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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Miklós Rózsa) : 현악협주곡, 작품 17

Miklós Rózsa

by 최용성 2007. 8. 3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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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에 작곡된 미클로시 로자의 현악협주곡은 밀도(密度) 높은 구성력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크리스토퍼 파머(Christopher Palmer)의 표현처럼  모든 음표에 헝가리의 고통이 스며 있는곡이다. 2차 세계대전의 전화(戰禍)로 처참해진 고국 헝가리를 생각하며 작곡되었기 때문에 어둡고 비극적이다. 이 작품은, 뜻밖에도(?), 작곡가의 부인인 마거릿 로자에게 헌정되었다. 작곡가가 이 작품에 대하여 갖고 있던 애정과 자신감이 반영된 결과일 것

 

    소나타 형식인 첫째 악장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의 도입부를 연상시키는 힘차고 비극적인 주제로 시작되는데 음표들 사이에 고통스러운 대화가 이어지는 것 같다. 2주제는 서정적이지만 우울하고 어둡다. 발전부에 들어서면 시대의 광기와 절규를 나타내듯 현이 힘차게 움직인다. 둘째 악장은 독주악기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지는 서정적인 비가(悲歌)이다. 어둡고 침울한 가운데 희망이 노래된다. 셋째 악장은 활동적이고 분주한 리듬의 춤곡으로 소나타 형식에 가깝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첫째 악장의 제1주제가 셋째 악장의 제2주제와 마주쳐 대위법으로 전개되다가 호모포니로 마무리되는 부분이다. 물론 전통적으로 볼 수 있는 기법이지만, 로자가 아니라면 우리 시대에 그 누가 이처럼 대담하게 생경한 선율을 대위시킬 수 있을까

 

    이 음악의 정교한 텍스추어, 비극적 선율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독특한 리듬의 운용을 조화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곡 전체가 실내악 같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고 있고, 특히 둘째 악장에서는 개개 독주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연주력이 필요하다. 내용은 격정적이지만, 전통적 형식에 강하게 뿌리박고 있어 단순히 선율선만 따라 해석하거나 현악주자들의 기량이 떨어질 경우 곡 전체가 산만해지거나 진부하게 들릴 위험이 매우 크다. 연주자들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곡인 셈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연주라면, 그야말로 감동을 주는 명곡 중의 명곡이 된다.

 

미클로시 로자의 가명이라고 의심받는로자가 1977년 토론토에서 이를 인정하였다는 주장도 있다에리히 클로스(Erich Kloss)가 지휘한 프란켄란트 심포니(뉘른베르크 심포니의 前身)DRG 모노 음반(CDSBL 13101 Classic Miklos Rozsa)은 오래된 녹음인데다가 현의 울림이 거칠고 투박하여 세부가 잘 살아나지 않는다. 악단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 소릿결의 아름다움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야성적인 힘과 긴박하게 긴장감을 조성해내는 해석은 적지 않은 장점이다

 

로자가 직접 지휘한 스테레오 LP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레이블에서 나온 음반으로 유명한 비엔나 국립가극장 오케스트라의 품격있고 균형잡힌 좋은 연주를 들을 수 있지만, 아쉽게도 아직 CD로는 나와 있지 않다.

 

    아이제이어 잭슨(Isaiah Jackson)이 지휘한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KOCH 3-7152-2)는 독일악단답게 현악의 소릿결이 깊고 풍성하고 박력이 있지만, 곡의 구조적 형식미나 역동적 긴장감을 온전히 부각시키지는 못한 것같다. 다이나믹이나 템포, 아티큘레이션, 프레이징에서 밀고 당기는 로자 음악 특유의 미학을 세세하게 살려내지는 못하고 있어 단조롭게 들리는 대목이 적지 않다. 세부 묘사에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제1악장의 발전부에서 질주하는 대목들은 약간 굼뜬 것같고, 3악장의 찬란해야 할 대위법 전개는 다소 혼란스럽다그러나 로자의 현악사중주 제1번의 제1악장을 현악오케스트라 용으로 개작한 현악을 위한 안단테, 프란츠 왁스먼의 무용음악 같은 멋진 신포니에타, 뒷날 <사이코>를 예고하는 듯한 버너드 허만의 신포니에타라는 강력한 커플링 곡들이 있어 놓칠 수는 없는 음반이다.

