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그가 남긴 교향곡 9개 안에는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여정이 펼쳐지고 있다.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설레임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비밀이자 생명의 원천이 내 안과 밖에 함께 있음을 깨닫기까지 이어지는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
이미 수많은 명연이 있지만, 새로운 통찰력이 담긴 연주들이 끊임없이 나올 정도로 이들 교향곡에는 무궁무진한 비밀이 있다. 다행히 고음질의 SACD 포맷으로도 여러 종류의 사이클을 구할 수 있다. 전체적인 첫인상만 주마간산격으로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우선 아날로그 시절의 연주부터 살펴보자. 쿠르트 마주어가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전집(Pentatone. 낱장으로 나왔다. 각 음반을 접착제로 붙인 종이에 넣은 박스는 가격이 다소 저렴하다)은 4채널로 복각되었다. 마주어의 베토벤은 냉전 시대 동독 진영에서 나온 연주여서 큰 관심을 모았지만, 다소 희뿌연 음향으로 리마스터링된 탓인지, 아니면 날렵하고 세부가 강조되는 최근 연주경향과는 상반된 구식 해석 때문인지, CD 시대에 와서는 크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원래의 쿼드라포닉 녹음을 그대로 살려낸 펜타톤의 DSD 복원을 통하여, 요즘 연주처럼 상쾌하고 예리하지는 않지만, 중후하면서도 두터운 정통 독일 오케스트라 음향을, 다소 풍부한(누군가는 지나치다고 할) 홀톤을 동반하여, 들을 수 있다. 더욱이 멘델스존 이래 독일음악의 적통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아닌가. 마주어의 베토벤은 화려하거나 섬세하지는 않지만, 장대하고 진중하며(시대악기 연주나 절충 연주를 선호하는 기준으로는 대체로 느린 템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다른 관점으로는 적절한 템포일 수도 있을 것) 베토벤의 강인한 의지를 느끼게 하는 직관적인 깊이가 있다. 무엇보다 진한 인간미를 맛볼 수 있다. 베토벤 교향곡의 힘은 가슴을 울리는 영혼의 교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마주어의 전집은 진솔하게 보여준다. 여기 진짜 베토벤의 소리가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남긴 4개의 공식 전집 가운데 60년대 전집에 대한 평가가 비교적 후한 편이지만, 앙상블의 정교함에서 비교대상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어떤 부분에서는 다소 작위적일 수도 있는) 70년대 사이클이나, 만년의 개성이 투영된 80년대 전집도 훌륭하다. 24Bit/96KHz PCM 방식으로 리마스터링된 SACD를 채운 것은 60년대 사이클(DG. 낱장도 있으나, 낱장 케이스에 더하여 보너스로 리허설을 담은 음반을 추가한 박스세트가 있다).
오리지널 이미지 비트 프로세싱까지 동원된 CD 리마스터링(베토벤 전집에 수록된 버전)조차 온전하게 살려내지 못하였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이음새 없는 듯한(카라얀의 특기인 레가토 아티큘레이션이 반영된 결과일 것) 화사한 음향을 처음으로 제대로 들려주는 점에서 SACD 포맷의 위력이 확인된다. 셈여림의 변화를 아주 미시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지휘자와 이에 호응하는 오케스트라의 공력이 세세하게 포착되는 하이엔드 음향은 시대의 한계를 잊게 할 정도이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 군단의 전집을 혐오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지휘자의 전집을 모두 꺼내 들고 연속 비교 감상을 해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 관현악의 절대적 아름다움과 정확한 다이나미즘, 앙상블의 정교함, 구조적 짜임새와 추진력 등에서, 70년대 카라얀을 제외하면, 이 전집을 따라올 대안을 찾기는 매우 힘들다. 유감스럽게 멀티채널은 아니지만, 스테레오 재생에서도 SACD의 위력을 느끼게 하는 사이클이다. 강력 추천!
1980년대에 디지털(?)로 녹음된 헤르베르트 케겔/ 드레스덴 필하모닉 전집(Cappricio. 낱장으로 별도 포장된 5장을 호화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은 박스 세트)은 좀 과하다싶을 정도로 인템포에 가깝다. 크게 흠잡을 데가 없는 연주임에도 강약이나 템포, 프레이징, 아티큘레이션에서 다소간 고지식하여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인공적으로 멀티채널을 만든 탓인지 무대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뿌연 막 같은 것이 음상에 끼여 있어 악기음의 선명도나 투명도가 떨어지고 자연스런 실재감도 부족하다. 게인이 낮게 설정되어 있고, 소리결이 무른 것도 감점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요컨대 SACD 포맷의 장점을 제대로 잘 살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소리를 크게 하고 들으면 많이 개선된다. 여하튼 스테레오 재생이나 CD 재생에서 더 박력있는 베토벤을 들을 수 있으니 멀티채널을 위해서는 성공적인 복원은 아닌 것같다.
