 아스토르 피아졸라, 월터 피스톤 등등의 대모격인 나디아 불랑제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릴리 불랑제는 어린 시절부터―나디아는 가지지 못했던―천재 작곡가의 자질을 보였다. 천재 동생은 미모에서도 언니를 뛰어 넘었으니 나디아의 정신세계에 릴리가 미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을 것. 그러니 뒷날 나디아 불랑제가 크리스토퍼 파머에게 “릴리는 1918년에 죽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이끌며 돕고 있어요”라고 말한 것도 이해가 간다.
스물이 채 안된 나이에 릴리는 로마 작곡 대상을 수상하여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병약했던 릴리의 짧은 삶은 투병생활로 이어졌고 불과 스물 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재능을 받았으니 이 정도의 시련이 공평하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게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인생의 덧없음과 자기 존재가 소멸해감을 느끼며 결사적으로 작곡하던 릴리의 절박한 심경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젊은 날 작곡한 음악임에도 그녀의 작품세계는 의외로 심오하다. 거대하고 숭고한 정신성을 담은 종교음악에서 섬세하고 신비로운 가곡까지, 작품 수는 적고 성악곡의 비중이 크지만, 그녀가 만들어낸 음악세계는 다양하고 원숙하다.
릴리의 종교음악에서는 프랑스적이라기보다는 유대적인 색채가 느껴진다. 로자의 서사극음악를 예감시키는 대목도 보인다. 시편을 텍스트로 삼은 음악에서 처음 시작되는 저음의 울림은 가늠할 수 없는, 끝없는 신비의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메시지와 같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저음이다. 그리고 서서히 합창이 떠오르는 그 장엄하고 비극적인 세계를 듣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다 피지 못한 삶이 자꾸 떠오른다. ‘피에 예수’(Pie Jesu)를 보이 소프라노가 약하디 약한―불안한―발성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듣노라면 눈물이 날만큼 가슴이 저려온다. 어쩌면 음악에 대한 직접 반응이 아니라 작곡가의 짧은 생애에서 느끼는 감상 덕분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역시 음악을 통하여 오는 것이니 결국은 음악의 힘이다. (오해하지 말 것, 릴리 불랑제의 음악은 결코 유약하거나 여리지 않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음악사에서도 여자들은 남자들의 장식처럼 취급되었다. 특히 작곡가들의 경우는 정도가 더 심하였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 클라라 슈만, 파니 멘델스존, 샤미나드, 비치…. 우리 나라처럼 획일적 사고가 쉽게 자리잡는 풍토에서는―예를 들어 ‘젊은 사람은 바흐나 베토벤, 브람스를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 ‘영국이나 미국은 음악소비국일 뿐이고 뛰어난 작곡가가 없다’, ‘영화음악은 싸구려 대중음악이다’, ‘미국 연주자는 독일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 ‘빠른 템포는 바흐나 브루크너 음악에 맞지 않는다’, '멘델스존은 풍족하게 자라 음악에 깊이가 없다'라는 식의 극단적 편견이 아무런 검증도 받지 않고 판친다―20대에 죽은 ‘소녀 릴리’의 음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으나, 그 장엄하고 비통한 종교음악의 세계는 음악사의 다른 걸작들처럼 충분히 감동적이며 인생의 깊이를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가곡들은 얼마나 섬세하고 신비로우며 아름다운가. 물리적으로는 짧지만 실은 영원을 살아낸 작곡가의 음악이 여기에 있다.
모든 소멸하는 존재는 덧없지만 그로 말미암아 아름답고, 불멸은 그 안에 있는 것 아닐까? 한껏 욕망을 실현하려고 몸부림치다가 어느 순간 욕망을 넘어 진리에, 아름다움에 이르지만 결국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 바로 그렇기에 숭고하고 아름다운 그 사람은 인류의 기억 속에서 불멸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녹음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미국의 에베레스트가 발매한 1960년대 녹음은 1980년대에 EMI에서 한 번 발매되었다가 1990년대에 와서 오리지널 레이블대로 나왔다. 지금은 아마 절판되었을 것같다. 명지휘자 이고르 마르케비치가 이 비극적인 음악을 아주 설득력있게 해석하고 있다. 특히 성악과 관현악의 밸런스에 대한 그의 통제력은 칭찬할만 하다. 나디아 불랑제가 직접 감수한 이 음반의 가치는 역사적으로 계속 평가받을 것이다.
미국 지휘자 마크 스트링거(Mark Stringer)가 룩셈부르크 필하모닉을 지휘하여 종교성악곡과 관현악곡 등을 담은 팀파니 레이블의 1998년 앨범도 좋지만, 얀 파스칼 토틀리에가 BBC 필하모닉을 지휘한 샨도스 레이블의 앨범은 2000년 그라모폰상 수상작답게 연주와 녹음, 선곡(‘파우스트와 헬레네’가 실려 있다) 모두 탁월하므로 반드시 들어보아야 한다. 많은 곡을 남기지 않은 릴리 불랑제의 앨범이니만큼 음반마다 레퍼토리가 중복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런 정도의 수준이라면 오히려 해석의 지평을 넓혀간다는 차원 뿐만 아니라 절대평가 면에서도 환영할만한 일이다.
릴리 불랑제의 조금 더 부드럽고 세속적인 음악을 들으려면 뛰어난 여성지휘자 조앤 팰레터가 지휘한 여성 필하머닉의 여류 작곡가 음악모음집(클라라 슈만, 패니 멘델스존, 타파레 등의 작품이 함께 실려 있는 이 음반은 자료로서의 가치는 높으나 연주의 완성도는 다소 미흡하다)을 찾으면 된다. 종교음악들에 비하여 더 인상주의적이고 더 프랑스적이다. 대중적 흡인력이 있으면서도 외면되어 왔던 레퍼토리들 선정에 독보적 역량을 보여주던 코흐 인터내셔널 클래식스 레이블에서 나왔다.
미클로시 로자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고(故) 크리스토퍼 파머(Christopher Palmer)가 또한 릴리 불랑제의 옹호자였다는 사실(두 작곡가 모두 그의 인생을 바꿨다고 할 정도이니)을 접하니 새삼 우리가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 인연의 고리, 관계망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파머의 뛰어난 해설을 담은 하이페리언 레이블의 가곡 음반에는 섬세하고 신비로우며 심오한 프랑스 혼이 잘 살아 있다.
* 아래 사진을 보라. 나디아와 릴리 불랑제 콩쎄바토리와 미클로시 로자 콘서트라니. 단순히 그 장소에서 연주회가 열리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달리 보면 로자-파머-불랑제로 이어지는 인연의 고리란 정말 경이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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