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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클로시 로자(Miklós Rózsa) : 바그다드의 도둑(The Thief of Bagdad)

Miklós Rózsa

by 최용성 2007. 6. 29.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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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한 LP

    1970년대말부터 지금까지 LP를 듣고 있으니 아날로그와는 인연이 긴 편이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아날로그 애호가인 적이 없었다. 스크래치, 먼지, 정전기, 안쪽으로 갈수록 더 심해지는 찌그러짐. 큰 앨범 재킷이 주는 포만감을 제외하면 LP에 대한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1991년부터 CD를 모으면서 LP는 구석으로 밀려났다. 현악기의 유려함 외에는 LP 소리에서 큰 매력을 느껴본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 좋은 경험을 했다. 클리어 오디오의 마스터 레퍼런스를 들어본 것. 최고급 CD소리를 가볍게 뛰어넘고 있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영향으로 토렌스 520에 클리어 오디오의 최고급 클램프를 재미삼아 사용해보았다. 과장하자면, 화룡점정의 의미를 알았다고나 할까. 소리의 중심이 제대로 잡히고 음장의 윤곽이나 악기음이 정확해진다. 클램프를 쓰지 않는 경우보다 고역이 살짝 가라앉지만 내게는 이것이 더 설득력있는 음악소리로 들린다. LP의 매력을 이제서야 제대로 느낀다. 게다가 PCM 녹음흔히 거론되듯이 디지털이 아니다의 해악을 이야기하는 과학적주장도 들려오니 LP가 새삼 나를 유혹하는 듯하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아날로그에 빠져들 생각은 없다. DSD 방식으로 녹음된 슈퍼 오디오 CD야말로 아날로그와 디지탈의 행복한 결합을 만들어낼 것같다는 기대 덕분. 소리가 공기 중에 자연스럽게 뿌려지며 유려한 실연의 물결 속에 잠기는 듯한 느낌을 주는 SACD. 그 진가는 특히 긴 시간 동안 감상할 때 잘 드러난다. 아직 미래가 불확실한 매체이기는 하지만, 이미 발매된 타이틀이 3,500종을 넘었고 가격도 CD와 비슷해져 도전해볼만 하다.

                        

<바그다드의 도둑>을 작곡하던 1939년 당시의 미클로스 로자(Miklos Rozsa)

 

    그래도 내가 LP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디지탈 포맷으로는 발매되지 않은 몇 가지 음반들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클로스 로자(Miklos Rozsa. 19071995)<바그다드의 도둑>이다. 이 음반을 구하면서 애호가의 절박성에 따라 고무줄처럼 요동치는 아날로그 음반 시장의 비정함도 우연히 알게 되어 LP 컬렉션을 더 줄이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해두자.

 

오리지널 앨범은 기존 레이블이 아니라 엘머 번스타인 필름 컬렉션 레이블로 발매되었다.

 

엘머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바그다드의 도둑>

    잘 알려져 있듯이 1970년대에 들어와 황금기 교향악 영화음악의 재녹음 붐이 일어나는데, 개인 재산을 투자하면서까지 이런 흐름에 뛰어든 용감한 사람이 있었다. <황야의 7>, <알라바마 이야기(앵무새 죽이기)>, <십계>,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 <대탈주> 등을 작곡한 대작곡가 엘머 번스타인(Elmer Bernstein, 19222004)이 바로 그 사람. 그는 엘머 번스타인 필름뮤직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런던에서 로열 필하모닉 등을 지휘하여 로자, 허만, 왁스먼, 스타이너 등의 고전 영화음악을 새롭게 녹음하였다. 그 시리즈로 발매된 음반 중의 하나가 1977년 런던에서 녹음된 로자의 <바그다드의 도둑>이다. 처음에는 필름뮤직 컬렉션 레이블로, 나중에는 워너 레이블로 나왔다.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로열 필하모닉은 밝고 화려한 음향을 들려준다. 녹음도 그런 오케스트라의 특징을 잘 잡아냈다. 잘 재생하면 금관악기의 숫자를 셀 수 있을 정도로―제발, 진짜로 세지는 마시기를!―해상력도 좋다. 다만 전문적인 오디오파일 녹음이라기보다는 고역이 다소 강조되고 직접음을 명료하게 부각시키면서도 적절한 홀톤을 첨가하는 1970년대식 멀티 마이킹 녹음의 계보에 속할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엘머 번스타인이 뛰어난 작곡가이기는 하지만 레너드 번스타인은 아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듣자면 연주나 해석에서 한 두 가지 흠을 찾을 수는 있을 것. 그러나 이렇게 귀하고 즐거운 음악을 들려주는 음반을 재생하면서, 피곤하게 그런 것을 따질 필요야 있겠는가. 그냥 이 정도로도 참 좋은 연주이다.   

