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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하 피아노 독주회를 다녀와서

음악가와 음악

by 최용성 2007. 11. 2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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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028일 저녁 730분 금호아트홀에서 정영하 선생의 독주회가 열렸습니다. 시간이 좀 흘렀지만 그날 연주회에서 받은 이런 저런 느낌을 적어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국내 연주자들의 독주회 가운데 상당수는 아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벌이는 집안 잔치같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연주 자체를 진지하게 평가하기 쉽지 않습니다. 비판이 결여되어 있으니 연주자가 치열한 프로 정신을 갖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기도 어려웠구요. 음악만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들이 우리 연주자들의 독주회에 실망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정영하 선생의 연주만은 늘 예외였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음악에 도전하는 지적인 레퍼토리 선정, 한국 창작곡을 꼭 하나씩 넣으려는 소명의식이 먼저 음악애호가들의 눈을 사로잡지만, 그보다 더 돋보이는 것은 그야말로 음악을 제대로 해석하여 즐겁게 들려준다는 데 있었습니다. 특히 여자 맞아라고 묻고 싶어질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건반에 불어넣어 사람들을 압도하고는 하였습니다. 그것이 돌격 앞으로가 아니라 섬세한 강약의 대비 속에 적절하게 이루어지기에 청중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혹 아쉬웠던 것은 종종 부분 부분 서두른다는 느낌 같은 것이 들 때가 있었다는 겁니다. 연주자가 지나치게 성실하고 완벽을 추구하다보니 생기는 초조감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번 연주회에서 정영하 선생은 그 동안 보여주었던 자신의 음악세계를 완전히 뛰어넘는 전혀 다른 차원을 펼쳐 보였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내외 유명 피아니스트들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만큼 훌륭한 해석을 들려준 멋진 연주였다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연주자가 무대에 처음 나타날 때는 좀 뜻밖이었습니다. 검은 연미복 정장을 입고 나온 겁니다. 여성 연주자들은 드레스 차림으로 나오는 것이 관례인데, 어찌 저럴 수가? 그러나 뒤에 알게 되지만, 이것은 무대와 청중을 장악할 줄 아는 프로 연주자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카리스마를 암시하는 복선이었습니다. 첫 곡은 헨델의 모음곡. 아무리 잘 연주해도 본전찾기 어려운 곡이지요. 문외한이 들어도 연주자가 실수하면 손쉽게 알아 챌 수 있고, 틀린 곳없이 무사히게 연주하여도 지루하고 진부하게 들리기 쉬운 곡이니까요. 그런데 정영하 선생의 손길에서 헨델의 음악은 아주 유려하게 흘러갑니다. 마치 헨델이 우리 시대에 살아 돌아온 듯합니다. 원래 독주회의 첫 곡에서는 연주자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런 흔들림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고까지 말할 수야 없겠지만, 정말 자연스럽게 감동적으로 곡을 구현하였습니다. 곡이 끝나자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오더군요.

 

    두 번째 곡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소나타 4곡입니다. 여기서 연주자의 열정과 기량은 절정에 오른 듯 하였습니다.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는 귀에 쉽게 달라붙는 멜로디와 생동감있는 리듬을 살리면서 열정적인 감정과 색채를 제대로 표현해내야 하는 작품들이어서 청중들에게는 즐겁지만 연주자들에게는 꽤 어려운 곡입니다. 음악의 맥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누구나 눈치챌 정도로 심하게 망가지는 음악이니까요. 그런데 정영하 선생은 전혀 어렵지 않게 스카를라티의 아우라를 살려 냈습니다. 안정적인 기교를 바탕에 깔고 음색과 리듬, 멜로디, 다이나믹을 자연스럽게 구현해내니 계속 감탄할 수밖에 없었지요. 음반으로 듣던 명연주들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고 오히려 그 이상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곡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고 감동하다보니 연주회장 공간 전체에 곡이 만들어내는 아우라의 파장이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4곡이 끝나자 저도 모르게 '브라보'라는 소리가 튀어나오더군요. 1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거쉬인의 ‘3개의 전주곡에 이르서는 연주자가 연미복을 입고 나온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더군요. 정말 거쉬인이 활약하던 시절 뉴욕의 재즈 연주회에 온 듯 음악과 의상의 분위기가 잘 어울렸습니다. 둘째 곡에서 클래식 연주자들이 어려워하는 블루스의 끈적이는 느낌도 잘 표현되었고 특히 마지막 곡의 마무리에서는 연주자의 동적인 카리스마가 제대로 잘 발휘되었습니다. 1부가 끝난 순간에 이미 객석은 환호의 도가니였지요.

 

    휴식시간 후 2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연주자가 무대에 나타나는 순간 모두 놀랐고 이어 즐거운 환호를 보냈지요. 아름다운 붉은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나 1부와 대조되는 레퍼토리에 걸맞는 또 다른 무대 분위기를 만들었으니 정영하 선생에게는 타고난 무대감각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같습니다.

 

    미클로시 로자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변주곡, 작품 9가 처음 연주되었습니다. 요소요소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어 큰 기대를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충분히 만개되지 못한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마 이 날 연주 중 가장 저조한 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마지막까지 집중력 있게 음악의 맥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흔들린 탓이지요. , 그렇다고 형편없는 연주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날 연주 전반의 수준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아쉽다는 뜻이지요. 아마 제1부의 마지막을 흥분의 도가니로 마친 다음 2부를 처음 여느라 이 아름다운 곡이 다소 피해를 본듯 합니다. 우리나라 작곡가 우효진의 쇼팽에 헌정함은 한국 음악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곡이었습니다. 이 곡만 유일하게 암보로 연주하지 않았지만, 이미 많은 준비를 한 듯 안정적이고 편한 느낌을 주는 연주였습니다. 쇼팽 음악의 조각들을 오음 음계의 틀 안에 용해시키고 리듬을 변형하여 한국적 또는 동양적인 분위기를 만든 곡이어서 처음 듣는데도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지막 연주곡은 베토벤/리스트의 아델라이데. 연주회의 마지막을 이처럼 서정적이고 느린 곡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드문 경우인데, 아마 가곡 반주자로도 각광을 받고 있는 연주자의 지적이고 내면적인 성찰이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청중들 모두 곡이 뿜어내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였고 연주가 끝나자 열광하였습니다. 그것은 의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 정영하 선생의 연주가 뿜어내는 아우라, ()에 취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음악이 스며들며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드문 연주회였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전혀 없었다면 과장이겠지요. 그러나 세계적 연주자들의 실황연주에서 듣던 수준과 비교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프레이징 사이의 여백을 조금 더 자유롭게 처리하고(또는 호흡을 여유롭게), 에너지의 흐름을 조금 더 경제적이면서 결정적인 부분에 집중하면 더 위대한 연주가 만들어겠지만, 그 정도 아쉬움은 세계 유명 피아니스트들의 무대에서도 쉽사리 느껴지는 것이니 크게 비판받을 문제는 아닐 겁니다. 정영하 선생의 음악세계가 계속 고차원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매정하게도(?) 앙콜 연주 한 곡 없었지만, 오랜만에 정말 즐겁게 음악에, 연주에 심취하고 감동하게 만든 무대였습니다. 우리 주변 가까이에서 활동하는 좋은 연주자들의 독주회를 더 열심히 찾아다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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