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로 통일된 케이블 라인 중에서 이제는 MH 750 바이와이어가 상대적으로 그레이드가 떨어져 이런 문제가 생겼을지 모른다는 전형적인 순환적 사고에 빠졌다. 그리하여 이 과장으로부터 카다스 골든 크로스 바이와이어 스피커 케이블을 빌려다 들어보았다. 야콥 가데(Gade)의 로맨틱한 탱고 ‘질투’(MARCO POLO/ dacapo 8.224090)를 들어보니, 바이올린 독주 소리가 MH 750 바이와이어보다 더 자연스럽고 선명했다. 전체적으로 소리가 어둡게 느껴진다. 특별히 해상력이 강조된 것도 아닌데, 들릴 소리가 다 들리고 고역과 저역이 위 아래로 시원시원하게 잘 뻗어 나온다. 음의 대역이 아주 넓었다. 저역은 놀랄 만큼 깊숙이 아래로 내려가지만 부밍 현상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하루가 지나자 소리의 윤곽이 더 잘 잡혔다. 이미 에이징이 된 케이블이지만, 연결된 스피커와 앰프가 바뀌자 다시 에이징이 필요한 것 같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어두운 소리가 아니라 극도로 정숙하다고 말해야 옳을 것 같았다. MH 750 바이와이어도 정숙했지만 골든 크로스 바이와이어는 그 이상이었다. 정숙하면서도 선명했다. 가장 큰 장점은 악기 소리 사이에 요철이 생겨나면서 음악을 음악답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소리에 탄력이 붙고 음악적 뉘앙스가 풍부해지면서도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음장이 넓은 게 장기라는 MH 750 바이와이어의 음장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이 있는 음장이 만들어졌다. 다만 저역의 균형감이나 밀도감은 MH 750 바이와이어도 밀리지 않는 듯했다. 하여튼 골든 크로스 바이와이어를 통하여 나오는 음악은 소리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워 아무리 들어도 질릴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촉촉한 물기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전체적으로 소리에 유연함을 더했다. 특이한 것은 스피커의 뒷면으로 나오는 소리는 MH 750 바이와이어보다 탁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왜 그럴까 하고 자세히 들어보니 스피커 앞면으로 나가는 소리의 직진성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 같았다. 전혀 쏘거나 강한 느낌이 없으면서도 귀에 쏙쏙 와서 스며드는 맛은 아주 일품이었다. 정말 뛰어난 케이블이었다. 한편 비교를 위해 다시 빌려온 실텍 4-56 인터커넥트 케이블은 오너 A-90 때와는 달리 클라세 시스템에서는 MIT 350 프로라인 트윈보다 못한 것 같았다. 실텍의 투명하고 샤프한 소리가 청명한 클라세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 MIT 케이블의 점잖고 따뜻한 음색이 오히려 클라세의 청명함을 보완하는 탓인지 350 프로라인 트윈이 전반적으로 더 자연스럽고 편한 느낌을 주는 소리였다.
하여튼 케이블도 전체 시스템의 매칭에 따라 평가를 달리 받을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쯤되자 카다스 골든 크로스 스피커 케이블을 들여놓고 싶은 유혹이 생겼지만, 워낙 뜻하지 않게 이것저것 바꾸느라 부담이 되었고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지 확신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동안 봉사해온 MH 750을 헐값에 내놓기도 싫었다. 다시 MH 750을 결선해보니 역시 소리의 대역폭이나 정숙성, 자연스러움에서는 골든 크로스보다 한 수 아래이다. 그러나 MH 750의 소리는 그것대로 짜임새가 있었고 에너지감이 있어 건강하고 균형감이 좋았다. 모든 점에서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업그레이드 충동을 참을 만했다. 그리하여 카다스 골든 크로스 바이와이어 케이블을 사용하는 것은 장래의 희망으로 남겨두기로 결심했다.
