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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베스 HL 5ES 튜닝에 얽힌 사연들 2

오디오

by 최용성 2009. 7. 15.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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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따라 강남가다

    『하이파이저널32호의 글에서 이문철 과장은 내가 자신을 클래식과 오디오의 바다에 빠트렸다고 단언하고 있지만, 적어도 오디오의 업그레이드에 관한 한 사실은 정반대다(이처럼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착한 사람들 사이에도 분쟁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 법률가들이 먹고 사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오로라 사운드의 프리앰프를 들으러 가자는 그의 전화가 없었더라면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1998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신문에 난 진공관 앰프를 들어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들어만 보는 데 무슨 문제가 있으랴 싶어 따라 나섰다. 저녁 늦게 댁을 찾아가는 결례를 범하였는데도 한상응 사장은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불칸이란 인티앰프와 오로라 프리앰프, 그리고 모델명은 기억할 수 없는 파워앰프 등의 시제품과 B&W 실버 시그너처 스피커가 작은 방안에 간소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먼저 불칸 인티앰프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고급스럽고 독특한 소리였다. 정갈하면서도 직진성이 좋았고 앞뒤의 공간감이 잘 묘사되는 것이 A-90과는 달랐다. 오로라 프리앰프와 파워앰프를 들으니 소리의 입체적 효과는 한층 증가되어 앞뒤 거리감은 물론이고 가수가 정확히 제자리를 지키며 정감있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실체감 있게 다가왔다. 다른 진공관 앰프에서 흔히 경험하던 험이나 잡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어떤 소스를 걸어도 음악성이 풍부하고 실체감 있는 소리가 나왔다. 약간 어두운 듯한 음색이었지만, 아마 극도로 정숙해서 귀를 자극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첫인상이었을 탓일 것이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세부 묘사가 아주 좋았다. 나는 값비싼 기기는 가지지 못했어도 이런 저런 기회에 고급기들을 들어볼 기회가 꽤 있었는데, 그동안 들어본 값비싼 외제 앰프들에 비하여 결코 뒤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나은 듯했다. 무척 고품위한 소리였고 개성이 뚜렷했다. 아주 훌륭한 기기라는 데에 이 과장과 내 생각이 일치했다. 이 과장은 마음에 들어했지만 중고로 내놓을 때의 손실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내가 이 과장에게, “금강전자에 알케미스트 분리형 앰프가 있는데 소리가 괜찮고 가격도 싸니 한 번 들어보라구.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오로라를 들여놓고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안타깝게 요절한 코지안이 남긴 녹음 중 가장 대중적인 이 음반이 당시 오디오의 대편성 관현악 재생 음향을 테스트하는 레퍼런스였다

 

    이 과장과 함께 서초동 금강전자에 나가 알케미스트 포세티 APD 21A SS 프리앰프, 포세티 20A 파워앰프를 B&W 매트릭스 801 S3에 물려서 들어보았다. 801은 무색무취의 정직한 스피커이다. 매우 우수한 스피커이지만 나는 그 화장기 없는 밋밋한 울림에서 그리 매력을 못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알케미스트 앰프는 801에게 화장하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화장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소리가 아주 예뻐져 악기들의 울림이 귀에 착착 달라붙는 것 같았다. 울리기 힘들다는 801의 저역도 여유있게 나와 주었다. 코지안이 지휘하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제4악장과 제5악장이 금강전자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만하면 어떤 스피커라도 잘 울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스피커와 앰프를 그대로 우리집에 들여놓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 과장은 며칠간을 알케미스트와 코플런드, 오로라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은 알케미스트로 결정을 보았다. 알케미스트가 이 과장 집에 들어간 날, 당연히 낭보가 날아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과는 뜻밖에도 비보였다. 헤일즈 스피커의 우퍼가 꼼짝도 하지 않고, 소리의 스피드만 빨라져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일단 에이징을 기다리고 케이블로 다스려 보자고 말했으나 이미 이 과장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뒤 이 과장이 알케미스트 대신 들여놓은 크렐 파워앰프 FPB 200의 소리가 너무 뻑뻑하다고 하기에 내가 쓰던 MIT 터미네이터 2 바이와이어링을 가지고 그의 소리를 들으러 갔다. 케이블을 연결하자 밀도있고 당당하며 넓고 깊은 사실적인 음장이 펼쳐졌다. 관현악의 해상력이 극히 좋으면서도 인위적이지 않고 소리 하나하나에 강력한 에너지와 풍부한 음악성이 묻어나왔다. MIT 케이블들을 거기 남겨둔 채 집에 돌아오니 어딘가 모르게 허탈한 기분이 엄습했다.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나의 오디오 업그레이드의 욕망이 아마 그때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과장에게 MIT 케이블들을 압수당한 뒤 이 기회에 상급기인 MH 750 바이와이어링을 한 번 써보기로 했다. 앰프와 스피커 사이에 연결하고 들어보니 터미네이터 2와는 차원이 다른 놀라운 변화가 생겨났다. 같은 볼륨에서도 음량이 커져 힘이 넘치면서도 아주 정숙하고 부드러웠다. 디테일이 살아나면서 전체적인 음상과 균형이 잘 잡혀지는 것이었다. 음장이 넓어지면서 생겨나는 공간감의 묘사는 극적이라고 할 만한 변화였다. 악기의 질감은 물론이고 평소 귀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던 악구의 뉘앙스까지 잘 살아났다. 특히 앰비언스의 묘사는 아주 탁월했는데 중저역의 양이 늘어나면서도 밀도감이 좋은 것이 고급기다웠다. 모든 음악이 맛깔스럽게 들리는 것이 앰프를 바꿀 때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두 개의 플레이어

