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펠바운드>('망각의 여로' 또는 '백색의 공포'라는 번역제목이 있다)는 로자에게 첫 오스카를 안겨준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히치콕은 로자의 음악이 영화를 압도하였다며 무척 싫어하였다. 히치콕이 다시는 로자와 함께 작업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나 대중들이나 평론가들은 로자의 음악에 호의적이었고, 제목을 ‘스펠바운드 협주곡’으로 붙인 악보가 출판되었다. 최초의 악보는 관현악곡이었는데 왜 협주곡이라는 명칭을 붙였을까? 당시 출판사(Chappel)에서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리처드 애딘셸의 ‘바르샤바 협주곡’을 출판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스펠바운드>에서도 비슷한 성공을 보고 싶어 하였다. 로자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관현악곡에 협주곡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뒤에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단일 악장의 악보를 다시 출판하였다. 이것이 주로 연주되는 ‘스펠바운드 협주곡’이다.
관현악만으로 연주되는 ‘스펠바운드’는 낭만적이고 풍성하며 함축적이다. 관현악 버전에서는 현악을 중심으로 유연한 노래가 흐르는 반면, 피아노 협주곡 버전에서는 피아노가 완전히 곡을 장악하여 리듬감이 두드러진다. 그 결과 곡의 뉘앙스가 다르다. 피아노 협주곡 버전에서는 중간부에서 테레민과 피아노, 관현악과 피아노의 대결이 두드러지고 앞부분과 재현부에서는 피아노가 주도한다. 반면 관현악 버전에서는, 기본틀은 비슷하지만, 몇 개의 테마가 더 나오고 표현이 더 직설적이다. 그러나 이것도 로자가 1948년에 직접 지휘한 당시 포로모션용 녹음과 디지털 시대에 나온 프라하 시 교향악단의 녹음에서 사용한 악보가 달라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피아노 협주곡을 살펴보기로 하자.
피아노 협주곡 판의 기본틀은 변형된 소나타 형식이다. 관현악에 의하여 제1주제가 짧게 도입되면 바로 피아노가 극히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제1주제를 리드미컬하게 전개하고. 피아노와 관현악이 함께 제1주제를 이어간다. 피아노의 분산화음 형 반주를 타고 첼로가 고귀하고 따뜻하며 포용적인 제2주제를 연주한다. 제1주제와 제2주제는 성격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앞의 것이 이성애적 낭만이라면 뒤의 것은 모성애적이다. 피아노가 제2주제를 이어받으면 다시 관현악이 제1주제로 돌아온다. 그리고 한순간 조용해지면서 전자악기 테레민의 음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이 발전부에 해당할 터인데, 공포스러운 주제가 흐른다. 전혀 다른 주제가 나왔는데 발전부라니? 그러나 이것은 제1주제를 다채롭게 발전시킨 변형이다. 아름다움과 공포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테레민의 음향은 호흡이 없이 연속적이다. 따라서 비인간적이다. 격렬한 순간이 지나가면(테레민도 사라진다) 경쾌한 스케르초 풍의 주제가 경과부처럼 잠시 나타나고 다시 제1주제로 돌아온다. 위장된 재현부가 잠시 나타나 제1주제를 가지고 기교를 부리다가 짧은 제1주제의 재현부로 이어지면 바로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제2주제가 장대하게 나타나 짧은 코다를 거쳐 곡이 장중하게 마무리된다.
‘스펠바운드 협주곡’의 선율은 로자의 음악 가운데서 가장 대중적인 것 중 하나이다. 40년대에 유행하였던 팝 발라드의 선율로 바꿔부를 만도 하다(재즈 연주가들은 왜 이 좋은 곡을 연주하지 않는가?). 그러나 값싸지는 않다. 제대로만 연주된다면 이 곡은 제목 그대로 우리를 매혹적인 주술에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로자가 보여주는 주제의 전개, 즉 한 주제의 가능성을 단일 악장에서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솜씨는 매우 뛰어나다.
◉ 레너드 페나리오, 미클로시 로자/ 헐리웃 볼 심포니 오케스트라(미국 Capitol/EMI 녹음이지만, 현재는 옆 사진 DRG 앨범에 포함된 보너스 트랙으로 구할 수 있다)
페나리오의 타건은 흠잡을 데 없이 모범적이고 로자는 늘 그렇듯이 생명력있는 리듬감을 바탕으로 곡의 핵심을 정확히 잡아낸다. 금관악기의 음에서 강한 액센트를 집어 넣어 전체적인 아티큘레이션이 강하게 들리는 것이 이 연주의 특징이다. 특별한 프레이징이나 멋진 아티큘레이션을 구사하기보다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목적지를 향하여 흐른다. 인간이 손대지 않아도 늘 흐르는 강물처럼.
오래된 녹음이어서 선명도는 약간 아쉽지만 매혹적이고 풍성하며 따뜻한 소리여서 별로 불만을 제기할 구석이 없다. 작곡가 지휘에 로자 스페셜리스트이자 당대의 인기 피아니스트였던 페나리오의 연주이니만큼 자료 가치도 높다. 흔히 볼 수 있던 음반이지만, 지금은 절판된 듯하다. 그러니, 무엇이든 있을 때 구하라!
