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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마음 : 강권순이 노래하는 김대성 창작가곡집

CD

by 최용성 2007. 12. 2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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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림살이가 튼실하면, 일개 집안을 둘러보아도 있을 것은 반드시 있을 데 있고, 없을 것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역사의 절맥(絶脈)이 드리운 그늘 아래 온갖 수입품들이 제철 만난 나비처럼 부유하고, 그 외제의 거품 사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헤엄쳐 다니는 졸부들의 마을. 그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김영민, 문화 문화 문화, 동녘, 116). 특히 음악만큼 철저하게 역사에서 절맥되고 고립된 분야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양악과 대비되어 불렸을 국악이라는 말은 이제 대중과 소통되지 않는 특수 장르를 지칭하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가곡이라고 하면 서양가곡이나 초보적 서양화성으로 작곡된 한국가곡을 떠올리지 정악의 한 분야를 연상하기란 쉽지 않지요. 제 나라 전통음악에 대한 무관심은 거의 극점에 이른 듯합니다. 그 원인을 찾자면 우선 시대가, 가치관이 변한 탓을 들 수 있겠으나 교육 그리고 방송의 탓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국악방송이 개국하였고 KBS 1에프엠이 국악에 시간을 많이 내주니 그렇지 않다구요? 천만의 말씀. 문제의 본질은 고립에 있습니다. 일반 프로그램에서 일상적으로 들려주는 음악 중에 국악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현실 말이지요. 클래식이나 재즈도 비슷한 형편이기는 하지만 국악에 비하면 그래도 사정이 좋은 편입니다. 국악을 언제든 생활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으로 취급하지 않고 게토로 내몬 탓에 국악은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져만 갑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까요?

 

    강권순이 노래하는 김대성 창작가곡집 <첫마음> (이게 정확한 표현입니다. 음반의 제목을 강권순 창작가곡집이라고만 적고 작곡가의 이름은 한 구석에 조그맣게 적어놓은 것은 부적절해 보입니다)을 들으며 저는 어떤 실마리를 본 듯합니다. 강권순, 김대성, 그리고 여기 실린 노래들이 우리 일상 속에 스며들어가도록 그리고 그 맥을 잇는 시도들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음반에 담긴 음악에는 지금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이 잃어버렸던 우리 소리의 원형을 불러오는 어떤 기운이 느껴집니다.

 

C&L MUSIC CNLR 0706-2

 

    제 생각에 한국음악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김순남이라는 희대의 천재가 역사의 굴곡으로 말미암아 끝내 개화하지 못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진부한 화성과 멜로디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의 양악 가곡들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던 제게 김순남의 가곡은 그야말로 계시와 같은 것이었지요. 한국 소리 전통의 맥락 안에서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화성과 멜로디, 리듬으로 시어를 아름답게 풀어내는 그의 음악은 분명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비극으로 점철된 한국현대사는 그의 재능을 꽃피울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강권순이 부른 김대성 창작 가곡집 <첫마음>을 들으며 저는, 김대성이 영향을 받았다는 세 사람의 음악가 중 더 유명한 바르톡이나 다케미츠보다는 김순남을 떠올렸습니다. 김대성이 이건용에게서 배운 것도 우연은 아니겠지요. 이건용은 민족음악론을 주창하며 김순남 연구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분이 아닙니까.

 

    김대성의 음악세계 저변에는 김순남의 아우라가 연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특히 소월의 진달래꽃초혼은 김순남도 썼던 곡이니 한 번 비교하여 보기로 할까요. 경쾌한 리듬 속에 우리 전통의 한과 흥을 함께 불러낸 아름다운 파격이 인상적인 김순남의 걸작 진달래꽃과 비교하자면 김대성은 슬픈 서정 쪽에 더 방점을 찍어 놓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흔히 들어온 진달래꽃가곡처럼 서구적 감상에 빠지지 않고 한국음악의 정신을 불러내온다는 점에서는 역시 김순남과 통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닙니다. ‘초혼은 아예 김순남에 대한 오마쥬와 같이 들립니다. 공격적이고 빠른 피아노의 리듬패턴을 깔고 가수가 절규하듯이 외치는 충격적인 도입부에서 가슴이 시리도록 비통한 느린 중간 부분을 거쳐 다시 빠른 도입부의 리듬 패턴으로 돌아오는 김순남의 걸작을 김대성은 그대로 따라간 듯하지요. 곡의 구조뿐만 아니라 멜로디, 화성, 리듬의 운용이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이 두 곡뿐만 아니라 많은 곡들에서 김순남의 자장가산유화’, ‘잊었던 마음’, ‘그를 꿈꾼 밤’, ‘상렬과 같은 곡이 겹쳐집니다. 김대성이 김순남의 아류라는 말이 아니라 그의 음악에는 한국음악사의 올바른 창작정신이 절맥되지 않고 흐른다는 뜻입니다. 듣는 사람을 가슴 깊게 공명하도록 만드는 강권순의 절창을 들으며 저는 그녀가 반드시 김순남의 가곡에 도전하여 완창해주기를 간곡히 기원하게 되었습니다. 김순남의 가곡이 어설픈 서양가곡이나 찬송가의 흉내가 아니라 한국의 소리 전통에 기초하고 있고 다른 어떤 가곡보다 마치 오늘 작곡된 곡인 것인 양 현대적인 음악임을 강권순 같은 천재라면 금방 알아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결과가 아직까지 우리 성악가 중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김순남 가곡집의 완창 명연주라는 대업으로 이루어지기를 꿈꾸어 봅니다.

 

    이 앨범에 실린 노래들은 현대서양음악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그 실질은 매우 다양합니다. 피아노와 거문고가 홀로 또는 함께 한 김대성의 가곡은 표현주의적인 가곡에서 서정가곡, 고급 대중가요(자우림의 김윤아의 솔로앨범 같은 분위기를 연상해보면 도움이 될 겁니다)나 뉴에이지 음악, 민중가요, 정악 가곡의 전통-특히 시조를 가사로 삼은 우리 둘이 다시 태어나’, ‘창 안에 혔는 촛불’-까지 아우릅니다. 어느 곡에서든 강권순의 다채롭고 농담이 짙은 절창은 정악가곡에 닫힌 마음의 문을 열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녀의 소리에는 다른 국악인이나 서양 성악가, 대중가수들에게서는 듣기 힘든 시원적(始原的)인 아우라 같은 것이 있고, 그것이 김대성의 한국적인 아름다운 노래 속으로 파고 들어 우리의 무의식 안에 숨겨진 한국의 소리라는 원형을 불러낼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이러한 작업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김순남과 같은 우리 음악전통을 창조적으로 구현해낸 작곡가들을 찾아내는 일로 이어져 일상 속에 거듭 재현된다면 우리 음악현실에서 역사의 절맥(絶脈)이 드리운 그늘을 걷어내는 일도 가능해질지 모릅니다. 원래 가장 중요한 일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일어나는 법. 강권순이나 김대성에게는 분명히 그러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 신민정의 피아노나 허윤정의 거문고도 자기 할 바를 다 합니다. 녹음은 직접음 위주로 선명하게 포착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수의 호흡이나 발성법이 다소 생소하게 들리더라도 반복하여 감상하시기를 권합니다. 정말 좋은 음반입니다. 진심으로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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