    이문철 과장이 업그레이드를 하면서 내놓은 사이러스 DAD 7 CD플레이어를 금강전자에서 빌려왔다. 이 작고 볼품없는 CD플레이어는 뜻밖에 개성이 분명한 명기였다. 전체적으로 중용적인 성격의 음색이고, 특히 중저역은 깊이감과 품위가 있다. 소리의 요철이 드러나는 듯한 세부 묘사력은 숙성된 아날로그 사운드와 같이 자연스럽다. 정돈되어 들리면서도 인위적인 매끄러움이 전혀 없고 에너지감이 풍부했다. 결국 TCD-1을 내보내고 이 제품을 들여놓았다. 이 기기 전면의 표시창은 고급 기기에서도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기능의 멋진 디스플레이를 선보이고 있는데, 특히 곡의 진행 정도를 도형으로 표시한 부분은 아주 멋졌다. 이 과장이 실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놓긴 했지만 언젠가 다시 들여놓으려고 하는 연유를 이해할 만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총명하고 빼어난 기기가 이고르 그루프만이 연주한 로자의 바이올린 협주곡(KOCH 3-7379-2)을 제대로 재생해내지 못했다. 몇 개의 CD에서 에러가 발생하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내가 즐겨듣는 앨범들이었다. 금강전자 고명섭 사장과 상의하자 마이크로메가의 듀오가 나와 있으니 한 번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트랜스포트 역시 마이크로메가의 듀오 CD3.1이고 컨버터는 프로 2였다. 여기에 익소스의 디지털 케이블을 연결하고 들으니 화사한 중고역의 표현력이 음악적이고 클래식에 잘 어울렸다. 그러나 기본 실력은 CD에 따라 사이러스 DAD 7과 막상막하였다. 특히 재즈나 록 음악에서는 사이러스의 표현력이 더 좋았다. 같은 시기에 오너 TCD-2와 와디아 23 플레이어도 함께 빌려다 들어보았는데, 오너와 와디아는 소리의 경향이 아주 비슷했다. 오너나 와디아는 파워감이나 해상력만은 상당히 좋았지만, 내게는 어딘가 소리에 알갱이가 없고 인위적이란 느낌이 앞섰다. 그리하여 사이러스와 마이크로메가를 둘 다 두고 듣기로 하였다. 두 기기가 개성이 뚜렷하여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관계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하베스로 : 두번째 HL 5ES   

   어느 날 갑자기 HL 5ES의 한쪽 우퍼가 이상해졌다. 피아노의 포르티시모 타격음에서 소리의 끝이 갈라진다. 수입원에 전화를 하여 AS를 받을 수 있냐고 묻자 우퍼의 재고가 없으니 청계천 세운상가에 있는 기술자를 찾아가서 고치란다. 그래서 스피커를 구입한 용산전자 삼성사 박 부장에게 연락하자 직원을 바로 보내주어 스피커를 실어갔다. 며칠 후 박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쳐오기는 했는데, 원래의 소리가 아닌 것같아 바로 가져다주지 못하겠다는 소식이었다. 마침 일이 너무 바빠 도저히 용산에 갈 형편이 안 되기에 이 과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음씨 좋은 이 과장은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황금같은 일요일 시간을 내어 삼성사에 나가서 듣고는 그 스피커를 다시 들여놓을 수 없겠다는 내용의 전화를 해주었다. 황금귀가 말하는 것이니 새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전혀 뜻하지 않게 스피커를 바꾸게 되었다.

 

