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란 시인은 예수가 우리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우리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핵심을 짚어줍니다. 그의 글은 절대타자인 하느님, 타자와의 올바른 관계 설정에 실패한 기성 교회의 역사에 대한 신랄한 경고문으로도 읽힙니다. 짧은 글 속에서 시인은 진정 선지자가 할 일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 이후에 신은 폭력을 휘두르고 공포를 조장하며, 존재를 파괴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주는 자, 존재를 발생시키고 유지하는 자로 바뀐다. 타자성은 이제 <앎>에 대한 권리의 이름으로 소환된다. 예수의 생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알> 것을 권유한다. 이제 초월적 미지는 공포가 아니라 은총이다. 예수는 생의 근원이라는 어지러운 공허, 완벽한 무의미, 또는 절대 의미,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절대 타자에게까지 존재를 들어 올릴 것을 명령한다. …나는 내가 나로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이다. 나는 <있음>만으로 충만한 의미를 지닌 자, <[스스로] 있는 자>인 신의 아들로서 신의 지성을 공유하므로, 신성 안에 거듭나므로 나이다…그러나 아주 오랫 동안 인류는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했다. …자유는 유보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절대 진리의 이름으로 타자를 찢고 죽였다.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을 보내면서 두 사람씩 짝지어주었던 정신, 타자를 네 얼굴로 삼으라고, 뿐더러 가장 가난한 타자를 하느님으로 여기라고 가르친 사람의 아들의 사랑하는 혼, 사람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았던 여자들과 세리들에게도 담을 쌓지 않았으며, 배반자 유다의 몫마저 빼앗지 않았던 철저한 자유주의자의 유연한 정신은 다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 안에 갇혔다.…서구는 그를 앞세우고 비서구를 타자의 구덩이에 처박았다. 타자가 억압당하면서, 절대타자인 신도 서서히 인간의 지평으로부터 추방당했다.…이른바 근대화 기획의 대체적인 노선은 바로 <나>를 강화하기 위하여 <너>를 약화시키는 태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자아에 의한 타자의 착취는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타자의 완결인 신은 타자와 함께 사람들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무지의 나무 뒤에 숨어 있었던 아담은 오만해질 대로 오만해져서 이제 나무 앞으로 나왔을 뿐만 아니라, 나무를 베어 넘겼다. 신성한 앎의 나무, 두 번째의 나무, 신과 인간을 연결했던 골고다의 나무도 뿌리뽑혔다”.(김정란, 영혼의 역사, 새움, 2001년, 35-38쪽)
예수의 참모습이 교회에 의하여 왜곡되었다라는 문제의식으로 쓴 책들은 그전에도 여럿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 기독교 뒤집어 읽기>(현암사, 2001)가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지요.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정당한 기독교 비판과 예수의 참모습을 알려주려는 노력에는 공감하면서도 늘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비교종교학이나 다원주의, 진리의 보편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면 굳이 예수신앙일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랜 세월 기성교회가 가르쳐온 교리체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여 문제설정을 잘못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그의 가르침이 상대적이라면, 정신적 스승 예수에 대한 존경과 배움은 가능할지언정 예수신앙은 성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정직한 태도일겁니다.
게리 윌스(Garry Wills)의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원제는 What Jesus Meant. 아마 ‘예수가 진정으로 의미했던 것’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것입니다. 권혁 옮김, 돋을새김, 2007년, 223쪽)는 확고한 진짜 예수신앙에서 출발하는 기독교/교회 비판서입니다. 저자인 게리 윌스는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교황의 죄>(박준영 옮김, 중심, 2005년, 500쪽)라는 아주 훌륭한 책을 썼던 사람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문제점을 ‘기만구조’라는 일관된 패러다임으로 파헤친 이 책은 여러 가지 문헌을 섭렵하여 저자의 주장을 정교하게 근거지운 대작입니다. 여기서 윌스는 “나는 우리 교회가 성령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분은 온갖 그리스도교 종파 안에서 당신이 불고 싶은 데로 부신다. 그분은 모든 종교 생활에 두루, 신의 부름에 주목하는 곳 어디에서나, 유대인과 불자와 이슬람 신자와 여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숨쉰다…우리가 자격이 없을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은 심지어 바티칸도 부르신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간곡한 부름에 응답할 필요가 있다. 교황들도 포함하여”(교황의 죄, 492쪽)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게리 윌스가 어떤 지점에서 출발하는지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볼까요.
“씌어질 당시의 참뜻을 되새기며 성서들을 읽으려면 예수가 어떤 행동과 어떤 말을 했는가에 대해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우리는 그 기묘한 행동과 말들을 통해 예수가 진심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를 물어야만 한다. 그는 하나님을 우리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려 했으며, 그 자신이 그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언제나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도발적이고, 보다 더 난폭했으며 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15쪽)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예수는 바로 믿음의 예수이다. 그러한 믿음을 거부한다면 성서 속의 이야기들을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 성서 속의 예수는 말씀을 전하고 부활했던 바로 그 예수다. 그가 이끈 신비로운 무리의 구성원들이 품고 있던, 그의 영속적인 활동에 대한 믿음이 성서에 대한 기독교적인 믿음의 기반”(25쪽).
“복음서들을 믿는다는 것은 비록 여러 단계의 상징화 작업이 있겠지만 모든 내용을 본뜻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복음서들을 경건하게 읽는다는 것은 비록 그러한 모든 상징들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진정 어떤 의미를 전하려 했던가를 지속적으로 묻는 것”(30쪽).
도발적이고 난폭하다는 표현을 빼놓으면 겉으로만 보아서는 보수적인 기성교회의 교리체계와 출발점이 비슷한 듯합니다. 그러나 게리 윌스는 자신이 설정한 전제에 사로잡혀 성경을 화석화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믿음의 예수를 다루지만, 복음서에 쓰여진 모든 것들을 문자 그대로 진실이라고 믿거나 예수에게서 문자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내용만으로 성서를 축소해버리는 근본주의와 분명하게 거리를 둡니다.
게리 윌스는 “합리적인 믿음을 따져보고 합리적인 믿음을 고백”(31쪽)합니다. 그런데 합리적 믿음이라는 것은 톨스토이 식으로 예수를 합리적인 윤리관념의 틀에 가두는 일, 즉 예수를 우리 입맛에 맞는 도덕교사로 만드는 것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잘못을 피하려면 내가 받아들이기 싫은 예수의 모습이라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겠다는 정직한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 정직성은 주입된 교리체계를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방식으로 얻어질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 결과 게리 윌스의 주장은 예수신앙의 보편적 정수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심 없는 확고한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을 불편하게 할 내용들로도 가득 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세상에 부정한 자는 없다며 게리 윌스는 예수가 오늘날에 오신다면 “동성애자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아닌 동성애자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77쪽)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신앙의 핵심을 버림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에 둡니다. “예수의 오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칭 그의 제자들이 끊임없이 부정한 영역들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84-85쪽)임을 윌스는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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