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은 위대하지 않다

책 이야기

by 최용성 2009. 8. 29. 20:55

본문

 

    종교는 사람을 구원하는 걸까요, 아니면 전일성(全一性)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광신을 내세워 사람들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들었을까요?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가 사람들을 더 똑똑하게 만들었다거나 행복하게 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오히려 종교로 말미암아 인류가 피의 역사를 걸어왔을지 모른다는 혐의가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물론, 종교의 순기능도 적지 않았습니다. 유한성 속에서 절멸되어가는 존재인 사람들이 잠시 기도하고 감사하면서 마음이 편해지거나 희망을 품었을 수 있겠지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을 것이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기도 했겠지요. 아니면 최소한 지옥에 대한 공포로 나쁜 짓하려는 충동을 멈추게도 하였을 터이니 사회정의 구현에도 어느 정도는 효과적인 수단이었을 겁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종교의 장점이지요. 그러나 인류의 지식이 쌓이면서 그 정도 기능은 다른 수단으로도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거나 심지어 더 효과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종교의 효용가치는 결코 종교 자체를 정당화할만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보다 우리가 역사와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배우려는 마음이 있다면, 종교로 인하여 생겨난 악도 결코 무시할 수 없거나, 아니면 다른 악보다 더 무시무시하였다는 진실에 마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François Dubois (1529-1584),  La Saint-Barthélemy, ca. 1572-84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학살과 억압이 이루어진 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종교집단의 수많은 비리, 권력 혹은 자본과 의 유착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내놓는 변명은 늘 같습니다. 신의 가르침과 잘못을 저지른 종교인은 다르다, 거룩한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잘못일 뿐이다 등등. 그러나 이건 어쩐지 정직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제가 피상적으로나마 아는 성경 구절만 보더라도 광신자들의 광기에 불을 지를만한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에는 살육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문구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그 문구들을 모순없이 해석하기 위하여 많은 고충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수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왔다고 했기 때문에 구약은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이니 구약이니 하는 말은 뭔가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왜 두 번의 모순투성이 약속을 하여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셨을까요? 제 잠정적인 답 하나는, 성경을 모순없는 완전무결한 책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신을 성경 안에 가둘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유일신교의 문제점은 그것이 추구하는 절대가치 또는 절대자가 다른 가치나 존재에 대한 부정을 전제로 하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이 죄와 심판을 표명하는 순간, 신의 이미지를 닮았다는 인간들도 신을 흉내내 타인의 죄를 찾아내고 심판하는 악행을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였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종교에 내재된 본질적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저널리스트이고, 그의 직업은 책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깊은 사유를 위한 책이 아닙니다. 책은  지적인 논증이나 직관적 성찰보다는 구체적 사례를 거시하면서 현대과학 등에 기초한 상식적인 의문제기를 통하여 종교, 특히 유일신교의 폐해와 허구성을 주로 파헤칩니다. 물론 불교와 유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도 공정성을 위하여서인지 도마 위에 오릅니다. 종교의 가르침 자체에 대하여 히친스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요지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종교 없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든다, 종교는 사람들을 광신에 빠지게 하고 서로 미워하고 죽이게 만든다, 종교의 긍정적인 기능을 종교 없이 더 잘해낼 수 있다, 계몽된 정신을 찾자 등등. 히친스는 종교적 신념을 탄압하거나 금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사람의 눈을 닫고 인간들을 서로 미워하게 하고 경계짓는 종교에 대하여 싸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물론 이성의 힘으로!  소박하고 거친 요약이지만,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처럼 단순 명쾌합니다. 

 

    히친스가 주장하는 바에 대하여 실천적으로는 굳이 반대할 이유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각 종교들이 지닌 핵심을 제대로 보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의 교리 이해는 깊이가 얕고 오해에서 비롯된 것도 적지 않아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습니다. 특히 불교에 대한 시각은 그가 얼마나 편협하고 잘못된 관점에 서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붓다가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은 사실 사회주의가 아니라 파시즘"(294면)이라거나 ""자유로운 개인과 정신을 경멸하고 복종과 체념을 가르치며 삶을 한심하고 일시적인 것으로 보는 종교"(298면) 운운하는 대목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불교 역사에 그런 점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적어도 그것을 붓다가 가르친 것이라고 표현하여서는 안되었습니다. 자신의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에 맞는 사례들만 찾아내 피상적인 균형을 시도하다가 지적인 천박성을 드러낸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유일신교의 역사 일반에 대하여 그가 한 말이 별로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이성과 지혜를 배반할 때 어떤 무시무시한 비극이 일어나는지 경고하는 이 책의 내용은 우리가 버려서는 안될 핵심 메시지라고 할 것입니다. 언제나, 맹신, 타인에 대한 증오, 치우침이 불행의 시작인 것.  결국 우리는 사람이고,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로 돌아와 계몽을 계속하여야 한다는 히친스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인본주의에도 영성(靈性)은 필요한 것입니다. 거기에 제대로 이해되고 비판에 열려 있으며 타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헌신적인 사랑과 믿음으로 실천되는 참종교가 기여할 가능성을 히친스처럼 굳이 닫아둘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