    날을 잡아 이 과장과 함께 용산 삼성사에 나가 여러 스피커들을 들어보았다. 크기나 가격이 적정한 것들 중에는 어떤 스피커도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스피커 구입 당시 박 부장이 ‘HL 5ES를 쓰다가 다른 스피커로 업그레이드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한 예언이 적중한 셈이다. 이 과장은 하베스 LS5/12를 추천했다. 이 스피커는 다인오디오 유닛을 사용하여 만든 신세대 모니터로, 앰프만 제대로 물려주면 공간을 완전히 장악할 정도로 작은 거인이지만, 음색도 어딘가 하베스답지 않을 뿐더러 81.5dB밖에 안되는 감도를 어느 앰프가 당해낼 수 있으랴 싶어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통상 오디오파일들이 결코 하지 않을, 아주 기이한 선택을 하고 말았다. 다시 하베스 HL 5ES를 들여놓기로 한 것이다. 다만 이번 것은 초기에 수입된 월넛 무늬목 마감이 아니라 나중에 수입된 체리 무늬목 마감의 제품이다. 예전에 체리 무늬목 제품이 숍에 진열된 것을 보고 이걸로 바꾸면 좋겠다고 말한 일이 있는데, 그 말이 씨가 된 것일까. 여하튼 이런 연유로 나의 하베스 HL 5ES는 원래의 월넛 무늬목 제품 가격에 새 체리 무늬목 제품에 대한 차액을 더한 고가의 스피커가 된 셈이다. 하베스의 앨런 쇼가 이 사실을 안다면 감사패라도 증정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시리얼 넘버가 300번대를 넘어가는 체리 무늬목은 월넛 무늬목보다 색감이 보기 좋고 부드러운 인상이지만, 그릴이 다소 엉성한 것은 여전했다. 외관상 개선된 점도 몇 가지 있었다. 단자 주변 모서리에 경사를 주어 케이블 연결이 한결 쉬워졌다. 뒷면의 색도 노란 나무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뀌어 더 현대적이었다. 배플면의 하베스 로고판도 더 아담하게 작아졌다. 그리고 우퍼를 둘러싼 나사테 부위가 둥근 모양에서 8각형으로 바뀌면서 마무리가 말끔해진 것도 돋보였다. 콤팩트 7을 닮은 인상이다. 소리를 들어보니 에이징이 되지 않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기존에 사용하던 월넛 무늬목 마감인 HL 5ES와 상당히 다르다. 중고역에서 특유의 달콤하고 점잖은 맛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중저역에서 크게 차이가 났다. 분명히 저역이 더 조여지고 밀도감이 있었으며 미세하나마 해상력도 향상되어 있었다. 기존의 HL 5ES보다 더 현대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원래의 모델이 가진 장점은 그대로 유지되는 듯한 소리이다. 궁금해서 수입원에 전화를 해보니 초기의 HL 5ES는 구모델인 HL 5에 사용하던 오닥스의 TPX 콘 재고를 우퍼로 사용하면서 네트워크만 콤팩트 7의 기술에 따라 재조정했는데, 체리 무늬목으로 나온 모델부터는 콤팩트 7에 사용하는 레이디얼 콘을 사용하였단다. 그리고 원래 하베스 본사에서는 HL 5ES를 생산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일본에서 나이든 사람들 사이에 수요가 있어 조금씩 만들게 되었단다. 하베스사의 홈페이지(www.harbeth.com)에 들어가보면, 다른 스피커들은 장황하게 스펙을 밝히고 자찬을 해놓은 반면 HL 5ES에 관하여는 사진과 모델명만 실려 있고 아무 설명이나 찬사도 없다. 혹시 로고에 당당하게 레퍼런스 모니터라고 적힌 이 기기가 단종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

 

    HL 5ES의 특징을 더 열거해보자. 의외로 주변기기에 민감하다. 대부분의 애호가들이 이 스피커에 그만그만한 앰프나 케이블, 소스 기기들을 연결하여 듣는다. 그러면 이 스피커는 예쁘고 단아한 소리를 낸다. 86dB이라는 낮은 감도에도 불구하고 이 스피커는 뜻밖에 앰프나 주변기기를 심하게 가리거나 박대하지 않는다. 어느 것에 물려도 고유의 소리가 나온다. 그것이 이 스피커의 장점이자 한계로 평가되는 것이 보통이다. 음악성은 좋으나 소리 재생에는 한계가 있는 C급 기기로 분류한 하이파이저널 제31호의 평가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일 게다. 그러나 HL 5ES는 그 이상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정갈한 소스, 구동력이 좋은 앰프, 섬세한 주변기기들을 제대로 만난다면 이 스피커는 보통 가정에서 대편성 관현악곡을 비롯하여 어떤 장르의 음악이라도 잘 소화해낸다. 흔히 하베스의 약점으로 잘못 지적되는 피아노 음악도 마찬가지로 잘 울릴 만한 잠재력이 있다. 하이파이저널에 실린 평을 보면 HL 5ES에는 고역 특성이 좋은 앰프를 물려야 하며 이것이 하베스 스피커를 잘 울리는 비결이라고 한다. 하베스의 고역은 다른 스피커에 비하여 순화되어 있고, 특히 HL 5ES의 중고역은 더 점잖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라는 의미일 게다. 거기 더하여 앰프의 구동력이 좋아야 하고 고출력 앰프면 더 좋다. 그리고 고품위 케이블로 바이와이어링을 하는 것과 든든한 스탠드를 준비하는 것은 필수이다.

