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는 본질에 바로 파고 들어가는 능력을 가진 음악가이다. 그의 바흐 연주가 시공을 초월하여 각광을 받는 이유는 바흐 음악이 무엇보다 본질을 잘 드러내는 특성이 있기 때문일 것. 굴드의 1955년 골트베르크 변주곡 녹음은 문자 그대로 전설이 되었다. 반복을 일절 하지 않는 이 첫 녹음에는 굴드의 원숙해진 마지막 녹음이 갖지 못한, 톡톡 튀는 젊음의 생명력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오래된 모노 녹음임에도 최신 녹음보다 더 자주 듣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다.
소니의 글렌 굴드 에디션 음반과 낙소스의 음반을 비교하여 들어보니 놀랍게도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소니의 음반은 주변의 잡음을 제거하여 정숙하면서도 음이 놀랍도록 깨끗하여 안정감이 있다. 반면 낙소스의 음반은 노이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밝아 처음에는 거부감이 생길 수 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약동하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내 귀에는 낙소스의 복원(마크 오버-톤이 맡았다)이 더 자연스럽게 굴드의 의도를 전달해주는 것같이 들린다. 특이한 것은 트랙에 따라 두 음반 사이의 연주시간에 아주 미세한 차이가 나기도 한다는 것.
글렌 굴드의 동일한 녹음을 복원한 음반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차이가 느껴지니 제 아무리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였다고 하더라도 소프트웨어가 재생해내는 글렌 굴드가 오리지날과 똑같을 수는 없는 노릇. 그것이 2006년 9월에 녹음된 젠프 리-퍼포먼스(굴드의 1955년 녹음을 소프트웨어가 분석하여 그 정보대로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를 자동연주한 것)의 글렌 굴드 음반에 대한 최종 평가이다. 분명히 이 새로운 녹음에서는 1955년 녹음에 담긴 글렌 굴드의 영혼이나 기(氣), 아우라(aura)가 온전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굴드의 흥얼거림이나 인기척이 녹음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건반의 울림 자체도 어딘가 굴드 자신의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음반을 평가 절하할 필요는 없는 일. 글렌 굴드가 2006년에도 살아 있어 최신 녹음기술의 혜택을 받으며 1955년의 스타일로 유려하게(덜 신랄하게) 연주한다고 상상해보자. 어차피 영화를 보면서도 실사(實寫)가 아니라 CG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이 음반은 실현되지 못한 하나의 가능성을 가상현실처럼 재현하고 있고 그 한계를 알고 즐기면 충분하다.
스테레오 재생이나 SACD 멀티채널 재생에서는 그랜드 피아노가 무대 중심에 확고히 자리잡는다. 야마하의 독특한 음향이 유려하게 재현된다. 여기에 보너스 트랙이 있다. 궁극의 헤드폰 체험을 위한 바이노럴 스테레오 버전이 그것. 스택스의 4070 이어스피커와 SRM717을 에이프릴의 엑시무스 CD 10에 안티폰 티르 인터커넥터로 연결하여 들어보니 피아노 건반이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펼쳐져 들린다. 마치 내가 연주자가 되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것같다. 연주자의 손놀림이 눈 앞에 보이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한편 일반 스테레오 버전을 헤드폰으로 들으면 피아노가 무대 위의 하나의 음상으로 존재하고 청자는 객석에 앉아 있는 식으로 전혀 다른 형태의 음향재생이 이루어진다. 음악 재생에는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변수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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