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의 작곡가 중에는 낭만주의 전통을 고수한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노만 델로 조이오(Norman Dello Joio)도 그 중 한 사람이었지요. 그의 음악은 노골적으로 선율이 풍성하고, 불협화음이나 현대적 음향에 무관심하다고 할 정도로-마치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처럼-듣기 편합니다. 그의 음악은 귀에 달라 붙는 멜로디와 활기찬 리듬으로 듣는 이를 즐겁게 합니다. 이탈리아 출신인 부친이 오르가니스트이자 오페라 가수들의 성악지도를 한 음악가였던 덕분인지 델로 조이오의 음악에는 그레고리안 찬트에서 발원된 가톨릭 전례음악과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은 종교적인 소재를 다룬 두 편의 음악 <성 잔다르크의 승리>(The triumph of Saint Joan)와 <전도서에 관한 명상>(Meditations on Ecclesiastes)에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유럽 전통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재즈나 팝음악을 통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의 정신이 델로 조이오의 음악 속에 스며 있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그는 분명 미국 작곡가입니다.
노먼 델로 조이오는 그의 유명한 스승 파울 힌데미트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형식과 구조를 다루는 그의 능력은 힌데미트로부터 배운 것이겠지요. 노먼 델로 조이오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은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입니다. 관현악을 위한 세레나데라는 부제가 붙은 , <잔 다르크의 승리>의 소편성 버전인 ‘Seraphic Dialouges’, ‘ 같은 작품들이 그레이엄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세상에 나왔지요. 에드바르트 치프젤(Edvard Tchivzhel)이 지휘한 애틀란틱 신포니에타의 '마사 그레이엄을 위한 음악‘ 제3집(KOCH 3-7167-2)에 노먼 델로 조이오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코흐 레이블은 20세기 미국음악 영역에서는 독보적인 음반들을 여럿 남겼는데 이 시리즈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미국인들에게는 노먼 델로 조이오가 CBS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에어 파워>(Air Power)를 위하여 작곡한 영화음악이 유명한 것같습니다. 리처드 로저스가 제2차 세계대전의 해전을 다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리즈 <바다의 승리>(Victory at Sea)를 위하여 작곡한 음악들과 비교될 수 있는 이 영화음악은 원래 4명의 작곡가들에게 위촉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먼 델로 조이오의 음악을 들은 제작자들은 나머지 23개 에피소드도 그대로 델로 조이오의 곡으로 가기로 결정하지요. 그만큼 듣는 순간 귀를 사로잡고 표현력이 풍부합닏. 전쟁 다큐멘터리를 위한 배경음악이지만, 낙천적이고 명쾌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풍요로운 자신감이 넘친다고 할까요.
노먼 델로 조이오의 걸작 <성 잔다르크의 승리>는 원래 1950년에 성공적인 초연을 마친 오페라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작곡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페라 전체를 거둬들이고 두 번째 잔 다르크 오페라로 <루앙의 재판>을 작곡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오페라의 음악을 기초로 하여 3개 악장의 교향곡을 작곡합니다. 경건하고 격정적이며 아름다운 종교적 명상이 담긴 이 교향곡은 제임스 세드리스(James Sedares)와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우수한 연주로 녹음되어 있습니다(KOCH 3-7243-2). 커플링된 곡은 그레고리안 찬트를 기본 테마로 한 3개 악장의 <변주곡, 샤콘느와 피날레>입니다. 1947년 뉴욕비평가 협회상을 받은 이 곡 역시 걸작입니다( 마지막 필업곡은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입니다. 암으로 요절한 지휘자 앤드류 셴크(Andrew Schenck)―그가 코흐 레이블을 통하여 낸 바버의 <애인들>(The Lovers)은 그래미상을 수상하였습니다―를 추모하는 음악입니다. 아마 그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코흐의 미국음악 시리즈 중 상당 부분이 그에 의하여 실현되었을지도 모르지요).
1990년대 초반에 아르모니아 문디 프랑스 레이블에서 ‘모던 마스터즈’(Modern Masters)라는 시리즈 앨범이 3장 출시된 일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아모스(David Amos)가 런던 심포니, 시티 오브 런던 신포니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등 영국의 3개 오케스트라를 제1집부터 차례대로 지휘한 이 시리즈에는 미클로시 로자의 "트리파르티타"를 시작으로 노먼 델로 조이오에서 폴 크레스톤까지 조성음악 전통을 수호한 20세기 미국에서 활동한 거장 작곡가들의 작품을 모았던 시리즈였습니다. 그 중 델로 조이오의 곡은 두 곡이나 실려 있습니다. 제2집에는 시티 오브 런던 신포니아의 연주로 <비올라와 현악을 위한 서정 환상곡>이, 제3집에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1957년 퓰리처 음악상을 받은 <전도서에 관한 명상>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프레드릭 페넬이 댈러스 윈드 심포니를 지휘한 레퍼런스 레이블의 <트리티코> 음반(Refference Recordings RR-52CD. 오디오파일 음반이기도 합니다)에서도 노먼 델로 조이오의 <중세선율 변주곡>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노먼 델로 조이오의 음반은 이 정도입니다.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가 결합된 평이한 악상이 별 특징이 없다고 평가되어서인지 그의 음악을 연주회장은 말할 것도 없고 음반으로도 만나기조차 쉽지는 않은 편입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는 자연스러운 노래가, 그레고리안 찬트를 연상시키는 종교적인 경건함이, 재즈와 같은 자유분방한 리듬이, 간결하고 밀도높은 구조적 형식미가, 그리고 이탈리아와 미국의 향토색이 함께 흐르는 독특한 세계가 있습니다. 20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배출된 뛰어난 조성음악들이 더 많이 연주되고 녹음되었더라면 오래된 레퍼토리만 되풀이하면서 세상과 고립되어 가고 있는 클래식 음악계의 현실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의 아들인 저스틴 델로 조이오도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부전자전이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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