 

또 다른 번뇌의 시작 : 스탠드 

    술이 문제였다. 밑판에 스파이크를 3점 지지로 장착하여 놓은 스탠드의 균형을 잡아 보겠다고 술김에 욕심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술 때문에 운동 신경이 둔화되었기 때문인지(그래서 음주운전이 위험한가 보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는 바람에 스피커가 손에서 미끄러지며 벽에 부딪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HL 5ES 한쪽 모서리와 뒷판에 상처가 생겼다. 상처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동안 월넛 무늬목에서 체리 무늬목으로 바꾸고 나서 손때라도 묻을까봐 장갑까지 끼고 정성을 들였던 일이 떠오르니 마음이 아팠다. 집착을 버려야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는 깨달음이 순간 스쳐갔지만, 그건 그거고 일단 문제는 해결해야 했다. 바우하우스에 CD 래크와 체리 무늬목 스탠드를 함께 주문하면서 스피커의 상처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HL 5ES가 나간 사이에 장난삼아 에어로 705A-90MIT MH 750 스피커 케이블을 써서 물려보니 특이한 소리가 나왔다. 소리가 극도로 밝아지면서 전후 공간감이 잘 살아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체감의 묘사가 그전에 인켈 앰프에 물려 들을 때는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던 할러소닉 효과인 것 같았지만, 그 음색이 천박하여 결코 오래 들을 수 없는 불균형하고 부자연스러운 소리임은 분명했다.    

 

    며칠이 지나 HL 5ES가 바우하우스의 스피커 스탠드 BH 300-S라는 짝을 데리고 돌아왔다. 무늬목 수리를 위하여 가져간 스피커 색을 기준으로 하여 마감한 덕분에 스탠드 색이 스피커와 아주 잘 어울렸다. 모양도 그만하면 괜찮았다. 무게도 묵직하여 소형 스탠드와는 전혀 품격이 다른 듯했다. 다만 스피커 성형수술은 그리 완벽하지는 못하여 상처의 흔적이 남았지만, 그냥 보아서는 잘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땜질된 것만도 다행이었다. HL 5ES를 새 스탠드 위에 올려 놓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누가 하베스 스피커에 저역이 부족하다고 했는가. 놀랄 만큼 풍성하면서도 단단한 저역이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분명히 새로 들어온 스탠드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그런데 들을수록 소리의 균형이 잘못된 것 같다.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청명한 기분이 도는 하베스 중고역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저역만 부풀어져 나온다. 소리 전체가 억눌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스탠드 하판 쪽으로 손을 넣어보니 평론가 나병욱 선생이 칭찬했던 바우하우스만의 노하우라는 밑판 구멍이 아예 없다. 바우하우스 권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직원들이 체리 무늬목으로 특주품을 만드느라고 실수한 것 같다며 곧 방문하여 조치하겠다는 것이었다

 

    며칠 지나 권 사장이 방문하여 즉석에서 스탠드 밑판에 구멍을 뚫었다. 흙묻은 자갈 몇 개를 빼내고 촘촘한 망사 천에 본드칠을 하여 안의 자갈에 붙여 구멍을 메우는 작업 방식을 보고 실망이 커서 그리 기대하지 않고 시청에 임하였다. 그러나 레베카 피존이 부르는 스패니시 할렘을 듣는 순간, 너무나 달라진 소리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이 과장이나 나나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리의 억눌린 듯한 부분이 일거에 사라지면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저역의 양이 충분히 확보되면서도 중고역의 맛이 살아난다. 이 과장이 한 마디 툭 던진다. ‘오랜 변비가 순식간에 뚫리는 느낌이다’. 전반적으로 저역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도 밀도감이 있었고 소리가 대체로 시원스럽게 나와주었다. 볼륨을 올리면 좁은 방에서 주체하기 힘들 정도이다.

 

3개의 박스가 달린 MIT 350 프로라인 트윈

 

다양한 케이블 효과

    금강전자에 MIT 프로라인 디지털 케이블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마침 마이크로메가 듀오 3.1 CD트랜스포트와 프로 2 DA컨버터에 밸런스 단자가 달려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사실 MH 750 바이와이어를 경험한 뒤 MIT 케이블에 대한 신뢰가 생긴 터에, 모양도 그럴싸한 밸런스형 디지털 케이블을 보니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튼 XLO의 동축형 레퍼런스 디지털 케이블과 함께 빌려가지고 집으로 왔다. MIT 프로라인 디지털은 대역 밸런스에 안정감이 있고 소리에 어떠한 과장도 없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고역에서 저역까지 전대역이 고르게 잘 나오고 품위가 있다.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점잖으면서도 나올 소리는 모두 나와주는 중립적인 소리 경향은 특히 클래식에 잘 맞는 것 같았다. 특히 대편성 관현악곡을 들을 때 그 안정된 균형감이 제 실력을 발휘한다. 해상력이나 투명도가 돋보이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 나오는 소리도 없는, 묘한 매력을 가진 케이블이다

 

    XLO 디지털 케이블 레퍼런스 4.1은 동축형으로, 중고역이 아주 예쁘고 투명하지만(특히 김광민이 연주하는 신중현의 나뭇잎이 떨어져서’), 음의 균형이나 자연스러움은 MIT 쪽이 마음에 들었다. 두 가지 케이블을 다 갖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다만 프로라인 디지털을 끼워도 마이크로메가 듀오에서 재생되는 재즈나 록의 파워감은 사이러스 DAD 7보다 못한 것 같았다. 신중현의 석양을 정원영, 한상원이 연주한 곡(‘어 트리뷰트 투 신중현’, 서울음반 SRCD 3455)에서 특히 사이러스의 진가가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중역대가 튼실한 사이러스 DAD 7 플레이어도 그대로 남았다

 