오디오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스피커를 바꿔야 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일이 있다. 이렇게 고민할 것이라면 스피커를 못 바꿀 이유도 없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베스 HL 5ES를 내보낼지 말지는 새로 들여놓을 스피커의 가격을 보고 천천히 결정하기로 하고 말이다('하이파이 저널'에 실렸을 때에는 이 대목 이후에 "드디어 HL 5ES를 평생 쓸 고집을 포기하기로 했으니 업그레이드 욕망의 집요함은 끝이 없는가…"라는 신파조 문장이 추가되어 있는데, 이것은 편집부가 임의로 집어 넣은 것이다). 파라곤의 리젠트와 틸(Thiel)의 스피커를 비교시청했는데, 리젠트가 선이 굵은 남성적인 소리라면 틸은 여성적인 섬세함이 돋보였다. 그러나 어느 것도 결정적으로 내 취향은 아니었다. 다인오디오의 콘투어 시리즈도 몇 가지 들어보았다. 아주 청명한 소리였지만 HL 5ES를 내보내면서까지 맞아들일 만큼 내 귀를 잡아끌지는 못했다. 크기나 가격에서 마땅한 스피커가 나오지 않아 고민하던 중에 ‘하이파이저널’ 최 국장으로부터 아방스 델타 3이라는 스피커를 한 번 들어보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나이가 10살 가까이 된 스피커여서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고수 분이 추천하는 스피커니 들어보고 싶어졌다.
덩치에 비하여 꽤 무거운 이 스피커는 낡은 바이와이어링 단자를 산화된 짧은 줄로 글라이딩시켜 놓은 상태로 배달되었다. 먼저 글라이딩 케이블을 빼내고 MH 750 바이와이어의 스페이드를 바이와이어링으로 결선하였다. 악기들의 화려한 음색이 돋보이는 자이벨 지휘, 뉘른베르크 심포니가 연주하는 로자의 ‘정글 북’(Colosseum CST 34.8044)을 들어보니 평소 잘 들리지 않던 비올라 파트가 생생히 부각된다. 음장이 뒤로 넓게 자리잡으면서 모든 악기 소리가 구별될 정도로 해상력이 좋다. 음색은 하베스보다 밝으며 건강하다. 좁은 방 안이어서인지 저음도 강력하고 밀도있게 나와주었다. 앞뒤 좌우 거리나 바닥면 등을 고려하지 않고 대충 놓고 들었는데도 이 정도이니 세팅을 제대로 하면 상당한 실력을 발휘할 것 같았다.
이블린 첸이 피아노를 맡은 로자의 피아노 협주곡 제1악장(Koch 3-7402-2! )은 팀파니의 연타 모티브가 점점 강하게 고조되면서 시작되는데, 그 팀파니가 뒤에서 앞으로 달려오는 듯한 거리감이 극적으로 살아났다. 바이와이어링의 효과로 중고역과 저역이 명료해지면서 힘이 넘쳤다. 스피커 단자를 WBT로 교체하여 그냥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주일간 듣다가 하베스 HL 5ES로 바꿔 잠시 들어보니 확실히 어둡고 탁하다. HL 5ES를 내보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델타 3과 함께 둘 공간도 마땅치 않아 HL 5ES와 이별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아 일요일 오후에 날을 잡아 한 번 본격적으로 비교 시청을 해보았다. 시청한 결과는 뜻밖이었으니 귀라는 것이 간사하기 이를 데가 없다. 자세히 들어보니 아방스 델타 3은 해상력이나 공간감, 저역의 파워감에서 장점이 많은 우수한 스피커였지만, 전반적인 자연스러움과 균형감은 하베스 HL 5ES 쪽이 내 취향에 더 맞는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기기 교환에서 자주 저지르는 실수는, 자기가 들어오던 기기의 단점이 보완된 기기라면 일단 좋게 보는 데에 있다고 하지 않은가. 나도 같은 실수를 할 뻔한 셈이다. 결국 정이 들 대로 든 HL 5ES로 다시 돌아오니 마음이 그리 편했다. 자고로 조강지처를 버린 놈치고 잘 되는 놈 없다지 않은가. 그리하여 아방스 델타 3을 내보내기로 하고 고 사장에게 스피커를 실어가는 길에 타이스 파워블록 시그너처 3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무슨 생각에서 그때 갑자기 파워블록을 주문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잠재의식 속에 있던 파워블록에 대한 욕망이 충동적으로 분출된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비오는 일요일 늦은 오후 갑자기 우리 식구가 된 그 파워블록이 놀라운 기적을 가져다주었다.
