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친구 집에 갔다가 소니 스테레오 카세트 플레이어에 헤드폰을 끼고 미클로시 로자의 ‘엘 시드’ 서곡을 듣게 되었다. 평소에는 전혀 들리지 않던 탬버린 소리가 너무도 생생하고 리드미컬하게 울려퍼지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의 오디오 업그레이드 꿈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세월은 흘러 사회 생활을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CD 전문매장을 둘러보다가 평소 꿈에 그리던 많은 명반들이 CD로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충동적으로 CD를 몇 장 덥석 구입했다. 그리고 미리 구입한 CD들을 듣기 위해 뒤늦게 인켈 CD-1195R란 CD플레이어를 장만했다. CD는 아날로그와 비교하면 쇳소리가 나는 듯 했지만, 소리가 열화되지 않고 사용하기 편리한데다 구하기도 쉬운 편이어서 순식간에 CD를 주감상매체로 삼게 되었다.
그 뒤, 차례로 장만한 것이 인켈의 인티앰프인 AI 7010, 그리고 이 앰프와 짝을 이루는 튜너, 카세트덱 등이었다. 스피커는 에어로 705로 정했다. 705는 중고역이 지나치게 밝고 쇳소리가 심해서 클래식 감상에는 적합하지 않은 스피커였지만 초보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당시에는 양껏 나와주는 저역에 일단 마음이 끌렸던 것. 예쁜 맛이 전혀 없고 소리의 무게감이나 저역의 밀도감도 부족했지만, 관현악이나 록을 들을 때 충분히 쏟아지는 저역의 양감이 훌륭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밀도감 없이 울려대는 저역의 부밍이 귀에 거슬려 이를 바로잡아보고자 전원향공의 스피커 스탠드를 장만했다. 그런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 들어봐도 소리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경험이 부족하거나 자기 성찰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특수한 체험을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바로 내가 그랬는데, 하베스 HL 5ES 스피커를 들여놓고 2년이 넘도록 적절한 스탠드를 장만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오류의 결과였던 것.
CD플레이어와 앰프 사이에 막선을 쓰다가 오디오플러스의 1만 5천 원짜리 인터커넥트 케이블로 바꾸고 나니 그야말로 극적이라고 할 만큼 소리가 달라졌다. 소리에 힘이 붙으면서 안 들리던 소리가 뚜렷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1m당 1만 원 하던 스피커 케이블의 경우엔 뚜렷한 변화를 느끼지 못했지만 소리가 좀더 또랑또랑해진 감은 있었다. 여하튼 그 뒤 오디오플러스의 5만 원짜리 인터커넥터도 써보았는데, 안정감과 해상력이 향상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세를 몰아 디지털 케이블도 구해서 비디오에도 연결해보았다. 하지만 이 경우는 별 효과가 없었다.
한편 이글의 스페셜 CD팩이란 독일산 인터커넥트 케이블은 짧아서 사용하기는 불편했지만, 저역의 양감이 늘어나면서도 밀도감 높은 고품위한 소리를 내주었다. 또 부드럽고 정숙하여 시끄럽지 않으면서도 해상력이 한결 좋아졌다. 플랫라인의 스피커 케이블 FL3M과 인터커넥트 케이블 매직 1은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지만 전송 속도가 매우 빨라서 그동안 소리를 가로막고 있던 장막이 걷히는 것처럼 투명한 느낌이 일품이었다. 매직 1이란 모델 이름처럼 요술 같은 일이었다.
