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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셜록 홈즈

셜록 홈즈 읽기

by 최용성 2007. 7. 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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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셜록 홈즈인가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셔얼록 호움즈가 전통적 영국 영어 발음에 가장 가까운 표기이지만, 요즘 관례에 따른다) 시리즈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영국 런던을 무대로 한 이야기이다. 당연히 서양문명의 중심지이자 제국주의의 심장부였던 대영제국의 영화(榮華)와 서구적 근대화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이 작품의 정신적 배경처럼 여기저기 깔려 있다. 홈즈와 왓슨(일본식 표기라고 구박받는 와트슨이라는 표기가 반드시 잘못된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있지만, 역시 요즘 관례에 따른다)은 합리주의와 계몽사상의 영향 아래에 있던 진보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의 추구자이지만, 그들에게도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의 흔적은 원죄(原罪)와 같이 따라 다닌다. 게다가 도일이 만들어낸 참신한 범죄수법이나 추리법들도 당시에는 추리소설의 원형을 확립할 정도로 획기적인 것들이었지만, 과학적 수사기법이 극도로 발달된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고색창연하다. 그런데도 이런 구식 이야기가 100여 년이 넘게 세상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고의 셜록 홈즈 배우로 평가받는 제레미 브랫과 제2대 왓슨 역의 에드워드 하드윅

 

결핍투성이의 근대인, 그러나 근대를 넘어  

   무엇보다 살아있는 존재같은 홈즈와 왓슨의 매력이 으뜸일 것. 셜록 홈즈는 변장술이나 관찰과 추리에는 천재이지만 알고 보면 인격적 결함투성이이다. 즉 아주 현실적인 캐릭터이다. 그는 자기중심적이고 허영기가 많으며 편협된 지식을 가졌다. 여성 혐오증에 걸린 독신주의자이고, 코카인-담배-일 중독에 빠진 편벽적인 천재. 명탐정이라지만 사건해결에 실패하거나 무력감을 드러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르블랑이 창조한 아르센 뤼팽이 모든 역경을 뛰어넘어 초인적이고 낭만적인 영웅으로 묘사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또 후대의 탐정들이 겉으로는 사실주의적인 평범함을 내세우면서도 실은 아무리 어려운 사건도 절묘하게 해결해나가는 식의 겉다르고 속다른 식의 캐릭터 설정과도 확연히 다르다.  일상을 벗어난 모험의 세계에서는 우리를 압도하는 우월적 존재같으면서도 결국은 불완전하고 결핍 투성이인 속내가 별반 우리와 다르지 않은 홈즈에게서 사람들은 근대인의 독특한 전형을 보고 동화(同化)되었을 것.

 

    그런데 셜록 홈즈가 단순한 근대인에 그쳤다면 그의 매력이 시대를 넘어 그리 오래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은 자신의 존재근거인 근대를 넘어서는 열린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데 홈즈의 진정한 매력이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홈즈 시리즈는 근대 과학주의와 더불어 법치주의가 자리잡아 가는 영국을 무대로 하고 있다. 과학과, 실정법에 대한 신앙 즉 법철학에서 법실증주의라고 부르는 사조가 자리잡는 시기이다. 더욱이 영국은 두 분야에서 으뜸가는 선진국이었다. 그럼에도 홈즈의 사건 해결 방식은 실정법만을 따르지 않는다. 범죄자를 용서해주기도 하고, 악인을 응징하기 위하여 주거 침입이나 도둑질도 서슴치 않는다. 왓슨이 “법의 수호자”라고 불렀던 홈즈는 좁은 테두리의 실정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실정법을 넘어서는 진정한 법, 즉 실질적 정의의 수호자였던 것. 체제나 실정법에만 연연하는 좁은 의식에 갇혀 있지 않았던 셜록 홈즈의 법철학은 시대를 초월하는 매력을 발산한다. 나찌가 법실증주의를 악용한 역사적 경험에 비춰 보자면 진정 셜록 홈즈는 법실증주의로 대변되던 근대를 뛰어 넘어선 존재였던 것.