타이스 파워블록 시그너처 3은 최소한 60시간 이상 에이징이 필요하다고 매뉴얼에는 적혀 있다. 그러나 전원을 꽂자마자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말해 충격적이었다. 소리를 둘러싼 공기가 아주 깨끗하게 정화된다. 이 청명한 공기감으로 인해 악기들의 음색과 질감이 리얼해진다. 악기들의 소리가 섞이지 않으면서도 인위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조화롭게 울린다. 소리가 정숙해졌으면서도 아주 또랑또랑하다. 스피커의 저역에 약간 남아 있는 듯하던 부밍감도 거의 사라져 하베스 인클로저 고유의 통울림이 자연스러운 음악적인 소리임이 확실해진다. 소리의 에너지나 파워감이 좋아짐은 물론이고 소리 하나하나에 탄력이 붙어 발랄하고 건강하게 약동하는 것 같다. 해상력도 증가되고 소리의 요철이 보인다. 그동안 얼마나 전기 잡음이 섞인 혼탁한 소리를 듣고 있었는지 놀랄 정도이다. 시끄러운 듯한 느낌이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명료해지고 맑아지니 아무리 오래 음악을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현악의 미세한 배음이 잘 살아나는 것은 물론이고 피아노의 선명도도 아주 탁월하게 개선된다.
사라 데이비스 뷔크너가 연주한 로자의 피아노 전곡집(Koch 3-7435-2)은 그 탁월한 해석과 연주에도 불구하고 야마하 피아노의 음향이 둔탁하게 느껴졌었는데 타이스 파워블록이 들어온 뒤에는 야마하 피아노의 음향 특성이 느껴지는 듯하다. 대편성 관현악을 들을 때는 스피커의 역량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스피커의 한계라고 생각되었던 많은 문제들이 사라지니 음악 듣기가 그렇게 기분좋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매연을 마시고 있다가 사람이 전혀 없는 산속 깊숙이 앉아 맑은 공기를 마시는 느낌이라고나 해야 할까. 다른 기기들이 저마다 자기가 잘났다는 식으로 개성을 자랑한다면, 타이스 파워블록 시그너처 3은 모든 오디오 기기들을 똑같이 훌륭한 존재로 돋보이게 만드는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고민해 온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되었다. 그야말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 기기가 들어오니 전원 케이블을 말끔히 정리하기도 좋았다. 다만 아쉽게도 기계적으로(스피커를 통해서가 아니라) 트랜스 소음이 약간 발생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밖에는 아무런 문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여튼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고 직접 경험해보시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오디오의 음악신호가 결국 전기라는 것,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성서의 진리가 오디오에도 그대로 들어맞음을 확인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스탠드 댐핑재와 소리 변화
파워블록을 들여놓은 뒤 현저하게 소리가 개선되자 이제는 음악듣는 시간이 한없이 즐거워졌다. 다만 작은 자갈에서 큰 자갈로 내용물을 바꾸고 나서 중량이 줄어든 스탠드에 조금 더 무게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소리와는 무관하게 생겼다. 내 스탠드는 기둥 안의 댐핑재를 마음대로 갈 수 있도록 나사로 아랫부분을 열 수 있게 개조된 것인데, 한쪽을 열어보고 다시 닫는 과정에서 나사가 망가져 완전히 조여지지 않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다시 권 사장에게 도움을 청하니 청계천에서 납알을 20kg 정도 구입하여 왔다. 스탠드 속의 자갈을 일부 덜어내고 납알을 스탠드 양쪽에 각 7kg 정도씩 채워 넣었다. 스탠드 안에 여분을 두는 게 어떻겠냐고 하자 권 사장은 이 정도 채워도 위에 약간의 여분이 생기니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언뜻 들어보니 무게가 제법 나간다. 스피커가 물리적으로 안정감있게 자리를 잡는 것이 느껴진다. 크리스티안 셰퍼가 부른 슈만의 가곡집(Hyperion CDJ33101)을 들어보았다. 소리의 무게 중심이 밑으로 내려앉으며 가수의 목소리가 더 안정감있게 들린다. 케니 G의 색소폰은 시원시원하게 나오면서도 저역에 무게가 생긴다. 호세 카레라스가 부르는 라미레스의 ‘미사 크리오자’도 아주 좋다.
