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이반의 김영일 대표는 정말 놀라운 분이다. 적자를 감수하고 상당한 수의 국악 CD 음반을 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제작비가 훨씬 많이 드는 고품격 매체 SACD에 도전하더니, 2012년에는 한국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을 녹음하는 오뉴월뮤직(O' NEW WORLD MUSIC. 한글과 영어의 서로 다른 의미와 뉘앙스를 모두 살린 멋진 작명이다)을 출범시켰다. 그 첫 음반이 ‘손열음의 피아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앨범의 커버 디자인이나 수록된 레퍼토리, 연주와 음향의 수준, 품격에서 그 동안 나왔던 국내 클래식 음반들의 수준을 훌쩍 뛰어 넘는다.
우선 손열음이 선정한 레퍼토리와 수록 순서부터 범상치 않다. 파인베르크가 편곡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6번 ‘비창’의 스케르초 악장으로 시작하여, 서유럽 피아노 음악의 적자인 로베르트 슈만의 유머레스크, 작품 20, '라 폴리아'를 비롯한 스페인 민요에 기초하고 있는 프란츠 리스트의 스페인 랩소디를 거쳐, 재즈 이디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20세기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카푸스틴의 변주곡, 작품 41을 지나 역시 같은 20세기 러시아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의 연주회용 연습곡, 그것도 “차이코프스키 연습곡”으로 마지막을 장식함으로써 첫 곡과 순환하여 만나는 지적인 구성이 돋보인다.
손열음은 화려한 색채감이나 과시적 기교로 듣는 이의 혼을 빠지게 만드는 그런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곡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힘차고 대담하면서도 어느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연주를 들려주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이다. 물론 리스트처럼 직설적으로 화려한 피아니즘을 맛보고 싶은 곡에서는 손열음보다 그런 방향으로 더 잘하는 연주자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차이는 그야말로 아주 아주 적다. 손열음의 리스트 역시 충분히 뛰어난 연주이고, 음반에 실린 다른 곡들에서도 손색없이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특히 작곡가와 가장 잘 동화되는 듯한 카푸스틴의 연주는 이 음반의 백미이다. 바인베르크가 편곡한 차이코프스키 제6교향곡의 셋째 악장도 짜릿하다. 원곡에 익숙한 귀로는 생경한 듯하면서도 듣다 보면 음악이 서서히 스며드는듯한 고급스런 피아니즘이다.
연주자가 직접 쓴 내지 해설도 흥미롭다. 다만 북클릿 편집은 그 자체로는 잘 되었지만, 악당이반 이름으로 나오는 국악음반의 고품위한 북클릿에 비교하면 가독성이나 품격 면에서 조금 못 미치는 느낌도 든다.
올림푸스 홀에서 이루어진 녹음은 사실적이다. 잔향이 많지 않고 피아노의 직접음 위주로 녹음되었지만, 손열음의 유려한 피아니즘 덕분에 딱딱하거나 날카롭게 들리지 않고 음악적이고 자연스럽다. SACD 멀티채널로 듣는 피아노 음향은 마치 손열음이 눈 앞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생생하다. *
오뉴월뮤직의 첫 음반은 모든 면에서 아주 좋은 출발이다. 늦었지만, 진심으로 오뉴월뮤직의 성공을 기원한다. 악당이반의 국악 음반들을 이야기하면서 이미 하고 싶었던 말이지만, '손열음의 피아노'를 보며 다시 드는 생각이 있다. 만약 음반계에서 문화훈장을 받아야 할 단 한 사람을 골라야 한다면, 바로 김영일 대표여야 한다는 것.
* 이 음반은 하이브리드 SACD와 CD 두 가지로 출시되었다. 이러한 방식을 더블 인번토리, 하이브리드 SACD 하나로만 출시하는 방식을 싱글 인번토리라고 부른다. 더블 인번토리 방식을 택하면 시장이 양분되어 SACD 포맷이 충분히 판매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더블 인번토리 방식을 채택한 회사들은 현재 거의 SACD를 만들지 않고 있다. 지금 SACD를 출시하는 레이블들은 모두 싱글 인번토리 방식을 택하고 있다. 오뉴월뮤직은 수요자의 가격저항을 우려하여 더블 인번토리로 발매하였을 터이고, 두 음반매체 간 판매 실적이 어떨지는 알 수 없으나, SACD 버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과감히 싱글 인번토리로 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반이 몰락해가는 파일 재생 시대에 어차피 음반을 살 사람은 제한되어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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