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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의 볼레로

SACD

by 최용성 2008. 11. 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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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라벨(Ravel) <볼레로>(Bolero)나 비제의 <카르멘> 모음곡 제1번과 제2번은 너무나 유명한 곡이다. 그만큼 불세출의 명연들이 자웅을 겨루고 있으니 오디오파일 레이블로 유명한 텔락과 쿤젤(Erich Kunzel)이 지휘하는 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 정도의 이름에 크게 기대를 걸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쿤젤과 신시내티 팝스, 텔락의 엔지니어들은 이런 선입견을 일거에 깨트린다. 여기 실린 <볼레로> <카르멘>은 그냥 잘된 연주가 아니라, 아주 뛰어나고 개성 있으며 매력 만점인 연주이다. 심지어 기존의 명연주들에 비교하여 보아도 그렇다. 특히 라벨의 <볼레로>는 빠른 템포와 관악기의 독특한 운용, 점증적인 크레셴도로 곡에 담긴 관능미와 리듬감, 클라이막스로 질주하는 박진감을 절묘하게 그려낸 명연이다. 13분대에 완주하는 빠른 템포에도 불구하고 앙상블은 정교하고 음악적 표현도 흔들림 없이 안정감이 있다.

 

    텔락 레이블에는 신시내티 팝스의 본래 이름인 신시내티 심포니가 연주한 <볼레로> 음반 두 종류가 이미 나와 있다. 1988년 녹음된 헤수스 로페즈-코보스와, 2006년도 녹음인 파보 예르비의 음반들이 그것. 전자는 15분대, 후자는 13분대의 빠르기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접근 방식이 전혀 다르다. 로페즈-코보스는 스타카토 아티큘레이션을 강조하여 구절 마디마디에 독특한 굴곡을 만들어내지만, 종종 음악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저해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반면, 예르비는 빠른 템포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고 안정적이며 기교적으로 더 뛰어난 연주를 들려준다. 게다가 SACD 포맷에 담긴 음향의 아름다움은 로페즈-코보스의 것을 훌쩍 뛰어넘는다.

 

    예르비보다 불과 몇 초 정도만 더 빠르지만 쿤젤이 지휘한 <볼레로>는 한결 더 여유만만하면서도 상상을 뛰어넘는 과감한 표현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관악기가 주된 역할을 하는 이 곡에서 독주자들에게 적당한 비틀기 혹은 미끄러지기(글리산도)로 마디마디 독특한 강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잘못 사용하면 음악의 균형을 깰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접근방법일 수도 있지만, 관능적인 감성을 깔고 동형선율이 무한 반복되는 이 곡에서 그 효과는 정말 매력만점이다. 재즈를 듣는 듯한 느낌도 든다. 같은 공간에서 녹음된 예르비의 음반보다 음량이 조금 더 낮게 잡혀 있지만 곡의 강약법 대비에는 이쪽이 더 효과적인 듯하다.

 

    보로딘의 곡들을 모아 꾸민 뮤지컬 <키스멧>(Kismet) 모음곡은 쿤젤의 음반다운 선곡이다. 이 곡 저 곡에서 발췌하여 오면서 원곡에는 별로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은데도 보로딘의 풍부하고 이국적인 선율이 중세 바그다드를 배경으로 삼은 뮤지컬과 기묘하게 잘 들어맞는다. 조금 과장하자면 보로딘이 브로드웨이 무지컬 작곡가라고 하더라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곡에서 쿤젤의 장점이 발휘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 뮤지컬 버전 그대로 합창과 독창까지 들어 있었으면 금상첨화였을 거라는 욕심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아랍풍(?) 선율과 극적인 감성에 빠져 들어가게 하는 연주이다.

 

    비제의 <카르멘> 모음곡에서는 안정된 템포를 바탕에 깔고 정교하게 세부를 다듬으면서도 필요할 때마다 역동적인 리듬과 정열적 에너지를 잘 살려내고 있다. 특히 전성기의 카라얀을 듣는 것처럼 강약법을 섬세하게 대비시켜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상적이다. 물론 이보다 더 색채감이 강하거나, 더 생생하거나, 혹은 스페인 색이 더 짙거나 한 <카르멘> 연주를 얼마든지 거론할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완성도 면에서 쿤젤의 신보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곡은 알베니즈의 피아노 음악 <이베리아> 중 유명한 “Fete-Dieu A Seville”를 엔리크 페르난데즈 아르보스가 오케스트레이션한 작품이다. 오히려 이쪽이 원곡같이 느껴질 정도로 관현악 효과가 두드러진다. 이 곡에서도 역시 쿤젤과 신시내티 군단은 정상급의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기량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난곡들을 담은 신보이지만, 결과는 아주 빼어나다. 사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신시내티 군단은 전설적 거장 스토코프스키를 상임으로 거쳤고, 쿤젤 아래에서 팝스 오케스트라의 정상을 차지하였으며, 이제는 걸출한 지휘자 파보 예르비와 만나 당당히 미국의 빅 파이브로 거론되는 최고수준의 연주력을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텔락의 SACD 녹음은 멀티 채널에서 뒤쪽 채널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오케스트라의 음장을 멀리서 조망하여 전체를 그려내면서 그 안에 디테일을 드러나게 하는 CD 시절부터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 있다. 물론 취향이 갈릴 수 있는 대목은, 시스템에 따른 차이는 있겠지만, 신시내티 팝스의 음조, 특히 중역대가 다소 엷거나 가볍게, 혹은 조금 덜 풍성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 이것이 녹음, 신시내티 홀의 특성, 악단의 성격 중 어느 것 때문인지 그들의 실연을 접해본 일이 없어 확실히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다만 신시내티 군단이 예르비의 지휘봉 아래에서는 조금 더 무게감이 있고 쿤젤의 지휘봉 아래에서는 조금 더 가벼워지는 것도 사실이니 지휘자의 개성 때문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 되었든 이 음반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해석과 탁월한 연주를 들려주는데다가 전 주파수 대역을 제대로 담아낸 듯한 DSD 녹음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으니 추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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