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어디서나 영화를 흔히 접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영화애호가라면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 정도는 다 기억할 수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는 주말이나 공휴일 같은 때에만 영화를 방영해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기억의 왜곡 속에서 유별나게 반짝거리는 청춘의 빛 때문인지, 그 시절 본 영화들은 뭔가 더 가슴에 남는 것같습니다. 그 중에 스토코프스키(영국인이므로 스토코우스키가 더 정확한 발음일 수도 있지만―<판타지아>에서 미키는 그렇게 발음합니다―어쩐지 이 거장에게는 口習이 되기도 한 동유럽식 발음이 더 어울립니다)가 나온 두 편의 영화가 있습니다(당대 거장들이 대거 출연하는 극영화 <카네기 홀>에서도 스토코프스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디즈니의 최고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판타지아>이고, 다른 하나는 <오케스트라의 소녀>입니다.
은발에 크고 잘 생긴 지휘자가 지휘봉 없이 맨손으로 지휘하면서 뿜어내는 시각적 카리스마는 압도적이었고, 명지휘자란 모름지기 이래야만 한다는 인상을 남겼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쇼맨쉽, 원곡을 마음대로 고치는 편곡 지휘자, 현란한 과장 등등의 비판이 따라 다녔고, 그는 ‘순수’를 지향하는 사람들 특히 독일-오스트리아 클래식의 ‘엄숙주의’ 전통을 최고로 치는 우리 평론가나 애호가들에게는 무시해도 좋을 지휘자인 것처럼 여겨지곤 했었지요. 그러나 더 넓은 세상은 스토코프스키를 잊지 않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의 음악을 열혈지지하는 사람들은 사라지기는커녕 더 늘어났습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후계자인 유진 오먼디나 동시대의 대다수 지휘자들이―푸르트벵글러나 토스카니니, 발터 등을 제외하면―열광적인 애호가를 거느리지 못하고 있음에도 꾸준히 스토코프스키에게 경외를 보이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변함없이 발매되는 음반 수에서도 확인됩니다. 쇼맨쉽과 과장, 인기영합만으로는 시대를 뛰어넘어 팬들을 만들어낼 수 없는 일. 그렇다면 스토코프스키의 긴 생명력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그는 오케스트라의 마법사였습니다. 어떤 오케스트라이든지 자신의 색으로 음을 빚어냈고, 그 결과는 휘황찬란하면서도 속이 꽉 차 풍성하고 윤기있게 공간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유기적 음향(스토코프스키 사운드!)으로 구현됩니다. 오르가니스트였던 그가 오케스트라를 오르간으로 만들어 낸 셈이지요(스토코프스키가 오르간 사운드라고도 평가되는 브루크너 교향곡을 녹음하지 않은 것은 큰 손실!). 그러면서 그는 음악의 세부에도 엄청난-낭만주의적이라고 할만한-생명력을 부여합니다. 그가 만들어낸 음악엔 무미건조함이나 맥빠짐, 냉랭함, 빈약함이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보통의 경우처럼 통일된 방향으로 일치하여 활긋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주자들이 자유로운 운궁(free bowing)을 하는 현악기군은 살집이 오르면서 신기(神技)에 가깝게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런 해석에 익숙해지다보면 다른 연주는 싱겁게 들릴 정도이지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스토코프스키를 존경하고 부러워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음악에 엄청난 생명력과 남다른 음향적 색채를 부여하는 능력이 있었던 거장 클라이버는 선대의 거장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스토코프스키의 편곡에 대하여는 말이 많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학구적이고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20세기 음악을 청중들에게 알리는 선구자였고, 그의 바흐 편곡은 불멸의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SP시대에서 아날로그 후기인 70년대까지 수많은 녹음을 남겼고, 4채널 녹음도 남겼으니 같은 세대의 다른 거장들에 비하여 복을 많이 누린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음향을 담아내려면 역시 SACD 멀티채널이 제 격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펜타톤에서 나온 차이코프스키 필립스 음반 외에는 그의 4채널 녹음은 아직 제대로 복원되지 않고 있습니다.
랩소디 음반은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에네스쿠의 루마니아 광시곡, 스메타나의 ‘몰다우’와 <팔려간 신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탄호이저>를 담고 있는 RCA 리빙 스테레오 SACD입니다. 기존의 디지탈 리마스터링과는 비교할 수 없는 DSD 리마스터링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초기 스테레오 시절에 어떻게 이런 음향을 담아낼 수 있을까 놀랄 정도로 뛰어난 녹음은 아날로그 사운드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현악기군 주자들의 수는 평소보다 배 이상 늘어난 것같고 풍요로운 음의 홍수 속에서 악곡이 가진 생명력은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특히 리스트와 에네스쿠에서는 과감한 셈여림과 색채 변화로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명연을 들려줍니다. '몰다우'는 뜻밖에 유려하게 흐르지 않지만 변화의 굽이를 잡아내는 실력은 역시 거장답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스토코프스키의 독특한 바그너야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전설적인 스토코프스키 사운드의 마법을 잘 담아내고 있는 멋진 음반으로 현대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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