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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책 이야기

by 최용성 2007. 7. 16.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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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용. 프랑스어로 ‘똘레랑스’라고 하는 이 단어를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만든 이는 홍세화 선생이다. 도대체 관용이란 무엇일까. 헨드릭 빌렘 반 룬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개념을 따른다. “Tolerance(‘참다’라는 뜻의 라틴어 ‘tolerare'에서 온 말) : 다른 사람들에게 행위나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 자신의 견해 또는 일반적인 방식이나 관점과 다른 것을 편견 없이 끈기 있게 참아주는 것”(23-24쪽).

 

반 룬 전집 03/ 이혜정 옮김/ 서해문집,2005/총 456쪽

                                 

   책날개에서 “유머러스한 괴짜 아저씨”라고 지칭된 반 룬은 사람들이 단순하고 자유로웠다고 믿는 원시시대에 대한 세상의 통념을 흔든다. “원시사회는 매우 복잡한 사회였고,…원시인은 현재의 노예일 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노예였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두려움 속에 살다 공포 속에 죽은 비참하고 가엾은 존재였다.”(24쪽). 원시인은 전면적이고 강력한 생존욕구에 지배되어 배타성을 통해 안전을 유지하는 움직이는 요새가 되었고, 인과법칙을 몰랐던 그들은 ‘신의 분노’라는 관념을 숭상하여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처벌함으로써, 즉 불관용을 엄격히 실천함으로써 사회의 기존 행태와 법규를 유지하였는데, 그것을 위한 발명품이 ‘터부’라는 것.

 

   무대는 그리스로 옮겨온다. 여기서 서양사상의 2대 원류라고 할 히브리 사상과 헬레니즘 사상이 탄생한 두 곳을 비교하는 언술에서 앞으로 ‘관용’의 관점에서 서양사를 돌아 볼 반 룬의 기본 시각이 드러난다. “유대 땅에선 삶이 한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도시는…거의 10세기 동안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종교적 지위를 유지해 나갔는데, 상황이 이처럼 특수하지 않았더라면 유대인을 세상 다른 민족과 곧 갈라놓게 될 유일신 신앙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에는 그런 우세한 도시가 없었다.…남다른 개인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인종이었으니만치 독자적인 사상이 발전할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40쪽).

 

Hendrik Willem van Loon

   그리스인들의 유연한 사고와 그에 반하는 듯한 소크라테스 재판을 다루던 책은 종교적 불관용의 역사라고 할 기독교의 역사로 옮겨온다. 당연히 반 룬의 어법은 점점 더 신랄하고 통렬해진다. 성서에 대한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머지 않아 세상이 끝나리라 믿었기에 아무것도 기록으로 남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10년도 안 돼 하늘에서 떨어질 불에 다 타버릴 글을 쓰느라 뭣 하러 돈과 시간을 낭비한단 말인가?”(113쪽). 그러나 종말이 늦춰지고 교리에 혼란이 생기자 믿을만한 책이 필요해지고 그 결과 예수의 일생에 관한 짧은 글 몇 편과 보존되어온 사도들의 진짜 편지들이 신약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졌다. 그럼 구약성서란 무엇인가. “엉터리로 간추린 한 민족의 역사에다 어정쩡한 연애시, 반쯤 정신나간 예언자들의 뭔지 모를 환시(幻視), 그리고 그 어떤 이유로 아시아의 많은 부족 신 가운데 하나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사람들에게 온갖 욕을 읊어대는 토막글들을 담은 거룩한 책이 있다고 하면, 페리클레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아마 웃긴다고 했을 것이다.…그런데 3세기의 야만인은…이 비범한 문서를 인간이 이제껏 알았고 앞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의 총합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모세와 이사야가 그어놓은 한계선 너머를 연구함으로써 하늘에 도전하는 이들을 비난하고 박해하는 일에 함께 나섰다”(177-178쪽). 

 

   바로 이러한 광신과 독선이 ‘불관용’의 역사로 이어져 근대 이전까지 “신의 이름으로” 살해되거나 탄압되는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았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칼뱅에게 처형당한 세르베투스, 에라스무스, 재세례교도, 소치니 삼촌과 조카, 몽테뉴, 브루노, 인간에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이후 잃어버린 우주의 참된 시민이라는 지위를 되찾아준(343쪽) 스피노자, “시대를 잘못 타고난 또 한 사람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370쪽) 프리드리히 대왕, 볼테르, 프랑스 대혁명, 미국독립전쟁 등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서 으뜸가는 불관용의 주연은 역시 기독교-교회이다. 책의 많은 분량이 종교, 그것도 기독교의 불관용을 다루는 것은 그만큼 서양사에서 교회가 나쁜 짓을 많이 하였기 때문일 터.  “나는 안다. 600년 전이었다면 나도 절대 이 책을 쓰지 못했으리라는 것”(181쪽)이라는 통렬한 말 속에 기독교-교회의 불관용, 즉 학살과 광신의 역사가 갖는 야만성이 다 함축되어 있다. 

 

   이쯤 되면 예수신앙이 있고 없고 와는 관계없이 반 룬의 신랄한 기독교-교회 비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예수신앙이 있다고 해서 왜, 불관용 나아가 ‘이단’ 학살에 앞장선 기독교-교회를 정당화하려고 애써야 한단 말인가.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은 정당화하려고 하여서는 안 된다. 참된 관용 사회를 만들려면 이런 작은 상식부터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불관용의 역사는 끝난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반 룬이 이 책을 쓴 것이 1925년이었는데, 그 뒤에 펼쳐진 역사는 그 전 못지 않게 끔찍하기 때문이다. 불관용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만 해도 불과 20년 전까지는  생명이나 신체의 자유를 걸지 않고는 말하고 쓰고 싶은 대로 표현조차 하지 못하고 살지 않았던가.  

 

   반 룬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불관용은 집단적 방어 본능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443쪽), 그리고 모든 불관용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 “이 세상이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한 황금시대니 현대니 진보니 떠드는 건 순전히 시간 낭비”(446쪽)라는 것이다. 두려움에 떨던 원시인들은 아직도 우리들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살아 남았다. 나중에 따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사형제도, 지역-혈연-종교-인종-성-사상을 이유로 한 온갖 유형의 차별/ 억압, 영어광기, 무차별적 교육열, 모든 국민의 투기꾼 의식화, 반공주의, 그리고 노동자에 대한 적대적 태도 등등 다양한 형태 속에 남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실로 타자에 대한 이런 두려움은 사람들의 의식/무의식 세계를 끈질기게 지배한다. 이 두려움은 세상 또는 타인과 내가 다르되 다르지 않다는 역설을 깨달을 때 사라진다. 진정 관용은 열린, 건강한 마음에서 나온다. 이것이 중요하다. 

 

   반 룬이 유머 감각을 실어 신랄하게 말하는 ‘관용’을 실천하라는 메시지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절박한 과제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마음을 열고 두려움을 버려라!  

 

  “그렇지만 제발 조심하자. 관용은 자유와 같다. 청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끊임없이 조심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결코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 중에 생겨날지 모를 미래의 세르베투스들을 위하여,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하는 게 좋을 것이다.” (275쪽)

 

   “전망이 별로 희망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알다시피 이 지구가 우리 즐거우라고 생긴 건 아니지 않은가. 우린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뿐.”(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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