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안정한 존재이다.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나 목마름과 배고픔, 통증, 불편함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성장해가면 타인과 마주해야 하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임판은 『존재의 두드림』(지식공감. 2022)에서 그 세계를 아이들이 뛰어노는 트램펄린에 비유한다. “트램펄린이 발걸음에 흔들리듯 언어공동체적 환경은 소통과 관계에 따라 출렁인다. 이처럼 의미들이 관계와 맥락을 따라 미묘하게 변동하는 환경과 타인들 틈에서, 자아는 정체성과 안전을 확보하고자 쉼 없이 분투한다.…우리의 삶은 언어와 역사와 공동체가 선물한 거대한 트램펄린 안에서 이루어진다”(31쪽). 그곳에서 우리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하여 고단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갈증과 허기는 사라지지 않고 마음은 늘 불안하다. “쾌락이든 성공이든 경험이 가능한 모든 것은 경험한 이후에는 한계로 작용할 뿐이다. …일상적인 삶의 반복 역시 자아와 존재의 한계를 자각한 순간 허무주의의 그림자를 짙게 한다.”(207쪽). 게다가 질병, 빈곤, 자연재해, 사고, 심지어 그런 불행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삶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인 “트램펄린은 흔들린다.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확실성을 향한 욕구를 길어 올린다. 그것이 존재가 두드리는 이유이다. 의미와 관계는 흔들리며, 흔들림이 낳은 자아의 불안과 절대성을 향한 욕구로써 존재의 두드림을 부추긴다.…우리는 존재하자마자 흔들림을 극복하고자 삶의 의미를 묻기 시작한다. 또 삶의 의미를 묻자마자 삶의 목적과 끝을 내다보는 우리는, 존재하자마자 존재의 끝을 두드리는 존재이다”(33∼34쪽).
존재의 두드림에 응답하는 태도는 갈린다. 먼저 트램펄린을 초월한 참된 세계를 꿈꾸는 태도이다. 특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불행을 겪을 때 그렇다. 신형철이 구약 ’욥기‘를 사유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헤매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내 아이가 어처구니없는 확률(우연)의 결과로 죽었다는 사실이 초래하는 숨막히는 허무를 감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이 모든 일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살아 있는 자를 겨우 숨쉬게 할 수 있다면?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하는 증거 앞에서 오히려 신이 발명되고야마는 역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인간이 오히려 신 앞에 무릎을 꿇기를 선택하는 아이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이들을 누가 감히 '패배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신을 발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인생의 역사: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난다, 2022, 43∼44면)라고 하였듯이 말이다.
반대로 신도 어떤 의미나 가치, 궁극적 실재도 존재하지 않다고 하면서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허무주의가 있다. 허무주의는 염세주의나 쾌락주의로 연결되어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을 끌어내려 삶을 사소하게 만든다. 아니면 니체처럼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우리 스스로 위버멘쉬(초인)가 되어 가치의 창조자가 되라고 설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속에서 가치를 공유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기본조건과 배치된다. “위버멘쉬는 사실상 가치 없는 가치를 추구하는 셈이다. 혼자만의 가치는 가치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서 실제로는 가치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위버멘쉬의 사상은 니힐리즘의 극복이 아니라 니힐리즘의 극단이 되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존재의 두드림』, 214쪽). 그럼 종교나 허무주의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할까?
임판의 『존재의 두드림』은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심오한 철학적 응답이다(임판은 아름다운 철학서인 『물고기와 철학자』(2011)에서부터 존재, 궁극적 진리(실재), 삶의 의미라는 주제에 일관되게 천착하여 온 철학자이다).
