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주의자 예수
예수는 부유함은 영혼의 적이 된다고 가르친 급진주의자입니다(92쪽). “예수는 일반적인 추종자들에게도 재물을 추구하지 말 것을 요구했지만, 그 자신의 메시지를 널리 퍼뜨릴 사람들에게는 보다 더 엄중하게 그렇게 할 것을 요구했”(90쪽)지만, 교회는 부자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었다고 윌스는 지적합니다. 이 점에서 윌스는 타협없이 기성 교회를 질타합니다.
“교회는 모든 극단주의를 거부한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 그들을 향해 립 서비스를 제공한다”(91쪽)
이것은 혁명운동과 같은 정치적 함의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방신학과는 구별되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우리들이 오랫 동안 실천적으로 외면하여 왔던 예수의 참 가르침을 직접 상기시킨다는 점에서는 두 신학의 차이는 실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권력 특히 정신적 권력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하였음을 윌스는 상기시킵니다. 예수는 짧은 공생애 기간 동안 “당대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보여준 오만함을 공박했다. 이러한 것을 유대 종교에 대한 특별한 공격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는 훗날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게 될 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똑같은 기준을 적용했다”(93쪽)는 것입니다. 파솔리니의 영화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 바로 이렇다고 전에 말씀드린 일이 있었지요. 폭력과 정치에 대한 예수의 극단적인―타협없는―태도는 후대의 교회들을 괴롭게 하였다고 윌스는 지적합니다. 그 결과 교회는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십자군을 축복하고 신정정치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이지요.
종교를 거부하다
“예수의 행적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며, 공분을 일으켰으며, 가장 위태로웠던 것은 당대에 인정받고 있던 종교를 거부한 것이다”(111쪽). 그럼 예수는 어떤 길을 가려고 한 것일까요? 게리 윌스는 예수가 보는 진정한 종교는 내적인 순수와 하나님과 일치를 구하는 마음의 종교였고, 종교의 형식주의는 그가 반대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무화과 나무에 저주를 내리고 성전을 파괴하면서 예수는 내적인 믿음과 마음의 종교를 가져 오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배워 온 종교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수가 거부했던 것은 어떤 종류의 종교였을까? 그것은 자화자찬하기를 즐겼던 바리새파처럼 자신들의 미덕을 거들먹거리는 모든 종교들이었다. 멋대로 판단하고 비난하며, 고통스러운 짐을 나누거나 덜어주려 하기보다, 쉽게 더욱 더 맣은 짐을 지우려는 독선적인 모든 종교들이었다. 자신들의 지도자들만을 찬양하고, 그들을 치장하는 것을 자랑하며 그를 위해 값비싼 기념물을 세우는 모든 종교들이었다.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부자들을 이롭게 하는 종교, 버림받은 자들을 경멸하고 속세의 지배자들에게 아첨하는 모든 종교들이었다.”(134~135쪽)
성(聖) 유다
게리 윌스는 가룟 유다를 다시 바라볼 계기를 제공합니다. 이전에 저는 가룟 유다가 그냥 은전 30냥이 탐이 나 스승을 팔아버린 악인일 뿐이다라는 목사님의 글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천박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저로서는 윌스가 유다를 다룬 부분이 특히 설득력있게 들립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갈등하다가 예수를 팔아넘긴다는 설정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 적용되었다고 하는 대목(169쪽) 같은 곳 말이지요.
왕중왕(1961)
제가 다른 곳에서 이야기했듯이 영화로는―안타깝게 이 책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니콜라스 레이의 <왕중왕>이 이 문제를 처음으로(혹시 아닌가요?) 다루었습니다. 거기서 가룟 유다는 열심당원이 되어 민족해방을 위하여 바라바와 함께 싸웁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나선 유다는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가 돌 하나를 집어 들고 설득하는 장면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예수가 들었던 돌을 들고 깊은 생각에 잠겼던 유다는 결국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우면서 바라바의 무장봉기 계획을 미루게 하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라바는 유다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모인 군중들을 이용하여 무장봉기를 시도합니다. 결국 열심당원들은 막강한 로마군에게 몰살당합니다. 고뇌하던 유다는 예수가 하늘의 군대를 불러 스스로를 구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그를 팔아 넘깁니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직면하는 순간에도 믿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불러 시험하지 않겠다는 예수의 결연한 말씀을 유다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게지요. 예수를 팔아넘긴 그때부터 유다는 지옥에 빠져 고통에 시달립니다. 영화 <왕중왕>에서 가장 뛰어난 대목 중 하나이지요. 예수의 기적을 초조히 기다리던 유다는 예수가 책형을 당하자 괴로워 울부짖고, 예수를 매달 십자가를 보고는 그대로 기절하고 맙니다. 그래도 유다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를 초조하게 뒤따르며 끝까지 기대를 버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간까지 초조하게 구원의 증명을 구하는 유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가슴이 미어터지는 듯합니다. 유다는 예수의 피가 묻은 돌을 주워들었다가 허무하게 내려놓습니다. 그와 예수의 인연은 돌로 시작되어 돌로 끝납니다. 유다가 갈 길은 외롭게 목숨을 끊는 일밖에 남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도 가룟 유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유다는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약한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자기 식으로 사랑했던 겁니다. 게리 윌스의 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알고 있는 유다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죽였다는 이유로 자신을 죽였다. 그의 자살은 구속(救贖)하는 회개의 행동으로서, 유다는 예수를 배신한 우리 모두의 동료 같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수호자이다. 성 유다.”(171쪽).