                           

메이저 음반사인 워너 뮤직에서 재발매한 음반. Warner Bros.BSK3183

 

기회를 잡아라

    <바그다드의 도둑>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를 이리 저리 짜깁기한 판타지 영화이다. 1938년 영국에서 시작되어 전쟁 때문에 헐리웃으로 옮겨져 1940년에 완성되었다. 최초로 위촉된 작곡가는 당대 비엔나 오페레타의 거장 오스카 슈트라우스였다. 그러나 감독인 루트비히 베르거(Ludwig Werger)는 초조해졌다. 슈트라우스가 보내온 음악은 아무리 들어도 비엔나 나이트였지 아라비안 나이트는 아니었기 때문. 위기상황임을 간파한 제작자 알렉산더 코르다(Alexander Korda)가 미클로스 로자를 추천했으나 베르거는 신의를 지키기 위하여 거절했다. 코르다는 로자에게 영화의 음악을 작곡하여 베르거의 옆 방에 가서 매일 피아노로 연주하라고 지시하였다. 어느날 베르거는 로자를 찾아와 무슨 음악인지 물었고, 다음날 비엔나에 있던 슈트라우스에게 거리가 멀어 함께 작업할 수 없어 미안하다는 전보를 보냈다. 로자의 표현을 빌자면 슈트라우스는 결코 베르거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 여하튼 다른 사람의 실패가 누군가에겐 기회가 되는 냉혹한 세상살이 법칙(?)에 따라 이렇게 로자에게 기회가 왔고,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로자가 만들어낸 풍부한 선율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매사에 적극적이면 이처럼 멋진 여주인공과 다정하게 사진을 촬영할 기회도 온다.

 

소년이 되게 하는 마법의 음악: 음악 속에서 모험하기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와 비교하면 로자가 그리고 있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계는 훨씬 더 밝고 젊고 건강하며 환상적이다. 대책없는 낙관과 생기, 청춘, 마법이 느껴진다. 진정코 이것은 젊은 작곡가만이 쓸 수 있는 음악이다. 크리스토퍼 파머(Christopher Palmer)의 표현처럼 이 음악은 본질적으로 청춘의 마법이기 때문”.   첫 곡을 들어보자. 씩씩한 금관의 팡파르가 울려퍼진 뒤 같은 프레이즈 구조로 서정적 합창곡이 울려 퍼진다. 왕자의 지도자다운 모습과 사랑에 빠진 모습을 대칭시킨 표현이다. 이처럼 로자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언제나 지적이다. 바그다드 항구의 시끌벅적대는 풍경이 찬란하게 묘사되고 나면, 바리톤 브루스 옥스턴이 나는 왜 남자들이 바다에서 돌아오려는지 모르겠어라며 오페레타 풍의 아리아를 멋지게 부른다. 노래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로자의 영화음악 세계에서는 아주 이색적인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노래가 두 곡이나 더 있으니 이만한 보너스가 따로 없다. 하나는 감옥 안에서 아부가 부르는 노래 뱃사람이 되고파이다(음반에서는 바리톤이 부른 첫 곡의 노래로 표기되어 있으나, 가사를 들어봐도 착오로 인한 표기임이 분명하다).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을만큼 친화력이 높은 이 경쾌한 뮤지컬 풍의 노래를 파웰 존스가 낙천적인 톤으로 유머러스하게 잘 불렀다. 남은 하나는 정통 오페라의 아리아에 가까운 사랑의 노래이다. 메조 소프라노 필리스 캐넌이 원숙하게 잘 부르고 있다. 이 노래는 관현악 버전으로는 영원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경쾌하고 신바람 나는 술탄의 장난감과 날아다니는 말의 갤롭’, 호리병에서 나온 마신을 그린 호방하고 시원시원한 음악, 신비롭고 아름다운 여성합창곡 황금 텐트’, 목관악기의 색채감이 돋보이는 해변 음악,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푸른 장미’, 괴물거미를 묘사한 음악 등등 다양하고 멋진 악상이 쉼없이 펼쳐진다

 

    피날레의 음악은 말 그대로 대단원이다. 옛날 영화의 조악한 비주얼을 뛰어넘어 음악이 만들어내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 마치 아부가 마법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지는 느낌. 듣는 사람의 모든 감각을 열어 고양하게 하는 로자의 개성적인 음악 속에서 나도 마법 양탄자를 타고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이 아름답고 호쾌한 음악 속에서 나는 소년이 된다!

 

@ Miklos Rozsa : Miklos'니콜라스'의 헝가리식 표기법이고, Rozsa'장미'라는 뜻이다. 두 개의 'o'에 액센트를 표기한다(블로그에서는 인코딩을 새로 맞추지 않으면 ?로 표기되기 때문에 생략). 로자는 평생 동안 이 액센트를 떼지 않았으니 그가 미국에서 살았다고 하여도 영어식이 아니라 헝가리 식으로 읽어야 할 것같다.

헝가리어 발음으로는 미클로쉬나 미클로시, 로자 또는 로쟈(바르톡의 오페라 <푸른 수염의 성>이나 헝가리 민요를 들어 봐도 분명히 '로자' 또는 '로쟈'라고 발음하는 것으로 들린다. 아니면, a에 액센트가 없으니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벨러 버르토크'처럼 로저로 읽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영미인들은 '미클로슈 로샤' 또는 "로셔"라고 많이 발음하는데, 리스트의 이름에 쓰이는 'sz'의 발음과 혼동한 결과인 듯하다. 본문에서 '미클로스 로자'라는 표기를 사용한 것은 오랫동안 한국 영화음악 애호가들 사이에 '미클로스' 또는 '미크로스'로 알려져서 생겨난 친숙함을 일단 존중하기로 한 결과이다. 조만간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생각인데, 실제 헝가리어 발음에 가장 가까운 미클로쉬 로자나 미클로시 로자가 유력한 후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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