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는 1897년 5월 29일 당시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던 브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율리우스 코른골트(Julius Korngold)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슈만과 모차르트의 이름을 두 아들에게 붙였다. 로베르트를 미들 네임으로 가진 형 한스는, 아버지의 관심이 신동인 에리히에게 온통 쏠렸던 탓인지, 도박에 빠져 의미없는 삶을 꾸려 갔다고 한다. 율리우스는 원래 법률가였지만, 음악평론을 하다가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을 높게 평가한 글로 한슬릭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결국 한슬릭의 뒤를 이어 당시 가장 영향력있는 신문인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제』(Neue Freie Presse)에서 1902년부터 1934년까지 음악평론을 맡게 된다.
이러한 아버지의 위치로 말미암아 에리히의 초년 시절 작품 활동은 논란과 가십을 유발시켰다. 아버지의 적(敵)은 대부분 아들의 적이 되었고, 아들의 작품에 비판적인 음악가들에 대하여 율리우스 코른골트는 평론가로서의 객관성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앞세워 대응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에리히의 작품이 원래는 아버지의 작품이라느니, 아버지의 후광으로 각광받게 되었다는 식의 여러 가지 구설수들이 어지럽게 떠돌았다. 예를 들어 아르투르 슈나벨은 코른골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2번을 높게 평가하였는데도, 세간에서는 그와 그의 제자 사이의 가상 대화―“에리히의 소나타가 그렇게 훌륭합니까?”라고 제자가 묻자 슈나벨이 “아니야, 그의 아버지가 그래”라고 대답하였다는 식의―까지 만들어 퍼트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짐작할만하다. 그러나 에리히의 작품이 훌륭하다는 점은 율리우스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다른 나라들에서 받은 열렬한 격찬으로 충분히 증명되곤 하였다. 에리히의 작품은 발표될 때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에리히는 세 살 때 박자를 세기 시작해서 다섯 살 때는 아버지와 피아노 연탄을 하였고 한번 들은 멜로디를 완벽히 재생해내는 재능을 보였다. 일곱살 때에는 작곡을 시작하였다. 아홉 살인 에리히를 만난 구스타프 말러는 “천재”라고 단언하였고, 알렉산더 폰 젬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를 스승으로 추천하였다. 특이한 인연이다. 세 사람 모두 잊혀졌다가 말러가 60년대부터, 코른골트가 70년대부터, 젬린스키가 80년대부터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히는 11살 때 발레 판토마임을 위한 음악 <눈사람>을 작곡한다. 이미 코른골트의 모든 특징이 드러나고 있는 이 사랑스러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둔다. 아버지의 작품이라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곡의 완성도는 높았다. 1910년 비인 오페라 하우스에서 초연될 때는 젬린스키가 오케스트레이션하였고, 1913년 에리히가 다시 오케스트레이션하였다.
작품번호가 매겨진 첫 작품은 피아노 3중주곡(1909~1910)이다. 이 곡은 첫 주제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1911년부터 1912년에 작곡된 신포니에타는 이름과는 달리 피아노를 포함한 대편성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대곡이다. 에드워드 덴트는 1914년에 “코른골트는 새로운 음악질서의 기초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화성과 대위법에 관한 책을 불살라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 물론 코른골트는 전통을 전복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천재성이 당대의 음악가들에게 얼마나 충격을 주었는지 잘 나타나는 글이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 6은 슈나벨과 플레슈에 의하여 1913년 베를린에서 초연되어 찬사를 받았다. 신포니에타의 초연은 1913년 11월 비인에서 바인가르트너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베를린에서는 다음해 2월 9일 니키쉬의 지휘로 이 곡이 연주되었는데, 마침 연주회에 참석하였던 시벨리우스는 “코른골트는 젊은 독수리이다”라고 일기장에 썼다.