◉ 스티븐 허프, 존 마우체리/ 헐리웃 볼 오케스트라(PHILIPS/ DECCA)
스티븐 허프는 건반의 마법사라는 별명답게 절묘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악구를 아름답게 만들어 나간다. 존 마우체리의 관현악 해석은 헐리웃 영화음악의 전통에 잘 들어맞는 풍성하고 드라마틱한 음향 조성, 분명한 악구 만들기(프레이징), 거침없는 리듬의 운용이 돋보인다. 관현악 부분의 음량이 상대적으로 다른 녹음보다 크게 잡혀 있는 것도 곡의 극적 성격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에 도움이 되고 있다. 특히 피아노와 관현악이 제1주제를 주고 받으며 리드미컬하게 나아가는 유사 재현부의 투티에서 시원시원하게 전개되는 음향이나 제2주제가 재현되는 마지막 부분에서 관현악이 피아노에 답하여 연주될 때 시원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플루트의 트릴이 주는 카타르시스 효과는 이 연주가 가장 압도적이다. 다른 연주자들이 그 동안 왜 이렇게 연주하지 않는지 의심스러울만큼 설득력있다.
마지막에 녹음 세션에 참석하였던 로자가 “브라보”라고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동감이다. 컬버 시티 스튜디오의 다른 녹음들이 그러하듯이 따뜻하고 알찬 소리이지만 음장이 다소 협소하고 피아노의 투명도는 그리 잘 잡혀 있지 않아 아주 약간 아쉽다. 필립스가 데카에 합병되기 훨씬 전에 절판된 음반이지만, 강력추천!
◉ 다니엘 아드니, 케네스 얼윈/ 본머스 심포니(EMI)
점잖고 품위있는 연주이다. 아드니의 아티큘레이션은 스타카토로 느껴질 만큼 분명하고 절도가 있다. 마치 칼로 딱딱 끊는 듯한 연주가 재미있다. 케네스 얼윈과 본머스 심포니의 서포트는 독주자를 돋보이게 하는 데에 주력하면서도 균형잡혀 있다. 녹음과 연주 모두 잘된 음반이지만, 허프와 굳이 비교하자면 극적인 화려함이 다소 부족하다.
녹음의 특징은 이렇다. 오케스트라는 좀 멀리 잡혀 있고 피아노가 주도한다. 모범생적인 연주인데다가 염가음반이어서 부담없이 이 곡을 접하기에 좋다.
◉ 얼 와일드, 찰스 거하트/ 런던 프롬나드 오케스트라(IVORY CLASSICS)
좋은 의미에서 곡의 대중성을 멋지게 살려낸 연주이다. 원곡에서 일부를 생략하여 8분 정도의 길이로 연주하고 있다. 제시부의 제2주제 다음에 나타나는 제1주제의 관현악이라든가, 재현부에 들어가기 전에 제1주제를 부분 부분 풀어나가는 유사 재현부라든가, 마지막 부분에서 관현악 총주로 장엄하게 종지되는 부분 등이 생략되어 있고 제시부에서 제2주제에 들어가기 전의 피아노 부분이 일부 편곡되어 있는 등 다른 음반들과는 악보에 약간 차이가 있다.
이 연주는 첫 부분부터 이 곡의 대중성을 피해가지 않고 정면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쓰고 있어 듣기에 무척 재미있다. 템포는 매우 빠르고 와일드의 손가락은 스티븐 허프만큼 정교하지는 않으나 거침없이 건반을 내지른다. 전반적으로 가볍지만 시원시원하고 직설적인 힘에서 나오는 매혹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테레민이 사용되어 있어 원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큰 장점. 1965년 녹음이지만 매우 복각이 잘 되어 있고 고음질용 HDCD에도 대응한다. 들을수록 즐거운 음반!
◉ Joshua Pierce and Dorothy Jonas, 엘머 번스타인/ 유타 심포니 오케스트라(Varese Sarabande)
피아노 듀오에 의한 전혀 다른 버전이다. 22분에 이르는 긴 연주시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영화에 나온 거의 모든 테마가 나타난다. 아마 1982년에 음반을 제작하면서 LP 한 면을 모두 채우려고 기획되었던 듯. 그러니 이 음반은 지금까지의 음반들과는 별개로 들을 가치가 충분하다. 악보는 영화에 삽입된 음악을 충실히 구현하려는 의도로 구성된 것같다. 협주곡의 전개부에서만 테레민을 사용한 로자의 원래 의도와는 다르다. 그러나 작곡가 앞에서 그의 승낙을 받고 구성된 악보로 연주한 것이니만큼 잘못된 것은 없다.
첫 도입 부분부터 테레민(여기서는 옹드 마르티노)이 공포의 분위기를 만들다가 갑작스럽게 아름다운 제1주제가 피아노에 의해 나타나는 도입부는 어딘가 경박스럽기도 하다. 이것은 영화의 오리지날 사운드트랙과는 같은 구성이지만 현악이 지배하였던 사운드트랙에서는 현의 레가토가 주는 유기적인 흐름으로 인하여 이러한 느낌은 발생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피아노는 테크닉에 문제는 없지만 타건이 대체로 가벼워서 곡의 느낌을 전반적으로 가벼워 보이게 한다. 옹드 마르티노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도 난데없이 나타난다. 대중성을 앞에 내세워 곡의 무게를 더욱더 덜어내는 느낌이다. 긴 연주시간을 택하였다면 오히려 조금 더 진중하고 스케일 크게 만들면 좋지 않았을까. 그러나 예를 들어 12분 정도 부분에서 옹드 마르티노(테레민의 현대판 악기)가 제1주제를 서정적으로 연주하는 부분은―로자보다는 엘머 번스타인이 “나의 왼발” 등에서 즐겨 사용하는 어법을 닮았다―뜻밖의 매력을 준다. 테레민을 일관되게 공포나 환상의 의미로 사용하였던 종래의 스펠바운드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매력적이고 즐길만 하지만 구성의 통일성이라는 면에서는 다소 아쉽다. 그러나 22분의 연주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만큼 음악적 아이디어 자체는 충만하다. 그것은 물론 전적으로 로자 음악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
* 다른 음반들은 다음 기회에 살펴 보기로 한다.
새로운 시작-로자(Rozsa): 관현악곡 제1집 (0) | 2011.0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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