 

    한편 홈즈와 전혀 다른 성격인 존 H. 왓슨이 그 대척점에 서 있다. 온후하면서도 신의가 있으며 늘 한결같은 왓슨 박사는 영국 신사의 전형과 같은 인물로 홈즈의 인격적 결핍을 채워가는 이상적인 동반자이다. 동시에 왓슨은 그의 정직한 세계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였을 일상에서의 일탈을 홈즈의 세계를 통하여 실현해간다. 이처럼 홈즈와 왓슨은 서로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이다. 셜록 홈즈의 불완전하고 독특한 자아와 왓슨의 건전하고 우직한 상식이 서로 어우러져 난해한 사건을 변증법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생동감과 친밀성은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인간관계가 아닐까. 

 

    이 두 사람 모두 영국신사이다보니-실은 도일의 문장력이나 이야기 구성방식에서 유래된 것이겠지만-홈즈 이야기 전반에는 도도하게 흐르는 품격 같은 게 있다. 그것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홈즈 이야기를 편하게 읽을 수 있게 하는 덕목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셜록 홈즈 속에서 상상하기 

    홈즈 이야기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샘과 같다. 4편의 장편과 56편의 단편이 놀라운 트릭을 사용한 뛰어난 추리소설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등장인물들, 배경이 된 지역과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다채롭기 때문.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 여기서도 호소력을 지닌다. 단편 중 어떤 작품들은 수수께끼 풀이보다는 인생의 의미를 물어온다. 예를 들어 다섯번 째 단편집인 <셜록 홈즈의 사건집>에 나오는 <복면한 여하숙인>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고통스런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는 일반 단편소설같게 느껴질 정도이다.

 

빌리 와일더의 영화 <셜록 홈즈의 사생활>(1970. EBS 방영제목은 '셜록 홈즈의 미공개 파일'). 원래 4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상업성을 고려하겠다는 제작자의 정신나간 오판으로 말미암아 절반 이상이 잘려져 나갔다. 그 결과 작품성과 흥행성 양면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처럼 감독판을 따로 만들던 시절이 아니니 복원된 오리지널 버전을 볼 확률이 거의 없어 아쉽다. 와일더는 평소 즐겨 듣던 로자(Miklos Rozsa)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염두에 두고 각본을 작성하였는데, 영화와 상관없이 작곡된 이 낭만적 협주곡의 아름다운 선율이 홈즈의 에고와 사랑의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어 영화와 딱 들어맞는 절묘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너무 오랜 기간을 두고 쓰여져서 그런지 시리즈 전체에 설명되지 않는 모순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오히려 셜로키언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의 원천이 된다. 숙적 모리아티와의 관계에서 홈즈의 유년기 심리적 외상(外傷)을 추적해가다 보면 동 시대 유럽인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를 만나게 된다. 홈즈가 범죄학 연구에 몰두하던 시절은 맑스가 런던에 머물며 불멸의 고전 <자본>을 쓰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던 시기와 겹친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와 치열하게 마주하는 두 인물을 떠올려보라. 모리아티는 실은 홈즈의 은사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모리아티는 홈즈가 조작한 인물이거나 홈즈의 또 다른 인격일지도 모른다. 홈즈가 모리아티의 잔당으로부터 도피생활을 하던 중 운명의 여인 아일린 애들러를 만나 사랑을 나누지는 않았을까. 홈즈의 아들도 있지 않았을까. 홈즈에게 첫 애인이 있지 않았을까. 동시대에 실존하였던 런던의 연쇄 살인마 난도질 잭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는데, 실은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였으나 어쩔수 없는 사정으로 영원한 비밀로 남겨둔 것은 아닐까(<셜록 홈즈의 눈물>에서처럼). 상상력이 더 확장되면 홈즈가 런던에 나온 드라큘라와 싸운다거나, 웰즈의 작품에 나타나는 화성인 침공과 대면하거나, 타임머신을 이용하는 장면에까지 이른다. 모두 홈즈와 같은 시대의 설정인 데다가 풍부한 문화사 지식을 배경으로 깔아야만 하는 고급 파스티슈(pastiche)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한 발상들이 구체적인 새로운 창작물이 되거나 고급스러운 이야기거리가 되어 셜록 홈즈를 늘 새롭게 읽거나 향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점에서 문화적 아이콘으로서 홈즈 이야기가 갖는 놀라운 잠재력에 주목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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