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국악 SACD가 발매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SACD 제작시설이 없어 모두 일본 소니에서 만들어 왔습니다. 악당이반에서는 5종을 준비하였다고 하는데, 그 중 3장을 먼저 구하여 들어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원래 악당이반은 옛 한옥에서 순수녹음을 하여 CD 포맷으로도 최고수준의 음원을 만들던 회사인데, SACD라는 날개까지 달았으니 그 성과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터.
가야금과 아쟁의 농현이 이토록 다채로운 빛과 깊은 그림자를 머금고 있었는지 전에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간 우리가 듣고 있던 국악음반들이 무엇을 잃고 있었는지 옛 한옥에서 단 한 번에 녹음된 이들 SACD 음반을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국악에 대하여 뭐라고 평할 능력은 전혀 없으니, 그냥 인상만을 전달하여 봅니다.
최옥삼 류 가야금산조를 연주한 추정현의 음반(북은 윤호세. 음반 겉표지, 적어도 뒷부분에라도 고수를 기재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은 3장 중 유일하게 멀티 채널로도 녹음되었습니다. 녹음장소인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자리잡은 소쇄원의 벌레 울음이 들릴 뿐만 아니라 추정현의 긴박하게 당기고 조이는 세밀한 농현이 그려내는 마디마디 마다 고옥의 공기조차 흐르는 듯한 압도적인 연주와 녹음을 듣다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격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최옥삼이 자신의 제자 함동정월이 자신보다 낫다고 하였다는 것처럼, 함동정월의 제자인 추정현도 그 스승을 뛰어넘는다는 평을 받을 정도라고 하는데,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전승이 담긴 이 SACD는 하나의 역사이고 소우주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를 초월한 명반의 대열에 오를만큼 뛰어난 연주요, 녹음입니다.
최옥삼 류보다 길이가 긴 성금연 류 가야금산조를 맡은 지성자의 원숙하고 그윽한 연주(북은 최만)도 역시 압권입니다. 성금연의 제자이자 친딸답게 어머니의 산조를 깊고 섬세하게 구현해내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훌륭한 연주로 화제가 되었던 지애리의 음반도 패기있고 활달하지만, 지성자와 비교하면 다소 서둘렀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지성자가 72분을 넘는 반면, 지애리는 60분 정도 걸리고 있으니 두 연주의 성격을 금방 짐작하시겠지요? 가야금과 북(지애리 음반에서는 장고) 소리 자체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비교 자체가 의미없을 정도입니다.
스테레오 SACD의 진가가 제대로 발휘된 명반으로 경남 함양에 위치한 아름지기 함양한옥에서 녹음되었습니다.
서영호의 음반(장구는 윤진철)에는 그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서용석 류(정철호 제) 산조와 김일구 류(장월중선 제) 산조, 신뱃노래(대금은 정희완, 가야금은 송영란)까지 3곡이 1장에 담겨 있습니다. 뒤의 2곡은 끝난 뒤 몇 사람의 박수소리가 들리는데, 여운을 깨는 듯하니 넣지 않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두 산조 모두 박종선이 연주한 한일섭 류에 비하여 현저하게 짧은 편이고 특히 서용석류가 더 짧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루하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서영호는, 종래 다른 음반에서는 쟁쟁거리거나 빈약한 듯하게 들리던 아쟁이 섬세하지만 원래 선굵고 남성적 힘이 있는 소리도 지닌 악기임을 보여 줍니다.
3장 모두 강력하게 추천하지만, 특히 가야금 음반 2장은 반드시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국악 음반은 100장이 채 팔리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이런 여건에서는 음반이 나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일 터인데,* 높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연주와 녹음 모두 최고 수준인 SACD를 발매하여 주었으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악당이반(김영일 대표)의 열정과 희생에 깊은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그래서인지 국악음반에 대한 비판도 찾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송혜진이 지은 국악(음반)가이드북 <국악, 이렇게 들어보세요>(다른세상, 2002)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옥석이 전혀 없을 수는 없는 일. 국악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이 옥석을 가려주는 노력을 해주시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국악음반의 발전과 보편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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