코른골트는 열살 때 읽었던 하인리히 테웰레스의 ‘폴리크라테스의 반지’를 토대로 1913년부터 오페라를 구상하여 1914년 곡을 완성하였다. 행복한 부부와 그 사이를 훼방하는 못된 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이 1막의 짧은 코믹 오페라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관현악의 풍부한 표현력이다. 다음해에는 ‘비올란타’(Violanta)가 작곡되었다. 이 작품을 두고는 관능적인 소재를 어떻게 어린 작곡가가 그처럼 탁월하게 다룰 수 있는지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코른골트가 어려서부터 고금의 문학과 음악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코른골트는 지적이면서도 소박함을 지닌 드문 인격의 소유자였는데, 이는 그의 음악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코른골트는 1차 대전 중인 1916년에 입대하였다. 물론 전투활동이 아니라 음악으로 군의 사기를 앙양하였다. 1917년은 코른골트의 인생에서 중요한 해이다. 평생의 반려자인 루이제(Luise von Sonnenthal)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코른골트가 루지(Luzi)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그녀는 당시 비인에서 손꼽히는 미인이었고 그림, 피아노, 성악, 연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연인이고 친구였으며 음악적 재능까지 가진 완벽한 동반자로서 평생 동안 남편을 존경하고 내조하였으며 코른골트도 마음 속 깊숙이 그녀를 사랑하였다. 코른골트가 죽은 뒤 루이제는 “나와 에리히 코른골트의 우정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 영원한 친구를 잃은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인생은 한 편의 길고 행복한 러브 스토리였다”라고 회상하였는데, 코른골트의 음악을 들으면 누구든 이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코른골트가 작곡한 셰익스피어의 희곡 ‘헛소동’의 부수음악에는 당시 사랑에 빠진 천재의 감성이 아름답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정원의 정경’(Garden Scene)은 하이페츠를 비롯하여 여러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던 소품이다.
코른골트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죽음의 도시’(Die tote Stadt)는 1916년에 시작되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인 1920년에 완성되었다. 공포, 죽음으로 가득찬 내용 속에서 코른골트는 삶의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그다운 접근법으로 탐미적인 오페라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코른골트가 보여준 독창적 관현악법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 가장 많이 공연되고 사랑받는 코른골트의 오페라가 되었다. 이 오페라에 감탄한 푸치니는 코른골트야말로 독일 현대 음악의 가장 위대한 희망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헌정된 교향시 ‘수르숨 코다’(Sursum Corda)는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삶을 긍정하는 에너지가 가득차있는 곡이다. 특이하게도 초연 당시엔 난해한 현대음악이라며 거부하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이 곡의 주제는 뒷날 ‘로빈 훗의 모험’에서 다시 사용되어 유명해졌다.
1921년 쇤베르크는 음렬주의 기법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소개한다. 지지파와 반대파의 전선이 형성되었다. 쇤베르크를 지지하던 국제 신음악 협회는 당시 첨단을 걷는 작곡가로 여겨지던 코른골트에게 신음악에 합류하기를 권유한다. 코른골트는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기초하여 이를 거절하였고, 그 이후 그는 구식 작곡가로 낙인찍히게 된다. 작곡가 한스 갈(Hans Gal)이 코른골트의 전기작가 브렌던 캐롤과의 1985년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들의 실험을 단지 실험으로만 간주하였다. 쇤베르크는 편집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 생각에 그는 그 자신이 전통 안에서 독창적인 목소리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과거를 파괴하였다. 그는 바그너의 영향을 주로 받고 있었고 그것을 뒤흔들 수가 없었기에 그 자신의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반면에 내가 아주 많이 경탄해하던 코른골트는…자신만의 목소리를 확립하였다…”라고 한 말은, 독설에도 불구하고, 깊이 음미할만하다.