1980년대에 나온 베토벤 사이클 중 가장 호평을 받은 것은 귄터 반트/ 북독일 방송교향악단의 전집(RCA)이었다. 베토벤 교향곡의 유머와 품격, 중용적 면모를 잘 구현한 명연이다. 에소테릭이 SACD로 복원하였다(Esoteric/RCA. 5장의 일반 케이스를 종이박스에 담았다). 원소스가 PCM이지만, 에소테릭의 기술진은 새로운 마스터를 사용하여 해상도 높으면서도 유려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오리지날 레이블에서 고해상도로 복원한 CD의 음향도 훌륭했지만, 에소테릭의 SACD버전을 듣다 보면 CD 안에 잃어버린 정보가 많았음을 알게 된다. 관악기의 뉘앙스를 잘 살려내면서 현악기와 절도있게 조화시킨 반트의 더하거나 뺄것이 없는 균형잡힌 해석이 생생하다. PCM 소스도 제대로 DSD 리마스터링을 하면 소리가 개선됨을 알게 해주는 사례이다.
원래부터 SACD로 나온 사이클 중 현재 완성된 것은 하이팅크와 런던 심포니, 밴스케와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예르비와 브레멘 독일 캄머필하모닉 3가지이다. 모두 시대 흐름을 반영하여 조나단 델 마가 교정한 베렌라이터 판본을 사용하고 있다. 크게 보아 절충적인 해석인 셈. 굳이 나누면, 하이팅크와 밴스케가 정통에 더 가까이 있고, 예르비는 시대악기 연주의 성과를 더 적극 수용하는 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최근에 완성된 파보 예르비/ 브레멘 독일 캄머필하모닉 사이클(RCA. 아직 낱장으로만 구할 수 있다)의 특징은 상당히 빠른 템포와 강약의 극단적 대비, 짧은 호흡, 그리고 실내악적 세부묘사로 요약될 것. 3종 전집 중 시대악기 연주에 가장 가깝다. 그렇지만 음향은 유려하여 SACD의 장점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다. 처음에는 꽤 과격하게 들리거나 호흡이 너무 짧아 다소 숨가쁘게 느껴질 수 있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가장 나중에 나온 제9교향곡에서는, 상대적이만, 부분부분 서사적 스케일과 긴 호흡을 들려주기도 하니까.
베토벤의 교향곡이 서양음악사를 뒤흔든 '혁명성'을 지닌 음악임을 현대에 맞게 풀어낸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청중을 놀라게 하려는 효과 위주 해석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음악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저해할 정도로 과격하거나 괴팍하지는 않다. 3개의 사이클 중 녹음이 가장 선명하고 섬세하며 아날로그의 맛이 날 만큼 자연스럽다. 시대악기 연주 성과를 창의적으로 반영한 역동적인 연주로 여러 가지 점에서 신선하다.
오스모 벤스케/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사이클(BIS. 낱장으로 발매됨. 최근 5장을 묶은 박스가 저렴한 가격에 나왔다)은 현대 오케스트라를 사용하고 있지만, 카라얀이나 번스타인처럼 호흡이 유장한 연주는 아니다. 세부에 주목하면서 내적으로 강인한 의지를 지닌 남성적 베토벤 상을 그려내고 있다. 셈여림, 템포 등이 극적으로 대비되면서도, 정교한 앙상블로 악곡 전체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루어내고 있다. 치고 빠지며 속도감있게 진행되는 최근 연주 경향이 반영된 해석이다. 긴장과 이완을 대비시키면서 드라마를 잘 구현하고 있지만, 피가 끓거나 뜨거운 연주는 아니다. 역시 감성 표현이 풍부한 쪽도 아니다.
