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클로시 로자(Miklos Rozsa)의 음악 중 가장 유명한 곡은? 물론, <벤허>다. 영화 자체가 워낙 명성이 높은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사랑의 테마’나 ‘전차행진’은 보통 사람들 귀에도 친숙한 편.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왕중왕>이나 <쿼바디스>도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는 영화이다. 이들 유명한 영화를 위한 위대한 음악을 작곡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에 편수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로자를 성서사극음악의 거장으로 부르는 데에 문제가 없다. 이들 음악을 묶어 하나의 앨범으로 만드는 것은 LP 시절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다. 때로는 장중하고,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로자의 서사극 음악은 대편성 관현악단과 합창단이 동원되기 때문에 순수한 음향예술 측면에서도 흥미진진하다. 이런 레퍼토리에 에리히 쿤젤과 신시내티 군단, 텔락 제작진이 눈을 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
이 SACD 앨범의 제목은 ‘3개의 합창 모음곡’으로 되어 있지만, 좀 이상하다. 실제 합창이 들어간 음악은 21곡 중 11곡에 지나지 않기 때문. 로자는 원래 <벤허>와 <왕중왕>의 음악에 새 창작곡 하나를 더하여 오르간 반주 또는 무반주로 연주하는 12곡의 합창음악을 작곡한 일이 있었다. 이 앨범에 실린 곡은 그것과는 관련이 없다. 성서사극 영화음악을 모으면서 합창이 들어간 곡이 많다는 점, 특히 360명이나 되는 대규모 합창단이 동원된 점을 강조하여 위와 같은 앨범 제목을 붙인 것같다. 로자가 만년에 이 모음곡을 작업 중이었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실제 결과물은 로자가 사용하던 악보들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벤허>와 <쿼바디스>는 1970년대의 개정 악보가, <왕중왕>은 영화 속 사운드트랙 악보가 중심이 된 점은 지적할 수 있겠다. 자세한 분석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몇 가지만 지적하여 두자. 다니엘 로빈스의 <벤허> 편곡 중 ‘서곡’은 실은 ‘간주곡’이고, 뒷 부분 사랑의 테마가 나오는 대목에서 음이 하나 다른 부분이 있고(누구나 금방 알수 있다. 연주자의 실수―그렇다면, 이를 잡아내지 못한 편집자의 실수―일 수도 있다), 심벌즈가 사용되는 대목은 로자의 아이디어와는 다르다. ‘베들레헴의 별과 동방박사의 예배’는 영화 사운드트랙처럼 두 부분을 단절시키고 있는데, 이건 좀 아쉽다. 유연하게 연결하는 것이 로자의 뜻이었고 그것이 더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 때문. ‘기적과 피날레’는 1977년 내셔널 필하모닉 버전(데카)을 토대로 하면서 중간 부분은 영화 사운드트랙처럼 구성하였다. 이것도 나름대로 꽤 효과적인 편곡이다. 선곡은 대체로 잘한 편이다. 다만, <벤허>에서 ‘사랑의 테마’와 ‘골고다로 가는 행렬’이, <쿼바디스>에서 ‘전차추격’이, <왕중왕>에서 압도적인 폭발력을 지닌 ‘전주곡’과 ‘살로메의 춤’, ‘십자가의 길’이 포함되었더라면 한결 더 좋지 않았을까?
연주는 쿤젤과 신시내티 군단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음상이 조금 가벼우면서도 대체로 빠른 템포로―‘마커스와 리지아’처럼 템포를 느리게 잡아 세부를 정교하게 다듬어간 부분도 있으니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다―음악을 쉽고 과감하게 풀어나간다. 해석에서는, 예를 들어 <쿼바디스>의 ‘기적과 피날레’에서 로자 자신의 해석과는 달리 스타카토 아티큘레이션을 구사하는 대목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답을 합창이 아니라 성우에게 맡긴 대목처럼 호불호가 갈릴 부분을 이곳 저곳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연주 수준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이 최고급이다. 모르몬 타버너클 합창단은 360여명의 규모로 듣는 사람을 압도한다. 1970년대에 나온 로자 지휘의 <벤허>와 <쿼바디스> 데카 음반(Vocalion)은 개정악보와 연주, 녹음 모두 훌륭하고 최고수준의 것이지만, 엄청난 물량으로 몰아붙이는 모르몬 타버너클 합창단이 들려주는 음향의 홍수에는, 적어도 오디오가 주는 쾌감이라는 차원에서는,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런 놀라운 규모로 말미암아 이 SACD의 녹음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분리하여 녹음한 다음에 이를 믹싱하는 마술을 부렸다. 그 결과, 모든 오디오 시스템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탄생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이 음반을 걸었을 때 소리가 먹먹하거나 저역 과잉으로 전체 음상이 뭉개지거나, 중고역이 명료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그 오디오 시스템은 재생주파수 대역이나 다이나믹 레인지가 협소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반면, 제대로 튜닝된 시스템에서 들으면, 광대한 소리 에너지와 음장이 펼쳐지면서 360명을 넘는 합창단의 소리가 그야말로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고 오케스트라의 악기는 제 자리에서 명료하게 들려온다. 특히 SACD 멀티채널에서는 360도를 가득 채우는 음향에 빠져든다. 중급기로도 하이엔드 2채널보다 더 훌륭하거나 혹은 그에 필적할만한 소리를 만들어낼 정도로 그 효과는 극적이다. 관현악음악, 합창음악, 영화음악, 오디오파일, 멀티채널의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모든 음악애호가들에게 강력히 추천해마지 않는다.
스토코프스키 랩소디 (0) | 2009.10.31 |
---|---|
SACD 6,000 타이틀 (0) | 2009.09.07 |
샤를르 투르느미르 : 신비한 오르간 음악 (0) | 2009.04.22 |
크라이츠베르크가 지휘한 드보르작(Dvorak) 교향곡 제6번 (0) | 2009.04.17 |
라벨의 볼레로 (0) | 2008.11.08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