    MH 350 프로라인 트윈은 줄 하나에 터미네이터가 3개씩 달린 밸런스형 인터커넥터로 상당히 고가이지만, 그만큼 훌륭한 소리를 들려 줄 것 같았다. 전체 케이블 중 컨버터와 인티앰프 사이의 인터커넥터가 상대적으로 가장 떨어지니 그로 인한 하향평준화가 생길 것이라고 독단한 후, MH 350 프로라인 트윈을 들고 왔다. 오너 A-90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기존 MIT 터미네이터 프로라인과 가장 큰 차이는, 프로라인 트윈은 소리가 명료하면서도 정숙하고 음상이 대단히 음악적으로 균형있게 정돈된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독특한 달콤함이 배어 있어 이것이 음악을 진정 음악답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해상력은 두드러지게 증가하지 않지만 잘 안 들리던 소리의 뉘앙스가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즐거움이 있었다. 중고역이 젊잖은 MIT 케이블의 기본 성격에, 선명하고 자연스러움이 배가된 듯한 고품위한 소리였다. 음장이 넓어지고 앞뒤 공간감의 묘사도 한결 훌륭하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었으면 좋았을 것을 A-90HL 5ES의 잠재력을 더 끌어내보자고 만용을 부린 것이 문제였다. 이번에는 오디오플러스의 은도금선 스피커 케이블을 가지고 전원 케이블을 만들어 A-90의 아래쪽에 힘들게 결선하여 보았다. 참 듣기 거북스러운 소리이다. 음량이 커지고 힘이 넘치다 못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10분을 넘게 음악을 계속 듣기가 어려웠다. 힘이 모자라는 시스템이라면 결과가 좋았을지 모르지만, 내 시스템에는 안 다느니만 못했다. 마치 고요한 밤, 좁은 방 안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떠들어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A-90의 자연스럽고 건강한 소리가 사라지고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경직된 소리로 탈바꿈되었다. 오디오플러스 전원선을 바로 빼내고 원래의 전원 케이블을 연결하고 들으니 그런 현상은 사라졌지만, 심리적으로 시스템의 균형이 깨진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 혼란스러웠다.

 

    혹시 MH 350 프로라인 트윈에도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 과장으로부터 실텍 4-56 인터커넥터를 빌려서 들어보았다. 당연히 값비싼 MH 350 프로라인 트윈의 승리를 예상하였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값이 훨씬 싼 실텍 4-56이 오히려 해상력이 더 좋고 3차원적 공간감이나 홀톤의 묘사에서 더 앞서는 것이 아닌가. 특히 음악적 뉘앙스의 묘사에서는 실텍이 분명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다만 저역의 밀도감만은 MH 350이 더 좋았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갑자기 그 비싼 MIT 선들이 이상해보이기 시작했다. 주렁주렁 달린 네트워크 박스도 선을 제대로 못 만드느라 부린 편법 같아 미워보였다. 그리하여 실텍의 케이블을 수소문하게 되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매 중인 제품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이파이저널 최 국장의 주선으로 MSB 링크 DAC라는 컨버터를 들어볼 기회가 왔다. 이 과장이 별로 내켜 하지 않기에 그냥 들어보면 되는 것인데 뭘 망설이냐고 부추겨 일단 우리집에서 먼저 들어보기로 했다. 스베틀라노프가 지휘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PONY CANYON PCCL-00266)을 들으니 마이크로메가 듀오 프로 2보다 해상력이 좋고 소리의 셈여림이나 직진성은 좋아졌다. 특히 공간감의 묘사는 탁월하였다. 그러나 거듭 들어보니 어딘가 자연스러운 맛이 없고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묘하게 거친 맛이 있었다. 듀오 프로 2가 해상력이나 음장감에서는 밀리지만, 자연스럽고 음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같이 따라온 이판사판이란 디지털 케이블을 한 번 시청해보았다. 선이 뻣뻣하여 연결하기도 힘들다. MIT 프로라인 디지털과 비교해보면 이판사판 케이블은 중고역이 유별나게 강조되는 소리이다. 특히 중고역의 반짝거리는 느낌이 두드러져 트럼펫을 비롯한 금관악기의 울림에 광채가 나는 듯하였다. 처음 들을 때는 소리가 선명해지면서 해상력이 좋아지는 것 같지만, 잘 들어보면 전체 음대역의 균형감이 무너져 자연스러움을 잃고 있었다. 특정 대역이 지나치게 강조된 결과인 듯하다. 적어도 내 취향은 아니다 싶었다.

