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겪는 불행을 보면 어떤 마음이 생기는가? 안타까움? 슬픔? 도우려는 마음? 죄의식? 나는 괜찮다는 안도감? 득이 될지 말지를 따지는 계산? 경쟁에서 이긴 쾌감? 우월감? 찰나에 스쳐가는 숱한 마음 가운데 어느 것이 진정 내 마음일까?
원시시대 이후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협동하면서도 늘 타인의 희생을 필요로 하였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맹수의 먹잇감이 되거나, 기근일 때 먼저 죽어 주거나, 신의 분노를 달랠 제물이 되어 주거나, 공포심과 살인본능을 표출할 대상이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냉혹한 자연에 던져진 무지한 인간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 어두운 마음은 유전자에 깊숙이 각인되어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가 극단의 상황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내세우면서. 의자놀이처럼, 누군가를 밀어내고 남은 자를 비루하게 만드는 정치가, 경제가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심리적 뿌리를 찾다보면 이런 어두운 인간 본성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를 활용할 줄 아는 자본은, 권력은 대체로 성공한다. 남은 자들에게 빈 의자를 차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면서, 그것이 세상이치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속삭인다. 한 의자에 두 사람이 앉을 수도 있거나 한 의자를 둘로 나눌 수 있다는 상상력을 애당초 차단하면서.
그러나, 무엇인가를 위하여 희생양을 만들어 죽이는 것도 인간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면서 약한 이, 공격받는 이,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과 연대하는 존재도 역시 인간이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고, 몽매함에서 우리를 깨우쳐 온 계몽 정신의 힘이다. 인간은 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자기를 희생하고 이익을 양보해서라도 연대하여 맞설 줄 아는 그런 존재로도 진화되어 왔다. 그런 존재가 진정 사람이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엉터리 같은 ‘의자놀이’의 실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권력이, 언론이, 자본이 사실을 곡해하고 피해자들을 모욕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 일로 무려 23명의 소중한 사람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야만도 이런 야만이 없다. 공지영은 이 야만의 정체를 아주 쉽고 명료하게 드러내 보인다. 마치 중등 교과서를 읽는 듯하다. 특히 충격적인 대목은 정리해고를 위한 회계법인의 회계조작과 거기에 말려드는 법원의 모습일 것.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의자놀이>처럼 좋은 법조윤리, 회계윤리, 경영윤리 교과서는 없을 것이고, 이야말로 전문가 집단의 교육을 위한 필독서이며, 우리 사회는 공지영의 뜨거움에 큰 빚을 진 것이라고.
"사람이어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공감하여 행동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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