이처럼 에어로와 인켈의 조합에서도 케이블의 놀라운 효과를 경험한 뒤로 케이블에 많은 투자를 하게 되었다. 적절한 케이블로 연결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이는 상상 외로 컸다. 특히 고품위 케이블은, 일정 수준 이상의 기기를 하이엔드처럼 만드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업그레이드할 때 기대 이하의 케이블에 비싼 돈을 투자한 데 따르는 손실, 볼품없어 보이는 케이블에 많은 돈을 투자할 필요가 있는지에서 오는 고민, 기기 교환시 비싼 케이블에 본체를 맞추어야 하는 제약(예를 들면, 상당히 고가의 바이와이어링 전용 케이블을 사면 바이와이어링 단자가 없는 스피커를 들여놓기가 주저되고, 밸런스 케이블에 많은 투자를 하고 나면 밸런스 단자의 유무를 따지면서 제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등등과 같은 문제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에어로 705 스피커를 4년 넘게 사용하다가 용산 전자랜드에 나가 오디오 잡지에서 극찬한 모델들을 찾아 이것저것 들어보았지만 의외로 마음에 드는 제품은 없었다. 마음에 들면 너무 비싸거나(아카펠라 비올론), 집에 두기에 너무 크거나(B&W 매트릭스 801) 하는 식으로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욕심내지 말고 음악성이 있고 균형잡힌 소리를 자연스럽게 내주는 적절한 크기의 스피커를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
하베스 HL 5ES와 콤팩트 7, AR 303A, 다인오디오 콘투어 1.8 MK2, 스펜도어의 SP 7/1, 셀레스천 300, 타노이 D 700 등이 최종 후보로 떠올랐다. 특히 AR 303A는 당시 거래 가격이 150만 원대 정도여서 다른 것보다 저렴했을 뿐더러 엄청난 소리를 들려줄 것 같은 기대심리마저 생겨서 우선 순위 1위로 정해두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스피커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워낙 소량이 수입된 탓인지 재고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재고를 확보하고 있던 세운상가의 한 숍에서는 박스를 뜯을 수는 없으니 그냥 사든가 말든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숍의 처지도 이해는 갔지만, 들어보지도 않고 스피커를 살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맞선도 보지 말고 무조건 혼인식부터 하라는 억지였다.
결국 AR 303A를 단념하고 나머지 스피커들을 비교시청해 본 결과, 하베스 HL 5ES가 내 취향에 가장 잘 맞았다. 콤팩트 7에 비해 관현악 재생에서 음장이 넓고 저역이 풍성한 HL 5ES를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HL 5ES는 다른 회사의 우락부락한 스피커들에 비하면 여성적이지만, 하베스 라인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스케일이 크고 저역도 깊고 풍성하여 남성적인 중후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베스 특유의 화사하고 달콤한 중역이 묻어나온다. 어떤 분들은 이 달콤함을 컬러레이션이라고 배척하지만, 내게는 음악성있는 소리로 들렸다. 모든 음악을 여유있고 푸근하게 들려주는 이 스피커의 표현력은, 콤팩트 7의 더 예쁘고 섬세한 음감을 포기하고서라도 얻고 싶은 원숙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HL 5ES(월넛 마감 초기 ES버전)의 트위터는 시어스의 알루미늄 돔형이고, 우퍼는 오닥스의 TPX 콘형이다. 그러니 하베스가 자체 개발한 알루미늄 돔 트위터와 레이디얼 콘 우퍼를 사용한 콤팩트 7과는 소리 성격에 차이가 있다. 콤팩트 7이 조금 더 밀도있고 풋풋한, 젊고 현대적인 감각의 소리라면, HL 5ES는 다소 무겁고 점잖은 구식 스타일의 소리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연스러운 균형감을 잃지 않아 음악성이 돋보이는 하베스 스피커의 장점은 어느 모델이나 동일하지만, 적당히 상냥하고 적당히 중후하면서 푸근하고 편한 HL 5ES의 구식 소리에 특히 마음이 끌렸다. 이러한 선택 배후에는 하급기와 가격 차이도 많이 나지 않으니 기왕이면 상급기를 쓰자는 속물 근성도 한몫했다. 이 스피커를 전원향공의 소형 스탠드 위에 올려 놓고 인켈 AI 7010 인티앰프에 물려서 들었다. 소리가 편하고 자연스러워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다만, 고역이 너무 억제된 것 같았고 저역의 양감이나 힘에서는 에어로 스피커보다 연약한 느낌도 들었다.
