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인가?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는 권력욕과 양심 사이의 영원한 갈등을 다룬 정치 드라마이다. 로자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 드라마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로자가 시대극 음악을 작곡할 때에 집중하던 학술적인 수준의 정격성 또는 당대성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뜻. 그 결과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동시대 작곡가인 존 다울랜드(John Dowland)의 아름다운 선율도 함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로자가 누구인가. 로마 시대를 느끼게 하는 그의 음악적 힘은 여전히 작품의 저류를 흐른다.
원작이 그렇듯이 음악 역시 크게 두 가지 주제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력 또는 정치적 야망을 상징하는 인물들, 즉 시저와 마크 안토니(말론 브란도), 옥타비아누스의 주제(이하 시저의 주제로 통칭한다)는 모두 동일하다. 통상 인물별로 라이트 모티브를 설정하던 로자이지만, 현명하게도 그는 이 세 사람이 얼굴만 다른 동일한 자아라고 보고 있는 것. 시저의 주제는 위압적이고 강력하며 군사적이다. 이에 반하여 고매한 인격 혹은 양심을 대변하는 브루투스(제임스 메이슨)의 주제는 비극적이고 고결한 슬픔에 가득차 있다. 이 두 주요 주제가 작품 전체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섞여 짜여지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전곡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더글러스 페이크는 로자의 음악이 대략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제1부는 두 주제가 따로 혹은 대위적으로 제시되는 서곡과 전주곡, 시저의 행렬과 축제 등 시저의 등장에 관련된 곡들로 여섯 번째 트랙까지이다. 내 생각엔 서곡과 전주곡에서 시저와 브루투스의 테마가 제시되고, 제1부는 제3번 트랙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제1부는 시저의 주제가 지배한다. 권력자들이 그렇듯이 화려하고 위풍당당하다. 제2부는 음모, 브루투스의 고뇌, 시저 암살에 이르기까지의 음악으로 12 번째 트랙까지 이어진다. 로자 관현악법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제7번 트랙인 ‘The Scolding Winds’와 주제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Brutus' Soliloquy’(제8번 트랙) 그리고 ‘Brutus' Secret’에 이르기까지 각 곡이 구조적으로 통일성있게 연결되고 있다. 정작 시저 암살 장면에는 음악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꿈(예지몽) 속에 깔리던 음악인 ‘They Murder Caesar’(제10번 트랙)에서는 현악기군으로 긴장을 조성해가며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로자의 탁월한 작곡법을 감상할 수 있다. 시저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엄한 합창곡인 'Black Sentence'(제12번 트랙)도 들을 수 있다. 제2부에서는 브루투스의 주제가 중심에 있지만 시저의 주제가 불길하게 맴돌며 제3부를 예고한다.
마지막 제3부는 브루투스와 안토니의 대립과 전쟁, 그리고 부르투스의 비극적 죽음까지 다루고 있다. 시저의 주제와 브루투스의 주제가 맞서고 갈등이 폭발하는 종결부이다. 여기서 다울랜드의 음악인 'Now,O Now, I Needs Must Part'를 소프라노가 부르고, 현악이 이를 다시 전개하는 부분(제15번 트랙인 ‘Gentle Knave’)은 긴박함 속에서 평온하고 슬픈 서정을 느끼게 한다. 로자가 다울랜드의 음악을 끌어들인 이유는 셰익스피어 시대의 관객들이 느꼈던 정서가 현재와 다르지 않다는 것,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보편 드라마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전체 곡의 구성에 잘 녹아 들어 있다. 절정은 단연 ‘Ceasar Now Be Still !’(제20번 트랙)이다. ‘The Scolding Winds’에 나왔던 카시우스의 주제와 다울랜드의 음악의 파편이 짧게 지나가고 브루투스의 비극적 주제가 흐르고 나면, 3:30경부터 시저의 주제와 브루투스의 주제가 행진곡의 반복되는 리듬을 타고 대담하게 병렬 진행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하여 생겨나는 음악적 긴장과 깊이는 전율을 일으킬만큼 사람을 압도한다. 브루투스의 주제가 패배하고 타악기가 곡을 장악하며 마무리하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진정 위대한 영화음악은 영화의 보이지 않는 차원, 즉 영혼을 드러낸다는 것을 느끼는, 희귀한 순간!
이 잊혀진 걸작의 전곡 세계초연녹음을 위하여―인트라다 레이블의 엑스칼리버 컬렉션 시리즈 두 번째 음반―더글러스 페이크, 다니엘 로빈스, 브루스 브로튼, 신포니아 오브 런던, 마이크-로스 트레버가 다시 만났다.. 브루스 브로튼 지휘, 제인 엠마뉴엘의 독창, 신포니아 오브 런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연주는 화려하고 다이나믹하면서도 섬세하다. 과장하지 않고 균형있게 곡의 핵심을 정확히 잡아내면서도 박력과 긴장미 조성에도 성공한 일급 연주이다. 특히 대폭 증원된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울림이 인상적이다. 연주와 녹음 등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이다.
이 음반이 나오기 전에는 서곡(브로튼 지휘 음반에는 원형대로 실려 있고 그밖의 다른 음반의 서곡은 원래의 서곡과 전주곡을 혼합하여 재구성한 것이 다르다. 영화를 위하여 서곡이 작곡되었으나 제작자는 차이코프스키의 이태리 기상곡이 영화의 분위기와 맞는다는 기이한 착각에 사로잡혀 영화 시작 전에 이태리 기상곡의 녹음이 나오게 하였다고 한다)이 작곡가 지휘/ 로열 필하모닉(DG), 찰스 거하트/ 내셔널 필하모닉에 의하여 각 녹음된 일이 있고, 버너드 허만이 3곡을 발췌하여 녹음한 음반, 라이네 파드베르크가 1곡을 지휘한 음반, 클리프 에델만이 1곡을 지휘한 음반 등이 있었다. 브로튼의 전곡음반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이들 음반들(다만 로자가 지휘한 로열필의 서곡 연주만은 악보가 조금 다르지만 로자 자작자연이 그렇듯이 매우 화려하며 세련된 명연이다)을 완전히 압도한다. 녹음이 특히 좋아 오디오파일 음반으로도 손색이 없다. 음반의 완성도 면에서 <아이반호> 단계보다 진화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더라면(그래도 이 음반이 기폭제가 되어 모노럴이지만 오리지날 사운드트랙 음반이 출시되었다), 다음 프로젝트로 계획 중이었던 로자의 느와르 걸작인 <이중배상> (Double Indemnity) 전곡(제임스 세더리스가 지휘한 뉴질랜드 심포니의 모음곡 음반이 코흐 인터내셔널 클래식스 레이블에서 미리 발매된 것도 전곡 녹음 포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도 들을 수 있었을 터이고 아주 훌륭한 로자 사이클이 계속되었을 터인데, 아쉬울 뿐이다.
영화음악을 뛰어 넘어 진정 위대한 음반의 계보에 들어갈만하다. 꼭 들어 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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