녹음은 잘된 편이지만, 아쉽게도 예르비 사이클보다는 덜 선명하고, 아날로그 감성도 부족하다. 게인이 낮게 설정되어 있어 멀티 채널로 음량을 크게 하고 들어야 지휘자가 의도한 연주 효과를 충분히 즐길 수 있지만 다소 둔탁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해외 평론가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은 전집이고, 그럴만한 미덕을 지니고 있지만, 손이 자주 가지 않는 편.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집(LSO Live. 낱장으로 발매됨. 가격이 조금 저렴한 종이 박스 세트도 나왔다)은 옛 시대의 거장답지 않게(?) 첨단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예르비보다는 대체로 느리지만, 정통적 해석에 비교하자면 다소 빠른 편이고 어떤 부분은 강력하게 돌진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저역 악기가 강조되며 곡의 중심을 잡아가는, 스케일이 큰 서사적인 해석 기조를 지키는 점에서 세 개 사이클 중 가장 정통적이고, 이 점에서 깊은 설득력을 발휘한다. 6장이지만, 대신 3중 협주곡과 레오노레 서곡 제2번을 멀티 채널로 들을 수 있는 이점도 있다.
런던 심포니는 진정 뛰어나지만, 바비칸 센터의 건조한 음향특성 탓에 다소간 실황 녹음의 불이익을 보고 있다. 게다가 하이팅크의 지적 접근이 어떤 대목에서는 음향의 문제점을 증폭하는 것같다. 그래도 멀티 채널에서 볼륨을 높여 들으면 불만이 거의 사라진다. 오케스트라가 잘 조망되면서 비교적 자연스러운 음향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 조금 더 녹음이 잘된 밴스케의 사이클보다 오히려 음향이 자연스럽게 들린다. 다만 조금 더 울림이 풍부한 연주공간이었다면, 더 훌륭한 성과가 나왔을 것이어서 약간 아쉽다. 그래도 새로운 경향이 가미된 정통적 연주라는 점에서 추천할만 하다.
특이하게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예르비, 벤스케, 하이팅크의 사이클 모두 열혈과는 거리가 멀다. 힘이나 의지, 패기, 파워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지적 계산에 따라 냉철하게 설계되고 구현된 듯한 느낌 때문. 이들이 구사하는 스포르찬도나 크레셴도는 분명히 베토벤 답지만 주정주의적인 옛 해석들과는 어딘가 뉘앙스가 다르고, 격정적이라기보다는 이지적이어서 옛 거장들과 같은 폭발적인 연소를 맛볼 수는 없다. 개별 교향곡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3종 중에서는 예르비의 사이클을 가장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예르비의 사이클이 최고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밖에 헤레베헤/ 플랑드르 필하모닉(Talent, PentaTone), 드 브리엔드/ 네덜란드 심포니(Challenge), 가자리안/ 뷔르템베르크 실내악단(Bayer), 즈베덴(데카/ 구 필립스)가 전집을 완성하였고, 라이스키(Tacet), 드 빌리(Oehms Classics), 안토니니(Oehms Classics, Sony) 등이 사이클을 진행 중이다.
타쳇 레이블에서 나온 라이스키 지휘의 베토벤 교향곡은 서라운드 음향을 적극 활용한 사례이다. 마치 지휘자 석에 있는 것처럼 현악이 리어 스피커를 통하여 듣는 사람의 옆을 감싸고, 목관이 가운데에서 더 앞으로 나오고, 그 뒤에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계단식으로 3차원 배열을 하는 임장감이 특징이다. 2채널은 물론이고 다른 멀티 채널과 비교하여도 현저히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입체적이다. 생소하다고 할만큼 기존의 재생방식과는 다르다. 음향의 성패는 리어스피커의 성능이 좌우한다. 연주는 최근 경향을 반영하여 섬세하고 깔끔하다.
헤레베헤의 경우는 논란이 많다. 일단 음향은 DSD녹음의 장점이 잘 살아나 가장 아날로그답게 유려하며 자연스럽고 선명하다. 문제는 해석이다. 그의 베토벤은 투쟁적이지도 않고 강인하지도 않은 편이다. 부드럽고 섬세하며 따뜻하다. 예상할 수 있듯이 짝수번호에서는 이것이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홀수 번호라면 이야기가 다르기에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Talent에서 출시된 탐미적인 제7번은 예외이다). 그래도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주고 치우침없는 아름다운 음향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좋은 쪽으로 평가하고 싶다.
프랑스 지휘자 드 비이가 비엔나 라디오 심포니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사이클은 현대 오케스트라로도 여전히 많은 것을 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케스트라의 기량이나 녹음 모두 뛰어나고 중후한 맛이 살아 있다. 아직 미완인 이 사이클을 통하여 1965년생인 프랑스 지휘자에게서 거장의 풍모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고 하면 좀 이른 평가일까?
전집에 수록된 개개 교향곡의 해석과 연주에 대한 평가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집중하여 여러 차례 듣다보면 아마, 처음 느낌이 그대로인 경우도 있겠지만, 평가가 달라지는 대목이 생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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