권 사장이 간 다음 이것저것 꺼내 듣기 시작했다. 버너드 허만의 ‘이아손과 아르고호 용사들’(Intrada MAF 7083)은 소닉 스펙터큘라를 경험할 수 있을 만큼 거대편성의 관악기와 하프, 타악기로만 이루어진 멋진 음악이다. 처음 팀파니의 타격음이 단단하게 울려퍼졌다. 건조한 음향 탓에 너무 단단한 것이 아닌가 했지만, 그런대로 들을 만했다. 문제는 본격적으로 다른 관현악곡을 들으면서 시작되었다. 로쟈의 피아노 협주곡과 첼로 협주곡, 허만의 ‘현기증’,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등의 관현악곡을 들으니 저음이 단단하다 못해 경직된 것 같다. 에이징을 기다리기 위해 이틀 동안 들어보았는데도 관현악에서는 하베스의 통울림이 자연스럽게 감쇄되지 못한다. 아무래도 저역이 지나치게 단단하여 경직되어 있다. 아무래도 스탠드 내부에 빈 공간을 조금 더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스탠드를 열어 납알을 양쪽에서 150개씩 꺼내었다. 확실히 경직된 느낌은 줄어든 것 같았지만, 약간 여진이 느껴지고 중량감이 부족하다. 다시 스탠드를 열어 이번에는 자갈 쪽을 덜어내고 덜어냈던 납알을 모두 다시 채워 넣었다. 빈 공간을 만들면서도 중량을 적당히 잡기 위해서는 이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밑판 구멍으로부터 약 4cm의 빈 공간을 만들었다. 더 빈 공간을 만들고 싶었지만 중량이 너무 줄어들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납구슬로 아예 바꾸는 방법도 가능하겠으나, 납구슬의 금속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자갈과 같은 자연스러운 공명이 사라질 것 같았다. 스탠드 하나에 약 17.5kg의 중량을 유지한 상태에서 세팅을 하자 저역의 경직된 면이 많이 사라졌지만, 납알 때문인지 자갈만 들어 있을 때보다는 자연스럽지 않다. 에이징을 시켜보자고 마음먹고 며칠 계속 들어보니 대체로 이만하면 안정된 중저역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딘가 납알 성분이 음악의 중저음을 딱딱하게 하는 듯한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또다시 스탠드를 열었다. 이번에는 자갈-납알-자갈-납알-자갈, 이런 식으로 이질적인 재료를 적당하게 교차시켜 채워넣어 보았다. 납알을 최대한 분리하여 전체 소리의 울림을 납알이 규정짓지 못하도록 방지함으로써 자갈만 채웠을 때의 장점을 그대로 살린다, 자갈과 납알이 섞이면 틈이 더 잘 생겨 스피커의 통울림이 자연스럽게 감쇄될 것이다, 그리고 납알의 무게로 충분한 중량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멋대로의 발상에 따른 어설픈 시도였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로 괜찮았다. 충분한 양과 질을 지닌 저역이 자연스럽게 깔린다. 경직되거나 부자연스러운 느낌은 없다. 저역이 적당한 여운을 남기면서도 지나치게 밑으로 깔리지 않아 듣기 편하다. 전체적인 음상이 깔끔하고 밀도감이 있다.
