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살인이나 흑마술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을 많이 남긴 존 딕슨 카는 셜록 홈즈와 다르타냥을 숭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편향’은 자신이 선정한 세계추리소설 베스트 10 목록에도 그대로 드러나지요. 과연 카는 가장 훌륭한 추리소설(셜록 홈즈 시리즈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1위로 어떤 작품을 꼽았을까요? 놀랍게도, 아서 코난 도일 경의 <공포의 계곡>입니다. 물론 홈즈 시리즈의 마지막 장편인 <공포의 계곡>은, 추리물인 1부, 과거를 회상하는 일종의 스릴러물인 2부로 나누어진 장황한 구성이라는 약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1부와 2부 모두 결말의 반전이나 트릭이 잘 설정되어 있고, 또 모리아티 교수가 존재감을 드러낸 흥미진진한 걸작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딕슨 카 세대에는 이보다 더 짜임새 있고, 더 기발하며, 더 인간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고, 더 흥미진진한 걸작 추리물이 꽤 많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니 셜록 홈즈에 대한 딕슨 카의 애정어린 ‘편견’이 <공포의 계곡>을 1위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겁니다.
존 딕슨 카의 애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 평전을 쓰고, 심지어 아서 경의 아들인 애드리언 코난과 함께 새로운 셜록 홈즈 단편집인 <셜록 홈즈의 공헌>을 내기에 이릅니다. 12편 중 앞의 6편만을 카와 애드리언이 공동저작하고, 나머지 6편은 애드리언이 혼자 지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앞의 6편에서는 ‘불가능 범죄’ 혹은 ‘밀실 트릭’을 주된 특기로 삼았던 존 딕슨 카의 역량이 녹아 들어 있어 추리물의 재미가 있는 편이고, 뒤의 6편은 추리물답지 않은 후기 정전의 홈즈 이야기와 조금 더 닮은 듯한 느낌입니다. 개개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알다시피 홈즈 이야기에는 이런 저런 미공개 사건들이 상당수 언급되어 있고, 그것이 발표된 바가 없었기에(‘제2의 오점’은 두 번이나 언급된 덕분에 작품화될 수 있었지요) 끊임없이 홈즈 애호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왔습니다. <공헌>에 실린 작품들은 그처럼 한 두 줄 언급된 사건을 소재로 한 것입니다. 결과는? 홈즈와 왓슨의 개성이 오히려 정전보다 더 잘 나타나고, 일부 작품들의 트릭은 셜록 홈즈 이야기의 전통에 충실하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어쩌면 아서 경보다 더 많이 홈즈를 사랑하고 연구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작품들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존 딕슨 카처럼 걸출한 작가가 참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전의 최고걸작단편집인 <모험>에서 보이던 놀랄만큼 기발한 아이디어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추리물의 거장인 카가 참여하였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충분한 데이터를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추리소설의 기본이라 할 페어 플레이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지요. 게다가 아서 경의 정전에 비교하면 홈즈의 일방통행이 더 강조되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분명히 정전의 홈즈와 왓슨 같기는 한데, 정전에서 볼 수 있는―어쩌면 아서 경의 무성의에서 비롯된 모순들이 서로 섞이면서 만들어냈을지도 모를―깊은 울림을 전해 주지는 못합니다. 조금 호흡이 길게 미스테리를 만들어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그다지 매끄럽지 못한 번역도 이런 느낌에 일조합니다. ‘지금 여기’에 맞는 번역도 좋지만, 시대에 대한 번역자의 무감각으로 인하여 빅토리아 여왕시절의 영국이라는 진정한 리얼리티를 해칩니다. 예를 들어 허드슨 부인이 홈즈와 왓슨에게 반말을 하거나(이런 식의 과감한 번역은 처음 보았습니다. 허드슨 아주머니라는 호칭도 어색하게 들립니다), 존칭인 ‘미스터’가 사용되는 대화를 반말투로 번역하는 것은 당시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지요. 이와 달리 “your wife"를 ”자네의 아내“라고 직역하는 것은 우리식 어법과 전혀 맞지 않아 부자연스럽습니다. 원문과 대조하지 않고 번역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경솔한 행동일 수 있겠지만, 그냥 읽더라도 번역자가 너무 앞서가거나 문장에 대한 고민이 그다지 깊지 않았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 홈즈 시리즈가 갖는 고색창연하지만 기품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가 별로 살아나지 않는 듯합니다. 물론 이것은 기존 일본 번역의 영향을 받은 옛 번역글투에 젖은 저의 향수 탓일 수도 있겠지만.
<공헌>은 정전과는 달리 아직 저작권이 만료되지 않은 작품입니다. 패러디 또는 패스티시(pastiche)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이런 작품의 성패를 가늠하기는 어려운데, 저작권료까지 지불하면서 고전 주인공을 내세운 패스티시 작품을 번역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공헌>은 충분히 즐길만한 홈즈 이야기이고, 이 책이 성공하여 더 많은 새로운 홈즈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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