 

 

  클라세 CA-300과 CP-60

    소리에 대한 혼란이 계속 생기고, MIT MH 350 프로라인 트윈이 들어온 다음부터는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아 뚜렷한 업그레이드 계획도 없이 금강전자에 자주 전화를 하거나 틈나는 대로 숍에 들러 이것저것 들어보기만 하는 일이 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고 사장으로부터 클라세 파워앰프 CA-300이 중고로 나왔으니 한 번 가져가 들어라도 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사실 분리형 앰프를 쓰겠다는 생각은 물론이고 클라세 앰프를 들어보고 싶어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크렐이나 마크 레빈슨 중고보다 훨씬 가격이 저렴한 중고 앰프라니 거기에 값싼 프리앰프 중고를 물려서 들어보는 것도 그리 부담이 될 것 같지 않아 그러자고 답하고 말았다. 즉 내가 클라세를 택했다기보다는 클라세가 나를 고른 셈이다. 그런데 내심 짝으로 정해두었던 스레숄드 프리앰프 T3가 며칠 사이에 팔려버린 것이 문제였다. 클라세 CA-300 파워앰프의 제짝인 CP-60 프리앰프가 있었지만 신품이라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마땅히 가져올 다른 기기가 없어 다른 프리를 구할 동안만 임시로 듣기로 했다. 그러니 CP-60은 아예 내 의견과는 조금 무관하게 우리집에 들어온 셈이다. 기기를 가져오게 하는 김에 하이파이저널로부터 특선을 받은 파토스 클래식 원 인티앰프도 빌려 들어보기로 했다.   

 

    우선 클라세의 조합을 들어보니 음장이 넓게 펼쳐지면서 시원시원하게 나오는 소리는 확실히 인티앰프와는 차원이 다르다. 특히 맑은 공기감이 감돌아 아주 청명한 소릿결이었다. 차가운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자연스럽게 악기 소리의 실체감이 잘 살아났다. 이번에는 파토스의 클래식 원을 들어보았다. 극도로 탐미적인 소리이다. 정말 고급스럽고 예쁘다. 바이올린을 듣다 보면 이 이상 더 비싼 앰프가 필요없겠다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그러나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울려대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스피커를 드라이빙하지 못하고 있음이 역력하고 볼륨을 키우면 클리핑이 쉽게 생긴다. 실내악만 들을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서브로 둘 형편도 되지 않아 아쉬움을 뒤로 하고 포기하기로 했다. 이 과장은, 클라세가 청명한 소리지만 오래 들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자기가 평소 하베스에서 느끼던 중역대가 빈 듯한 현상은 사라졌다, 그러나 크렐이나 마크 레빈슨과 비교하면 저역이 고급스럽지는 못하다 라고 일도양단의 판정을 내리고는 돌아갔다. 결국 클라세 CA-300, CP-60이 자리를 잡았다. 자꾸 들어보니 소리가 차갑고 어딘가 금속성처럼 뻑뻑하여 정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클라세 조합이 내는 중고역이 청명함에도 불구하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중고역은 기이하게도 억눌린 듯한 인상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원인을 프리앰프의 한계로 추정하고 성능 좋은 다른 프리앰프를 수소문해보았지만 도무지 마땅한 물건이 나타나지 않았다. 무리를 해서라도 소닉 프런티어스의 라인 2BATVK-5i를 구해보고자 했으나 물건이 모두 어디 숨었는지 나타나 주지 않았다. 고를 물건이 넘쳐서 행복한 고민을 하던 이 과장과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카운터포인트의 SA 5000 프리앰프의 중고 제품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하이파이저널에서 안정적으로 밀어주는 에너지감은 여타의 앰프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느낌을 준다. 어떤 파워앰프와도 어울리도록 제작된 하이엔드 제품이다라고 격찬한 평을 믿고 즉시 집으로 가져오게 했다. 전원부 분리형인 이 제품은 하이브리드형이라고 하지만, 진공관 앰프의 분위기가 역력했다. 전원부, 본체의 틈으로 내부가 너무 드러나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큰 기대를 걸고 클라세 CA-300 파워와는 첼로 스트링스 접속 케이블로, 마이크로메가 듀오 프로 2 컨버터 쪽과는 이글의 인터커넥트 케이블 스페셜 CD팩으로 연결한 다음 전원을 넣었다. 험이 유도된다. 소리만 좋으면 무슨 상관이랴 마음먹고 비욘디가 연주하는 비발디의 사계(OPUS 111. 0PS 56-! 9120) 겨울을 들어보았다. 따뜻한 음색이다.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결이 잘 살아나고 배음이 풍부한 중고역이 귀에 촉촉히 스며들어온다. 첫인상에서는 일단 합격이다. 클라세 CP-60 프리가 정말 형편없는 기기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나 소스를 바꿔가며 이것저것 들어보니 어딘가 이상했다. 험이 발생하는 것은 진공관의 숙명이라고 하더라도 중저역이 풀어져 있고 음상이 전반적으로 정돈되지 않아 지저분한 것 같았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클라세 CP-60 프리의 청명한 소리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밸런스와 언밸런스의 접속 방식 차이일까. 여하튼 레베카 피존이 부른 스패니시 할렘을 듣는 순간 결론은 분명해졌다. 다시 클라세 CP-60을 들으니 정말 시원시원하면서도 청명하고 잘 정돈된 음향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카운터포인트보다는 같은 클라세 가문끼리 궁합이 잘 맞는 듯했다. 그리하여 미련없이 카운터포인트를 돌려보내고 계속 CP-60으로 듣게 되었다. 그러나 맑은 중고역임에도 어딘가 억눌린 듯한 부자연스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원인을 찾아야 했다. 혹시 DA컨버터와 프리앰프 사이의 밸런스 선이 프리와 파워앰프 사이의 선보다 하급기여서 케이블의 하향평준화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염치 불구하고 고 사장의 도움을 받아 MIT 330 프로라인, 350 프로라인 트윈, 350 트윈 언밸런스까지 모두 빌려와 번갈아가며 들어보았다. 원래 DA컨버터와 프리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터미네이터 프로라인 밸런스 케이블은 330이나 350과 비교하니 거칠고 명료하지 못한 편이다. 330350은 가격 차이는 많이 나지만 개성이 달라 쉽게 판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330 프로라인은 소리가 딱딱하지만 에너지감이 좋고 사실적이다. 그러나 자꾸 시청해보니 역시 350 프로라인 트윈이 밸런스가 좋고 음상이 품위있게 정돈되면서 훨씬 더 선명하다. 특히 프리와 파워앰프의 결선 쪽으로 비교 청취를 해보니 330 프로라인이 상당히 거친 소리를 내주는 반면, 350 프로라인 트윈은 부드럽고 잘 정돈된, 자연스러운 음악을 들려주었다. 350 프로라인 트윈은 극도로 정숙하고 균형잡힌, 고품위한 소리를 내주는 것이 최대 장점이었다

