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조피 무터는 천재 소녀 바이올리니스트에서 개성이 강한 거장으로 성장했지요. 아니, 성장하였다기보다는 변용되었다고 해야 할겁니다. 이미 어린 안네-조피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으니까요. 오랜 시간이 흘러 그녀가 카라얀과 남긴 DG의 초기 녹음들을 다시 들어보니 더욱 그런 확신이 듭니다. 역시 세기의 거장 카라얀의 안목은 정확하였습니다.
카라얀은 20세기 음악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휘자 중 한 사람이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그 분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지요. 그러나 무터와 함께 한 녹음들을 들어 보면 역시 그의 음악세계에는 다른 이가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카라얀과 무터의 만남은 미학적 필연이라고 보아야 할 것같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카라얀은 현악을 중심축으로 하는 레가토 아티큘레이션의 강조로 천의무봉이라고 할만한, 이음새가 없는 듯한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거기에 정교한 앙상블과 다이나믹, 그리고 화사하고 윤기있는 관능적인 음색이 그의 관현악이 들려주는 특징이지요. 안네-조피 무터의 바이올린 음색은 바로 이런 특성에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그녀의 소릿결에는 매끄러운 윤기가 흐르고 화사하고 관능적인 육감이 풍윤한 음향을 만들어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다소 날카롭고 예민한 정경화의 바이올린 톤과는 대척점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무터의 톤은 그녀가 성숙할수록 더 농염해지고 있지만, 그러한 특성은 초기부터 명확했습니다. 이런 바이올린 톤이야말로 카라얀이 추구하는 사운드와 가장 잘 들어맞으니, 의식하였든 의식하지 않았든 카라얀이 그녀를 말년의 유일한 바이올리니스트 협연자로 선택한 것은 미학적 고려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새롭게 출시된 카라얀과 협연한 무터의 1978-1988 DG 녹음 전집 박스를 들어보면 무터의 초기 녹음들이 세월을 이기고 당당히 명연의 반열에 오를만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라얀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교향악적이면서도 독주 부분이 찬란합니다. 완성도 면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녹음을 굳이 지적한다면 비인 필하모닉과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실황녹음 정도일 듯합니다. 크게 흠잡을 데 없는 좋은 연주이기는 하지만, 이 곡만은 최근 프레빈/ 빈 필과 협연한, 개성 강한 신보가 훨씬 뛰어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밖의 다른 곡들로 오면 소녀/처녀 안네-조피와 어른 무터의 신구보 중에 어느 것이 더 뛰어난지 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 협주곡의 경우 마주어와 협연한 최근 녹음에는 무터의 자기 주장이 잘 드러나 있지만, 어릴 때 카라얀과 녹음한 구보는 훨씬 더 보편적이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지요. 그렇기에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 묻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새로 녹음한 다른 곡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터는 성장하면서 현대음악의 세계를 접한 경험을 기존 레퍼토리의 해석에 원용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점점 낭만적 주관주의가 극대화한 해석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루바토와 잦은 비브라토, 개성적인 프레이징과 아티큘레이션 등등 최근 무터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그 동안 익숙해진 음반들과 비교하면 작곡가를 넘어서서 연주자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논란도 많지만, 저는 무터의 이런 모습도 참 좋습니다. 다른 어떤 연주자보다 농밀하고 아름다운 음색과 표현력을 지니고 있어 그 자체로도 매혹적인 그녀의 바이올린 음색에 더하여,자주 들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명곡들을 새롭게 보는 길까지 열어주니 금상첨화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같을 정도니까요. 이토록 개성이 강한 연주라면 몇 번이라도 다시 녹음할만한 정당성이 있습니다.
카라얀과 함께 한 이번 DG 세트는 염가로 출시되었지만, 다행스럽게 OIBP로 마스터링되어 꽉 찬듯한 밀도감과 화사하고 윤기있는 음이 매혹적입니다. OIBP 마스터링은 카라얀과 무터의 음악특성과도 잘 들어맞는 듯합니다. 여기 실린 곡목들은 모두 만만치 않은 명곡들이지만, 소녀/처녀시절의 연주라고 한 수 접어주고 봐줄 필요는 없습니다. 선입견만 갖지 않는다면 모두 명반의 대열에 당당하게 함께 할만한 연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무터와 카라얀의 팬들은 물론이고 베토벤, 브람스, 브루흐, 멘델스존,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을 위한 손색없는 종합선물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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