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 4.19. 이후 짧았던 민주주의 시절(체질적으로 일사불란함을 좋아하는 분들은 혼란기라고 하기도 하지만, 시끌시끌해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잘 굴러감을 지난 역사는 증명해왔습니다), 5.16. 군사쿠데타에서 유신까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5.18.의 비극,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며 한국 민주주의는 힘들게 성장해왔습니다. 이제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며 민주화를 흘러간 옛노래 정도로 치는 정서도 있지만,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두 가지만 이야기해볼까요. 우선 비정규직 문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과 아픔을 보여준 최근의 이랜드 사태야말로 그 모든 문제를 축약하고 있습니다. 점거농성의 당부를 따지기 앞서 비정규직을 위한 법률이 비정규직의 기반을 파괴하는 역설이 제도화되는 그 대목, 거기에 실질적 민주주의의 부재(不在)가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은 한미 FTA의 진행과정. 협정 자체 또는 개별 사안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그에 관한 의사결정에서 민주적 절차는 어디론가 증발하고 없습니다.
그밖에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많은 문제들을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생활 곳곳에서 아직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독재정권이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자본과 언론, 정치권력이 결합하여 민주적 참여와 의사결정을 더 교묘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결국 민주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추구할 가치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공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리영희 선생은 아직 우리 시대 “사상의 은사”입니다. 물론 그 분의 생각이 지금 일어나는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습니다. 그 분의 생각에 공감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여전히 소중히 여기고 배워야 할 덕목은 그 분이 살아온 삶의 태도, 자세입니다. 그것은 선택과 결정에 대한 책임이 개인 차원 뿐만 아니라 사회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니되 ‘사실’ 앞에 정직하여야 한다는 지식인의 윤리적 자세 같은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생각해볼까요. 대체로 진보주의자들은 6.25에 관한 수정주의적 관점을 지지하여 왔습니다. 미국 측에 의하여 유도된 남침이라는 식이지요. 그러나 러시아나 중국의 비밀정보 공개 이후 리영희 선생은 “진실이 밝혀진 뒤까지도 자기의 희망이나 선입관을 너무 고집하는 것은 지식인의 과학적 태도가 아니”(114쪽)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수정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물론 자신의 오류에 대한 반성과 함께 할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리영희 선생의 진정한 덕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실을 바로 보려는 것, 왜곡하지 않기,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기. 그래서 그는 정말 정파를 떠나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정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정말 당연한 덕목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 <대화>는 바로 그 리영희 선생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서전이라고 단정하지 못하는 것은 이 책이 임헌영 선생과의 대담 형식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우호적인 분위기의 대담이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며 조용하지만 치열한 논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형식은 우리가 리영희 선생의 삶과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에도 아주 효과적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같은 자리에 앉아 선생의 말을 생생하게 듣는 듯하거든요. 그 결과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문장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기운, 즉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의 정직한 기운이 책 전체에서 뿜어 나옵니다.
리영희 교수가 걸어온 삶의 여정이 우리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겹치면서 정치권력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이 책은 한 지식인의 개인사이자 사회사이고 동시에 정치사이자 사회운동사, 그리고 언론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함께 핍박을 받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임승차하는 동안 누군가가 힘겹게 치려야 했던 고귀한 희생의 실상을 생생하게 접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널리스트라는 리영희 선생의 직업이 작용한 덕분인지 구체성을 통하여 살아 숨쉬는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는 점이야말로 <대화>의 가장 큰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한 편의, 아니 여러 편의 소설을 읽는 듯 재미있고 흥미진진할 정도입니다.
책의 내용에 대하여는 굳이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인 것에 무관심하더라도, 심지어 리영희 선생의 사상에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 번 차분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대화>는 우리 현대사의 주요 고비를 모두 겪어온 지식인의 성장기와 실천적 삶, 인간적 고뇌를 시대상, 인간군상과 함께 생동감 있게 담아낸, 보기 드물게 소중한 읽을거리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질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는 존재가 되려고 고민하는 모든 ‘자유인’들을 위한 귀한 선물입니다. 틈틈이 다시 읽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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