십자가와 구원
왜 예수는 죽어야 했을까요? 인간의 죄에 대한 벌을 대신 짊어졌다는―대속(代贖)―생각이 기독교의 안팎에 팽배하여 있습니다. 그 자체로야 완전히 틀린 생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르네 지라르가 “벌을 받아야 하는 한 집단의 죄악을 희생양에게 전가하는, 폭력적인 희생의식들을 정당화”(188쪽)한다고 비판한 그런 사고, 즉 분노한 하나님을 달래기 위한 십자가라는 교회 역사 속에 통용되어 오던 관념으로 연결되면 대속에 관하여 큰 오해가 발생됩니다. 게리 윌스가 하나님은 실수와 죄악을 저지른 사람들의 옹호자이지 그들을 벌주려는 존재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이런 오해로 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서이겠지요. 예수가 인류애라는 이름으로 수행하였던 것은 악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입니다(194쪽). 여기서 하나님은 육화된 아들인 사람 즉 예수를 통하여 인간을 자신에게 끌어올린다는 것,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내밀한 일치가 없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라는 일부 프란체스코 수도회 신학자들의 주장이 인용되고 있습니다(188쪽). 결국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은 인간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어둠을 빛으로 만듭니다(195쪽).
게리 윌스는 십자가의 희생은 하나님이 스스로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종류의 희생을 끝내 죄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시작한 특별한 희생이라고 말합니다(197쪽). 이 대목에서 저는 제정 러시아 말기에 태어나 마르크스주의자였다가 예수신앙으로 귀의하여―저 유명한 ‘베키’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였지요. 이에 대하여는 이인호 옮김, 인텔리겐챠와 혁명[홍성사]을 읽어보시기를―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니콜라스 베르쟈예프(Nicolas Berdyaev, 1874-1948)가 떠올랐습니다(이 훌륭한 기독교 사상가의 책이 거의 읽히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人子)는 거기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려고 지옥에 내려가신다. 십자가의 신비는 낙원과 자유의 가장 중요한 모순을 해결한다. 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선(the Good) 그 자체가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선한’ 자는 ‘악한’ 자를 지옥으로 추방하지 않고 자기들의 승리를 즐기지 않으며 악한 자들을 해방시키기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지옥에 내려간다.”(베르쟈예프/ 이신 옮김, 인간의 운명, 현대사상사, 1984. 360쪽)
이런 사고는 기성 교회가 별 다른 고민 없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보편구원론으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재결합을 통해서 인간이 인간과 우주와 재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개인 구원이나 선택된 자의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십자가 형벌의 아픔과 비극은 모든 인류와 모든 세계가 구원되고 변용되며 갱생될 때까지 세상에서 계속될 것이다”(베르쟈예프, 인간의 운명, 362쪽).
이것은 게리 윌스가 목자인 예수가 “제일 먼저 자신의 잃어버린 특별한 양, 유다를 찾았을 것”(199쪽)라고 확신하는 태도와 통합니다. 결국 예수신앙은 결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모든 인류와 모든 세계가 구원되고 변용되며 갱생될 때까지”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이 땅의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가두고 좌절시키려 하는 사회구조 속을 파고들어, 관통하고 둘러보고 있다.…그의 제자인 우리들은 때때로 그를 오해하고, 베드로처럼 그를 부정하고, 유다처럼 그를 배신한다. 당연하게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들은 빈번하게 그가 부인했던 종교의 형태로 돌아가려 한다.”(218쪽)
에필로그
물론 게리 윌스는 전통적 예수신앙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면 오히려 윌스는 정통 기독교 교리체계의 핵심에 가까이 있는 사람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의 책은 통렬하고 성찰적이지만, 전복적이지는 않습니다. 이 점을 이 책의 한계라고 폄하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은 예수신앙에서 버릴 수 없는 가치라는 점을 이해하여야 할 겁니다. 내가 예수 즉 하나님과 일치를 추구하더라도 동시에 하나님은 될 수 없다는 바로 그러한 실존적 겸허함에서 비롯되는 전적인 내맡김 같은 것.
“우리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우리들은 그저 부활한 그의 신비로운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 몸 안에서는 그의 첫 번째 제자들이 요구했지만 예수가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그런 종류의 차별들은 전혀 없다.”(211쪽)
마지막 문장은 여성이 사제가 되는 것을 거부하여 온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이 되기도 합니다.
게리 윌스는 예수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사랑이라면서 우리들이 교회의 결혼식 축가를 통하여 많이 듣는 바울의 유명한 편지글로 책을 마무리합니다. 이쯤에서 그의 또 다른 책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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