AI 7010에 HL 5ES를 물려 듣다가 앰프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당시 내 목표는 스피커를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음악성이 있는 인티앰프를 하나 고른 뒤 당분간 기기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겠다는 쪽이었다. 그래서 한 번 고르면 오래 쓸 만큼 튼튼한 놈으로 고를 생각이었다. 시행착오를 피하기 위해 하베스의 수입원인 리마케팅의 박 사장과 상담하니 파토스의 트윈 타워스를 추천했다. 힘이 모자라지 않겠냐고 하자, 그렇지 않을 것이나 만약 그게 문제라면 파토스의 파워앰프인 인파워를 써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가격이 스피커와는 너무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의아해하자, HL 5ES가 가격은 비싸지 않지만 의외로 잠재력이 많은 스피커라며 아주 잘 맞을 것이라고 자신있어 했다. 인켈 인티앰프를 쓰던 사람이 처음부터 고가의 분리형 앰프에 도전할 수는 없는 일. 그냥 수입원의 자찬으로 받아들이고, 내 나름대로 적절한 인티앰프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프라이메어의 모델 301은 소릿결이 섬세하고 예뻐 HL 5ES와 매칭이 잘 되었지만, 약간 힘이 모자라는 듯했다. 제프 롤런드의 콘센트라는 화사하고 고급스러운 소리여서 아주 잘 어울리는 매칭이었지만, 인티앰프로는 가격이 너무 비쌌다. 트윈 타워스는 독특한 미음(美音)이 돋보였지만 역시 가격이 만만치 않았고, 열도 많이 나고 무거운 걸 들여놓고 괜히 고생할 필요가 뭐 있나 싶어 멋대로 트집을 잡아 탈락시켰다.
그러다가 태광의 오너 A-90 인티앰프와 TCD-1 CD플레이어를 들여놓게 되었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선행 원인이 있었다. 하이파이 저널 리뷰에서 전성배 선생이 참 자연스럽고 좋은 소리라고 평한 글을 읽은 것이 그 하나요, 세운상가의 금강전자에 진열된 전시품을 보고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내부에 감탄한 기억이 그 둘이요, 어릴 때부터 일방적으로 주입받아온 국산품 애용 운동의 영향이 그 셋이다. 그럼 직접 원인은? 바로 앰프의 설계자인 김민 과장으로부터 적극적인 권유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제품은 오래 쓸수록 진가가 드러날 기기여서 나처럼 오디오를 자주 안 바꿀 사람에게는 적합할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너 A-90에는 몇 가지 약점이 있다. 우선 그 모양이 프라이메어 301을 흉내낸 것 같아 보기가 좋지 않다. 전기 사정에 따라서는 트랜스의 험 소리가 꽤 들리기도 한다. 에이징이 충분하지 않으면 소리가 뻣뻣하다. 그리고 전면 노브의 도금이 쉽게 탈색되는 편이다. 첫 번째 배달된 기기는 노브 중 하나가 금도금이 잘못되어 있고 파워 스위치가 정확히 자리 잡히지 않아 바로 돌려보냈다. 두 번째 물건은 앞 패널에 상처가 나 있어 다시 돌려보냈다. 세 번째 물건을 받아보니 역시 노브 중 하나가 금도금이 시원찮았다. 또 돌려보낼까 생각하다가 숍을 너무 괴롭히는 것 같아 국산품의 한계려니 생각하고 그냥 쓰기로 했다(그 뒤 이 노브만 탈색이 되지 않는 것으로 교체받았다).
