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작곡가 헨릭 미콜라이 구레츠키(1933∼ .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o’ 부분에 강조가 붙으면 ‘오’가 아니라 ‘우’로 읽는다고 합니다)의 교향곡 제3번은 1992년 정도에 클래식 음반 베스트셀러로 유명세를 탄 일이 있습니다. 미국영화 ‘공포탈출’(Fearless)에 데이빗 진먼이 지휘하고 돈 업쇼가 노래한 논서치 음반이 사용된 덕분이었지요. 제목이 주는 통속적인 연상 이미지와는 달리 ‘공포탈출’은 괴기영화나 스릴러 영화가 아니라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고 후 겪는 심리적 고통을 다룬, 깊이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에 구레츠키 교향곡 제3번이 감동적으로 흘러나옵니다. 중세 기도문, 홀로코스트 수용소에 남겨진 희생자의 기도문, 홀로코스트 당시 수용소 벽에 남겨진 소녀의 기도문, 자식을 빼앗긴 어머니의 마음을 노래한 민요 등을 텍스트로 삼은 작품의 분위기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고뇌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처지와 본질적으로 통하였던 것이겠지요.
현악기와 소프라노, 합창이 어우러진 느린 세 개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애가(哀歌)에는 진먼과 돈 업쇼의 명반 외에도 좋은 녹음이 여러 종류 나와 있습니다. 최근에 듣게 된 네이브 레이블의 음반은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진먼과 돈 업쇼의 음반에서 받았던 감동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입니다.
진먼과 돈 업쇼의 호화군단에 비하면 우리에게는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연주자들인데도 왜 이런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일까? 무엇보다 음향이 압도적입니다. 이 음반은 DSD 방식으로 녹음된 멀티채널 SACD입니다. 멀티채널로 들어보면 현악기의 넓이와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리의 물결이 온몸을 휘어감는 듯합니다. CD로는 듣지 못하였던 어마어마한 음의 파장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우라 즉 기(氣)를 뿜어내는 느낌입니다. 연주 자체가 진먼과 돈 업쇼의 논서치 음반을 뛰어넘는 수준인지 아닌지 따지기 앞서서 이처럼 놀라운 음향의 장(場)을 체험하다보면 역시 음악은 소리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다른 무엇보다 소리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물론 이처럼 놀라운 음향이 단순히 포맷 덕분에만 실현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독창자가 해석해낸 음악의 정수가 제대로 된 그릇인 SACD를 만나 빛을 발한 것이라고 보는게 정확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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