하베스 HL 5ES는 통울림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그것을 일정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감쇄시키는 인클로저를 사용한 스피커이다(사진은 슈퍼 HL5). 이것을 하베스에서는 수퍼 튠드 스트럭처라고 부르는가 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스피커는 스탠드에 무척 민감하다. 자연스러운 진동의 흐름을 잘 활용하는 것도 하베스 스피커를 잘 울리는 중요한 변수 중의 하나이다. 내 경험을 요약하면 이렇다. 스탠드 상판 즉 스피커 밑에 금속성 스파이크를 쓰게 되면, 부밍은 어느 정도 잡힐지 모르지만 중저역이 경직된다. 이 스피커는 통울림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튜닝하여야 하지 통울림을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된다. 목재 스탠드의 상판 위에 얇은 방진 고무를 네 조각 붙이고 그 위에 놓는 것이 금속 스파이크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러웠다. 스탠드 내부를 자갈이나 모래로 완전히 꽉 채워 빈틈이 없게 하는 것은 이 스피커의 자연스러운 중고역을 억누를 위험이 있다. 그러니 약간의 빈틈을 만들거나 사이사이 공간이 어느 정도 생길 수 있는 댐핑재를 사용하여 공진이 자연스럽게 소멸되도록 하는 것이 좋은 듯하다. 스탠드 속에 빈틈이 없을 경우 울림이 자연스럽게 감쇄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 되면 소리가 이상하게 억눌려 전체 인클로저의 울림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바우하우스의 스피커 스탠드는 모양이나 마감이 하베스 스피커와 잘 어울리고 가격 대비 성능이 매우 좋지만, 정밀하게 소리 튜닝을 하거나 품질검사를 거쳐 판매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밑판 구멍도 없이 배달되어 온 것을 보면, 다소 회의적이다. 좋게 말해 장인의 직감으로 잘 만들어진 작품이고, 나쁘게 말하면 모양과 중량을 대충 맞추어 만든 목공예 제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스탠드는 우수한 스탠드의 필요 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는데다가 튜닝에 따른 변화가 커서 오디오하는 즐거움을 맛보기에는 좋다. 충분조건은 사용자 스스로 하판의 구멍이나 내부 재질의 종류, 비율, 중량을 조정함으로써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스탠드는 밑판을 아예 나사로 열 수 있게 개조하여 준 것이지만 다른 모델도 그렇게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아쉬운 점이 몇 가지 더 있다. 우선 밑 부분 스파이크의 조정도 위쪽에서는 할 수 없어 편하지 않다. 또한 스파이크의 굵기가 스탠드 및 스피커 전체의 중량을 견디기에는 다소 부족한 느낌도 든다. 나아가 스탠드 밑판 쪽에 무거운 재질을 넣어 중량에 구애받지 않고 기둥 내부의 댐핑재 비율을 자유롭게 하도록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사실 바우하우스의 스탠드를 완성품 자체로 높이 평가하기에는 주저되는 점이 있지만, 하베스 HL 5ES와 어울려 나타난 그 잠재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사용자의 세심한 배려와 세팅이 따른다면 그만큼 가격 대비 성능이 뛰어난 스탠드도 달리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앰프나 케이블, 스탠드에 대한 업그레이드 욕구는 거의 사라졌고 음악듣기에만 열중할 수 있게 된 터에 최 국장의 배려로 실바톤 C-103 진공관 프리앰프와 300B 91BN 파워앰프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 이른바 J이사 프리로 알려진 이 프리앰프는 배터리 구동형으로 설계되었는데, 거대한 배터리 박스에 비하여 본체가 간소하다. 이들 앰프의 설치를 위해 최 국장이 진공관 앰프 전문가이자 저항과 콘덴서를 운영하는 정상규 사장을 대동하고 왔다. 먼저 J이사 프리앰프를 설치하여 클라세 CA-300에 물렸다. 밸런스 단자가 없어 DA컨버터나 파워앰프 양쪽을 모두 오디오노트의 언밸런스 케이블로 연결했다. 처음 듣는 순간부터 소리의 변화는 극적이라고 할 만큼 놀라웠다. 중고역이 아주 예쁘면서도 해상력이 극도로 좋았다. 음역이 아래 위로 확장되었고, 음장도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귀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듯한 촉감은 절묘하다. 소리의 개방감과 직진성은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했다. 피아노 건반을 구르는 사라 데이비스 뷔크너의 손 움직임은 물론이고 악기 울림의 미묘한 변화가 정확히 느껴질 정도였다. 통상 진공관 앰프에서는 중저역이 풀어지는 경향이 많은데, J이사 프리는 저역의 밀도감에서도 밸런스로 연결된 클라세 CP-60에 뒤지지 않았다. 소리가 전혀 지저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정돈되어 있다. 마치 소리가 물처럼 깊숙이 몸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뤼미오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셋째 악장 시칠리안에서는 현의 이음새가 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배음은 물론이고 홀의 공간감이 절묘하게 포착된다. 자비에 쿠가나, 멘데즈가 연주하는 라틴 음악에서도 소리가 앞으로 쏟아져 나온다. 힘도 아주 좋다.