 

    그렇다면 애당초 프리, 파워앰프 사이에 350 프로라인 트윈으로 연결해둔 덕택에 클라세 CP-60의 소리가 거칠지 않고 잘 다듬어져 나오고 있다는 뜻도 된다. 결국 프리의 에이징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50 트윈 언밸런스는 350 프로라인 트윈과 비슷한 수준의 소리이면서 조금 더 젊은 느낌을 주지만, 중저역의 밀도감은 확실히 밸런스 연결 방식이 앞서는 것 같았다. 350 프로라인 트윈을 하나 더 들여놓으면 해결될까?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맑은 중고역임에도 억눌려 나오는 비밀은 그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황금귀인 이 과장에게 비교청취를 부탁하였다. 열심히 들어본 이 과장은 350 프로라인 트윈이 가장 뛰어난 것 같지만, 그 금액을 투자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도 아닐 것 같다고 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나와 같아, 중고역이 묘하게 억눌려져 답답하게 느껴지는 점만 해결되면 될 터인데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스피커 스탠드를 튜닝하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갑자기 스피커 스탠드 쪽에 생각이 미쳤다. 처음 스탠드가 들어왔을 때 저역의 양이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동시에 중고역이 완전히 억눌렸던 일이 떠올랐다. 스탠드 밑판에 구멍을 뚫으면서 그런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되기는 했지만, 앰프가 업그레이드되어 스피커의 울림이 정교해지면서 다시 그 문제가 불거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스탠드 기둥 안에는 모래나 자갈을 다 채우지 말고 20~30% 정도 빈 공간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도 났다. 그리하여 밑판의 구멍을 막은 천을 떼어내고 손가락 2개를 사용하여 자갈을 아래로 덜어내는 일을 시작했다. 구멍이 그대로 뚫리다 보니 자갈이 우르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만유인력의 법칙상 당연한 일. 그래도 자갈의 부피가 서로 달라 일정한 단계에서 맞물리게 되면, 떨어지는 것이 중단된다. 이를 이용하여 자갈을 조금씩 덜어내며 들어보니 확실히 중고역이 잘 뻗어나오면서 소리의 억눌린 느낌이 해소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탠드의 밑부분 구멍이 그냥 뚫려 있다 보니 저역이 세게 울리거나 외부로부터 충격이 가해지면 자갈이 우르르 쏟아지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자갈이 방에 쌓이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스탠드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지고 저역이 심하게 줄어드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방 안 공기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바우하우스 권 사장에게 클레임을 걸자 당장 달려와서는 아예 스탠드를 가져가 큰 자갈로 다시 채워 넣어 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하였던 터라, 하베스 스피커는 통울림을 자연스럽게 감쇄하는 스타일의 스피커이니 빈 공간을 꼭 둘 것과, 상판에도 구멍을 뚫어 진동이 자연스럽게 밑으로 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두 가지 부탁을 했다.

 

    며칠 후 내가 없는 사이 스탠드가 배달되어 있었는데, 상판에 구멍이 뚫려 있지 않았다. 전화를 걸자 권 사장님은 음질적으로 그러한 방법을 확신할 수 없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서 굵은 자갈만 골라 씻어 말린 다음 채워넣었으므로 자갈 사이사이에 틈이 생겨 소리의 진동이 밑으로 잘 빠져나갈 것이라고 했다. 들어보니 중고역이 억눌린 느낌은 사라진 듯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리가 어딘가 공허하고 중심없이 겉도는 것 같았다. 기존의 스탠드가 지니고 있던 장점인 저역의 권위감과 깊이는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공허한 소리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여기저기 상의해보니 프리앰프의 문제라고 하거나 또는 스피커의 한계이니 이 기회에 바꾸라는 의견들뿐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동고동락한 두번째 HL 5ES까지 버릴 수야 없는 일. 아무래도 프리앰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쪽을 바꾸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침 금강전자에 마크 레빈슨의 No.26SL 프리앰프가 나왔다고 한다. 레모 단자라고 하기에, 어댑터를 쓰면 음질이 저하된다는 편견이 있던 내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이미 가져가 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RCA 단자였다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마크나 크렐 같은 고급기는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나 보다.