“현대인에게는 진리와 절대성보다는 그 상실이 초래한 허무주의와 삶의 사소함이 더 큰 문제”(13쪽)라고 진단한 저자는 현대철학의 주류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형이상학적이고 신적인 본질이 있다면 그 본질적인 면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다”(52쪽)라고 선언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며 도피한 비트겐슈타인이나 물 자체에 대하여는 이성으로 사유할 수 없다고 선을 그은 칸트에 대하여 “우리가 모르는 모든 것은 우리의 지식에서 비롯되며, 우리가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칸트는…물 자체에 이른 후에는 그것에 관하여 묻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계속 묻는다. 나아가 질문은 물 자체나 본질에 이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앎은 언제나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며 절대적 관점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식은 끝이 열려 있는 셈”(105쪽)이라고 비판한다. 진리나 실재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식과 표현, 그리고 소통의 절대성을 원한다는 것에 불과”(136쪽)하다. 따라서 진리나 실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나 존재 이유는 반드시 언어적 사고로 드러나야 한다.…실재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할 때조차도 말해지고 있으며, 단지 간접적으로 혹은 내용이나 속성을 제거한 부정적인 방법으로 진술되고 있을 뿐”(139쪽)이고 “한계는 우리가 설정함으로 존재”(140쪽)할 뿐이어서 언어, 사유, 의미를 넘어서는 신비주의 체험도 결국 언어와 사유, 의미의 망 안에서 존재할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넘어선 실재가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언어공동체 안에서는 확증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상으로 또는 논리적 사유로 끌어내는 다른 세계는 모두 우리의 그림자”(163쪽)이고, “결국, 우리를 넘어선 세계나 우리 이전의 세계는 없다. 그렇게 가정된 세계 역시 우리가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모두 이 세계 내의 문제이다. 우리 이전에는 세계가 없으며, 우리를 넘어서는 있고 없음도 논할 수 없다. 이것은 세계가 우리에게 의존하여 존재한다거나 우리의 의식이 사물을 만들어냈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와 실재를 논하는 문제가 우리 사고 내의 문제라는 뜻이다. 우리 사고 바깥에 존재하는 실재나 세계는 우리가 부여한 모든 의미를 제거한 것으로서 말하자면 무의미에 불과하다.”(164쪽) 그 결과 “우리 앞에 놓인 결론은 현실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막다름이며, 주어진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에서 일종의 감옥”(192쪽)이다. 그 안에 존재는 갇힌다.
그럼 다시 허무주의인가? 임판은, 허무주의는 공동체와 역사가 만들어낸 의미에 불과함에도 이를 숨긴 채 마치 절대성의 영역에서 온 진리처럼 위장하여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탁월하게 지적한다. 진리나 참된 세계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삶의 근본적 의미나 심오함의 가치에 이르는 길로써 “시선을 의미 너머 바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해야”(193쪽) 하고, “실재나 진리가 우리의 경험과 사고의 투영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 투영을 통한 무한의 추구가 우리의 본질임을 인정”(232쪽)하면서, “심오함과 충일감의 원천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 접근하는 자아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념이 아니라 진리와 절대성을 향하여 온몸을 던져 추구했던 헌신의 공통성이 심오함을 향한 열쇠”(257쪽)임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존재의 두드림은 자아의 방어기제를 넘어서는 관조를 통한 헌신 즉 명상과 만나 삶의 심오함을 성취한다.
물론 우리는 안다. “자아는 어떤 명제나 신념을 진리로 받아들여 자신을 확고부동한 위치에 머물게 하려 하지만 그것은 자아의 본질에 어긋나므로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과제”(250쪽)이고, “우리가 인간존재로서 자아를 초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현상일 뿐”(250쪽)이며 “어떤 의미를 세워도 의미는 시간 앞에 허물어질 것”(271쪽)임을,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는 의미를 누리는 존재이며 끝없이 의미를 쌓아올리는 존재이다.…허무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더불어 허무를 넘어설, 의미를 넘어설 심오함과 신비스러운 실재도 바로 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존재를 두드리는 존재이다.”(271쪽)
이처럼 끊임없이 존재를 두드리며 철학으로도 구원에 이르는 한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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