다시 클라세 CP-60으로 바꿔보니 저역의 밀도감이나 균형감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중고역이 딱딱하고 홀의 울림이 경직되게 들리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특히 바이올린 소리의 자연스러움은 도저히 J이사 프리를 따를 수가 없었다. 레베카 피존을 들으니 목소리가 10년은 더 젊어지면서 음악의 속도가 무척 빨라졌다. 마사키 스즈키가 지휘하는 바흐의 칸타타 제4번은 뛰어난 합주력과 자연스러운 녹음이 돋보이는 앨범(BIS CD 751)으로, 마치 천상의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소리가 술술 쉽게 풀려나온다. 클라세 파워앰프를 완전히 장악하는 J이사 프리의 위력에는 감탄 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총평하면, 소리가 맑고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음악적 온기를 안고 있고 무엇보다 귀에 촉촉하게 스며든다. 소릿결도 매끄러우면서도 심지가 있다.
이번에는 J이사 프리에 300B 파워앰프를 물렸다. 오디오노트 선을 사용한 언밸런스 연결이다. 저역의 에너지감과 시원시원한 음장의 펼쳐짐은 사라졌지만, 도취적인 미음(美音)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다. 이런 소리라면 하루종일 음악만 들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다. 클라세 CA-300에 비교하면 관현악곡이나 피아노를 들을 때 힘이 떨어지고 음장이나 디테일에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300B의 현악 표현력은 기가 막혀 실제 현악기의 소리보다 더 고혹적이다. 극도로 탐미적인 소리에 정말이지 중독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이런 소리로 현만 듣는다면 다른 앰프로는 현악을 다시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설치상의 문제로 인해 트랜스의 험이 유도잡음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클라세 CP-60의 리모컨과 다양한 기능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는 이들 진공관 앰프를 계속 듣는 것이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보호회로도 내장되어 있지 않아 온/오프 스위치를 건드리면 바로 스피커에서 퍽 소리가 나는 점도 싫었다.
이번에는 가라드를 장착하여 바우하우스에서 특주제작한 AD플레이어의 시청이다. 오르토폰 SPU G 타입 카트리지를 장착하였고 포노스테이지는 파토스 인더그루브이다. 톤암의 높이를 제대로 맞출 수 없는 악조건 속에서 시청했는데도, 토렌스 TD520 플레이어와 비교하여 극도의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토렌스 TD520과 SME 3012R 톤암, 오르토폰 540 MM 카트리지, 에밀레 포노스테이지로 듣던 나의 아날로그가 점을 갖다 붙여 만든 선이라면 가라드는 그냥 잘 그어진 선 그 자체라고나 할까. 전자가 고체라면 후자는 액체이다. 그동안 잡지에서 흔히 보이던 디지털을 압도하는 아날로그라는 표현에 내가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가라드와 같은 턴테이블을 경험하지 못한 탓이리라.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톤암이 제대로 설치가 안 되어 지금 듣는 가라드 소리는 평소의 10분의 1도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상태라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럼 가라드의 실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이번엔 토렌스 TD520에 SPU G 카트리지를 장착하고 파토스 인더그루브에 연결하여 들어보았다. 조건을 유사하게 하니 그 차이가 다소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본질적으로 토렌스 TD520으로는 가라드의 부드러움은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도 가라드가 10분의 1의 실력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다만 중저역의 중후한 파워감은 TD520도 괜찮았다. 바우하우스에서 만든 몸체도 아주 견고하여 어지간한 진동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무늬목의 마무리도 정교하고 아름다워 이 회사의 LP 래크나 CD 래크에서 간혹 보이는 규격의 불일치나 거친 마감과 같은 단점은 전혀 없다.
설치상의 제약으로 J이사 프리의 배터리 충전기를 파워블록에 올려 놓았다. 타이스 파워블록 시그너처 3의 트랜스가 영향을 받은 탓인지 제 성능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클라세 CP-60 프리에서 소리가 안 나거나, 접지 불량으로 턴테이블의 톤암에 전류가 흐르거나, 앰프의 충격음이 스피커에 유입되는 등등의 갖가지 불상사가 발생한다. 그러다가 초호화판 시스템들을 내보내고 나니 아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역시 모자라도 내 식구가 최고다. 이렇게 좋은 것을 뭘 더 바라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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