코른골트는 조성음악 전통의 수호에 나섰다. ‘죽음의 도시’는 20년대에 계속 인기있는 오페라였고 그는 여전히 각광받는 작곡가였다. 1923년부터는 코른골트 자신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네번째 오페라 ‘헬리아네의 기적’(Das Wunder der Heliane)를 작곡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코른골트가 루이제와 혼인한 1924년부터 그의 창작 활동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1923년을 전후로 나눠 코른골트의 작품목록을 살펴 보면, 콘서트/오페라 작품들 중 상당수가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생계에 구애받지 않았던 1923년 이전에 작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혼인 후 코른골트에게 절실했던 것은 경제적 자립이었다. 1차 세계대전 뒤 인플레에 시달린 오스트리아에서 살면서 그는 수입이 되지 못하는 작곡 대신 ‘돈이 되는’ 공연 분야에 매달려야만 했다. 오페레타 편곡, 지휘, 그리고 교직 등으로 안정된 수입은 보장되었지만, 작품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늘 음악이 떠올라 엑셀과 브레이크를 피아노 페달로 착각할 정도여서 운전을 배우지 못했다는 천재가 생계 때문에 작곡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음악사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여기서 ‘상주 작곡가’ 제도를 두고 재정적인 지원을 하여야 할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거저 들으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가). 4개의 교향곡을 작곡하려고 했던 그의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의 유일한 교향곡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1923년부터 시작된 네번째 오페라 ‘헬리아네의 기적(경이)’(Das Wunder der Heliane)은 1927년에 완성되었다. 코른골트 자신이 최고걸작으로 생각한 이 밀교적(密敎的) 오페라에서 표현의 한계는 극한까지 확장된다.
코른골트는 1929년에 알게 된 연출자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와 함께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들을 편곡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이 중에는 뒷날 미국에서 ‘그레이트 왈츠’로 유명해진 작품도 있다. 라인하르트와의 만남은 코른골트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1934년 워너 브라더스의 초청으로 ‘한 여름 밤의 꿈’을 감독하게 된 라인하르트는 코른골트에게 음악을 맡아달라고 제의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코른골트는 1934년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 땅을 밟게 된다. 이때 생긴 인연이 뒷날 나치의 마수로부터 벗어나는 열쇠가 될 줄이야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년여에 걸쳐 작업을 마친 코른골트는 비인에 돌아와 3막의 오페라 ‘카트린’(Die Kathrin)를 작곡하였다. 네 달 뒤에 다시 헐리웃에 가서 영화 몇 편의 일부 음악을 맡았는데, 특히 ‘캡틴 블러드’(Captain Blood)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남부 흑인 아이의 눈으로 본 성서의 세계를 그렸다는 ‘푸른 초원’(Green Pastures, 1936)에서는 ‘창조’와 ‘대홍수’ 장면을 위한 음악을 썼다.
1936년 작품 ‘안소니 어드버스’(Anthony Adverse)는 영화음악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코른골트는 이 대작을 위하여 '가사없는 오페라'라고 할만한 상호 유기적인 음악을 썼다. 여기 쓰인 주제 중 일부는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교향곡에서 다시 사용되기도 할 정도였으니 그가 쏟은 정열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이 음악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다. 이어 ‘또 다른 여명’(Another Dawn)이나 ‘왕자와 거지’가 작곡되었다.
코른골트는 1937년 비인에 돌아와 ‘카트린’(Die Kathrin)의 공연을 준비한다. 그러나 나치의 발흥으로 달라진 정치 환경에서 유대인 작곡가에게 기회는 없었다. 연기를 거듭하던 공연은 결국 금지 당하고 만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설마, 설마 하면서 미루다가 무고하게 학살되었던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치에 관심없던 코른골트가 완벽한 창작무대이자 진정 사랑한 도시였던 비인을 떠날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음악을 작곡해달라는 워너 브라더스의 유혹과, 친구들의 강력한 미국행 권고에 더하여 운명적인 일이 일어났다. 둘째 아들 게오르크(뒷날 영어식으로 이름을 바꿔 유명한 레코딩 프로듀서가 된 조지)가 마침 앓게 되었는데, 기후가 따뜻한 곳(캘리포니아)에서 요양하여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던 것.
결국 코른골트는 미국행을 결심한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바로 전에 그는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들이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삶과 죽음이 운명적으로 갈라지는 순간에 모든 것이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절묘하게 맞아 들어간 것.
새로운 대륙은 코른골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그는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영화음악을 작곡하였다. 1938년 2월 워너 브러더스는 영화 ‘로빈훗의 모험’의 음악을 맡아달라고 설득한다. 거절하던 코른골트는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병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마음을 바꾼다. 시간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교향시 ‘수르숨 코르다’의 여러 부분을 원용하였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 영화음악으로 그는 두번째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초연에서 난해하다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던 교향시가 미국 영화음악사의 걸작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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