그러나 개성없는 모양이나 트랜스의 험, 노브의 도금상태를 제외하면, 이 앰프가 내주는 소리는 과연이라고 무릎을 칠 만큼 정말 훌륭했다. 중후하고 선이 굵으며 음장이 넓다. 그런데도 소리가 맑다. 전체적인 튜닝은 밀도감 높은 중저역 위주로 되어 있어 묵직한 남성적인 소리임에도 선명하고 맑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특이하게 여겨졌다. 중고역이 강조된 선명함과는 차원이 다른 고품위한 소리이다. 전반적으로 안정감 있고 밸런스가 잘 잡힌 느낌이다. 특히 에이징이 될수록 부드러워지면서 자연스러움이 배가되었다. 적어도 6개월 이상 볼륨을 올려서 여러 장르의 음악을 꾸준히 울려주어야 뻣뻣함이 풀리면서 제 소리가 유연하게 쏟아져 나오는 앰프이다.
함께 구입한 TCD-1의 성격은 파악할 틈도 없이 이 앰프가 스피커를 장악하는 힘에 놀라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HL 5ES에서 상상하지 못한 강력한 사운드가 넘쳐 나오는 것이었다. 앰프에 포노단은 없었지만, 에밀레 포노스테이지 KPE-1을 통해 롯데 LP 2000 AD플레이어로 물려서 들은 아날로그는 놀라울 만큼 자연스러웠다. 어떤 소스를 울려도 좋았지만, 특히 재즈의 멋을 재생하는 데 탁월했다. 이 정도라면 이제 오디오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실내악, 특히 현악기의 섬세한 배음을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어딘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소리가 정직하고 건강한 것은 좋은데 뭐랄까, 약간의 감칠맛만 더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자꾸 생겼다. 관현악곡에서 좌우로 펼쳐지는 음장은 넓고 시원시원했으나 앞뒤 공간감 묘사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자주 듣다 보니 하이엔드 기기들에 비해 총주에서 악기가 약간 섞이는 듯한, 그야말로 사소한(왜냐하면 연주회에 가서 직접 들어보면 악기 소리가 섞이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쪽이 더 음악적인 울림인지도 모른다)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앰프의 장점에 따라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을 침소봉대하여 인식하고 만 것이다.
이것을 바로잡아 보겠다고 MIT의 터미네이터 2 인터커넥터를 CD플레이어와 앰프 사이에 연결하자 소리가 차분해지면서 입체적인 공간감이 잘 살아났다. 빈약한 모양과는 달리 가격 대비 성능이 아주 우수한 케이블이다. 이어 MIT 터미네이터 2 바이와이어링용 스피커 케이블을 결선해서 들어보니 바이와이어링 덕분인지 아니면 케이블의 속성 때문인지 트위터의 음량이 한결 커졌다. 그러나 음장이 넓어졌음에도 해상력이 향상된 느낌은 없었고 감칠맛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음의 속도감에서 플랫라인 스피커 케이블보다 둔탁하고, 또 고역이 산만해지는 것 같았다. MIT의 매뉴얼에는 2/2 법칙이라고 해서 처음 2일, 그리고 2주간 연속된 음악 신호를 넣어 생겨나는 변화에 관하여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 확인 작업은 굳이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분명히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지만, 경천동지할만한 변화는 아니었다.
내친김에 인터커넥터도 A-90의 밸런스 설계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하여 MIT 프로라인 밸런스 케이블로 연결했다. 이 케이블의 경우, 언밸런스 터미네이터 2보다 위상감이 좋고 저역이 더 조여지는 맛이 있지만, 해상력의 향상이나 음장감의 확산은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1997년 가을을 끝으로 기기에 대한 관심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계속>
● 음악은 소리와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다. 좋은 오디오는 그 들고 나감을 잘 재현하여 연주자들이 남긴 음악혼을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돕는 매개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오 세계에 제대로 들어가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고 근거없는 미신과 편견도 많다. 『하이파이저널』 제35호(1999)에 ‘하베스 HL 5ES 튜닝에 얽힌 사연들’이라는 제목으로 오래 전 실린 글을 나누어 싣는 이유는, 지금 다시 읽어보면 부정확하거나 설익은 생각이 보이지만, 숱한 시행착오의 과정을 돌아보며 음악재생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수록된 오디오 사진은 주로 하이파이 저널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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