 

인터커넥터의 최종 분석

    세상에는 시간만이 해결해주는 문제들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리의 공허함이 사라지고 안정감있게 변해간다. 마땅한 프리앰프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예 늘상 하던 대로 케이블로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다시 이 과장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프리앰프, 파워앰프는 MIT 350 프로라인 트윈으로 이미 고정된 상태였고, 프리앰프와 DA컨버터 사이의 인터커넥트 케이블을 선정하는 작업이었다. 이 과장은 MIT 330 프로라인과 350 프로라인 트윈으로 번갈아가며 이것저것 들어보더니 라두 루푸가 연주한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제16번 가단조(DECCA 417 640-2)에 가서는 피아노의 소리가 더 단단하다며 330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무리 이 과장이 황금귀를 가지긴 했지만 이번 판정은 어딘가 신뢰가 가지 않아 떨떠름해 하고 있었는데, 이 과장이 갑자기 영화 올웨이즈의 사운드트랙(MCAD -8036)을 걸고 비교해보자는 것이었다. 이 사운드트랙의 첫곡은 제롬 컨의 불멸의 노래 스모크 겟스 인 유어 아이즈’. 먼저 330 프로라인으로 들어보니 소리가 탁하고 옛날 녹음 같다. 이 과장이 350 프로라인 트윈으로 바꿔보라고 명령한다. 바꾸고 재생한 지 10초도 안 되어서 이 과장은 “350이 훨씬 낫다. 이걸로 해라라고 단언한다. 선명하며 아름답고 음악적으로 울려주는 350 프로라인 트윈의 저력은 확실히 330을 훨씬 앞서고 있었다. “무슨 황금귀가 그렇게 왔다 갔다 하냐라고 따지자 요즘은 정신없이 바빠서 그런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시스템에 대한 이 과장의 총평은 이랬다. 스탠드의 내부 자갈을 바꾸고 나서 소리가 완전히 달라졌다, 프리앰프도 숙성되어 옛날에 들었던 소리가 아니다, 자기가 나라면 350 프로라인 트윈을 하나 더 들여놓고 클라세로 주저앉겠다, 하베스 HL 5ES에서 허전하게 느껴지던 중역대도 꽉차 울려 부족한 점이 없다, 저역도 아주 단단하고 고급스럽게 잘 나온다, 자기 시스템과 소리가 미세하게 차이가 나지만 아주 비슷해졌다, 훨씬 적은 돈으로 이 정도 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자기가 들인 돈이 허탈하다, 이 공간에서 이 이상의 소리는 기대할 수 없겠다 등등. 실은 내가 느꼈던 변화를 이 과장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니 그 말을 그냥 믿기로 했다. 그래야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결국 MIT 350 프로라인 트윈을 하나 더 들이고 다른 케이블과 기기는 모두 내보내면서 그제서야 클라세 CP-60 프리의 매뉴얼을 받아왔다. 매뉴얼을 보니 클라세 CP-60의 진정한 소닉 그로스(sonic growth)를 느끼려면 최소한 300시간 이상의 작동이 필요하다고 쓰여 있었다. 지금까지 들은 시간을 아무리 계산해도 300시간에는 못 미치는 것 같았다.

                 

 

    프리앰프의 계산을 치르고 나니 불행히도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리의 균형이나 음장감, 해상력, 개방성, 에너지 등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음악을 계속 듣고 싶게 만드는 어떤 매력이 없는 것 같았다. 이건 의외로 심각한 문제였다. 1시간 이상 들으면 음악이 더 듣기 싫어지고 힘이 빠졌다. 소닉 그로스건 뭐건 간에 아무리 에이징시켜도 프리앰프의 소리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원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로에 빠진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클라세 CP-60 프리앰프를 이 상태로 그냥 내보내려고 하니 청명하고 잘 정돈된 울림을 버리기 아쉬웠다. 그러나 이렇게 고민만 하다가 중고가로 내보낼 때의 손해를 생각하니 혼란스러워졌다. 심지어 다 물리고 오너 A-90으로 다시 돌아갈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왜 실체도 없는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지 한심스러웠다. 일단 프리앰프를 다른 것으로 들여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고 사장님을 괴롭히기 시작했으나 시중에 돌아다니는 프리앰프의 명기가 워낙 없으니 별 해결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다가 지금 사용중인 1만 원대의 멀티 콘센트를 15만 원대의 국산품으로 바꾸어보겠다고 하니까, 고 사장님은 그런 데는 이제 그만 돈 쓰고 차라리 타이스 파워블록 시그너처 3을 한 번 사용해보라는 것이었다. 파워블록은 이문철 과장의 집에서 들어온 바로 그 날 경험해 본 일이 있어 그 놀라운 위력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엔드 기기에서는 효과가 매우 크지만, 중하급기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도 있어서 내 시스템에서도 그런 효과가 날지 자신이 없어 망설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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