 

 

    이에 반하여 제임스 세더리스(James Sedares)가 지휘하는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KOCH 3-7379-2)는 곡의 형식과 내용을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하면서 음악의 핵심에 파고들어간 명연이다. 각 성부의 균형을 절도있게 잡아 구조를 명료하게 보여주면서도 질주하는 속도감을 구현해내고 있다. 특히 셋째 악장의 연주가 뛰어나다. 큰 틀에서 곡을 진행시키는 세더리스로서는 이례적으로 세부를 정교하게 조탁하고 있는데, 아마도 같은 레이블에서 이미 발매된 잭슨 지휘의 음반과의 경쟁을 의식하였기 때문일 듯(물론 추측이다). 이 연주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뉴질랜드의 현악주자들이 다소 감정을 절제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녹음도 다소 둔탁하게 들린다.

 

 

◉ 로자, 현악협주곡 작품32; 바르톡, 디베르티멘토, 루마니아 민속춤곡,&nbsp;비르투오지 디 쿠흐모/ Peter&nbsp;Csaba(지휘),&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시간 59:52, 1998년 녹음/ 발매 (Rozsa,&nbsp;Concerto For String Orchestra ;&nbsp;Bartok,&nbsp;Divertimento ; Romanian Folk Dances,&nbsp;ONDINE ODE 919-2)

 

    그럼 핀란드에서 온 이 연주는? 가장 훌륭하다. 특히 현악주자들의 기량이 놀랄만큼 뛰어나서 음악이 술술 풀려나온다. 비르투오조 드 쿠흐모는 표정의 변화가 풍부하고 리듬을 아주 유연하게 타면서 실내악적 정교함을 잘 살려낸다. 게다가 지휘자 Csaba는 격렬하게 질주할 때(트랙 10 1악장의 3:33부터의 질주는 최고수준이다)와 유연하게 이완되어야 할 순간을 정확히 알고 있다. 감정의 과다가 없으면서도 감정의 극단을 오가며 로자 음악의 낭만성을 잘 살려낸다. 동시에 텍스트를 명료하게 밝혀주어 로자 음악의 신고전주의적 특징을 포착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실내악적인 집중력을 보이면서도 스케일이 크고, 소릿결이 풍부하며 아름다운 연주이다. 모든 음표의 진행은 극도로 자연스럽다. 비르투오지 디 쿠흐모의 합주력은 세계최고 수준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앙상블을 듣고 있노라면 베를린 필이나 빈 필의 현악주자들이라고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특히 청정한 북구의 하늘과 호수를 연상케 하는 맑디 맑은 현악기의 음색은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둘째 악장에서 독주자들이 발휘하는 연주 실력도 최상급이다. 녹음은 아주 선명하고 신선하다. 모든 점에서 만족할만한 명연주이고 최고의 녹음이다.

 

    함께 수록된 바르토크(Bela Bartock) 음악의 연주도 놀랄만한 성과이다. 루마니안 민속춤곡의 첫 곡은 KBS 1FM의 애청자들에게는 친숙한 곡인데 아주 맛깔스럽게 연주하고 있다. 로자의 현악협주곡과 비슷한 양식인 디베르티멘토을 들어보면 같은 헝가리 민요라는 소재를 가지고 두 작곡가가 어떻게 다르게 접근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바르톡이 내면은 물론이고 외면으로도 혁신적이라면, 로자는 전통을 존중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독창적 내용으로 창조해간다. 바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같은 말과 들어맞을 로자의 방법은 연속성 속에 일어나는 창조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음악사적으로는 로자가 바르톡 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겠지만, 로자는 로자로서 위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을 것. 놓쳐서는 안될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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