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고 관능적인 톤이 돋보이는 바이올리니스트 로버트 맥더피가 하이페츠의 아성에 도전하였다. 결과는? 불꽃튀는 열정과 집중력을 자랑하는 하이페츠의 아성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겠지만, 적어도 맥더피는 하이페츠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데에 성공하였다. 맥더피의 가장 큰 미덕은 여유 있는 호흡 속에서 곡에 담긴 뉘앙스를 다채롭게 표현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강약과 완급의 대비를 극적 긴장 속에서 살려낸다는 것.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맥더피는 이 걸작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연주하는 것같다. 목숨을 건듯한 연주라든가, 마치 이 작품이 세계최고의 걸작인양 연주한다라는 식의 외국 평론가들의 표현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맥더피의 음빛깔은 그의 다른 음반에서 듣는 것보다 더 달콤하고 더 관능적이다. 그의 보잉은 다소 여성적인 듯한 평소의 음색보다, 당연히(!), 더 격정적이 되었다. 미클로시 로자 음악의 낭만주의적 격정과 신고전주의적 형식미학 사이의 균형을 지켜가면서도 헝가리 집시처럼 피들을 하는 대목(예를 들어 제3악장)은 맥더피의 연주에서만 들을 수 있는 묘미이다. 그러면서도 아련한 그리움을 나타낸 둘째 악장의 서정성을 아름답고 품위있게 표현해낸다. 여기에 요엘 레비와 아틀란타 심포니는 하이페츠와 협연한 월터 핸들, 댈러스 심포니(RCA), 아나스타시아 키트루크와 협연한 야블론스키, 러시아 필하모닉(NAXOS)보다 더 뛰어난 연주력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레비는 정교하게 음악을 만들어가는 지휘자이지만 폭발적 열정이 아쉽기도 했었는데, 다행히 여기서는 충분히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가 만들어내는 음의 요철이나 다이나믹, 대위법은 매우 설득력있게 들린다. 물론 아주 격정적인 순간, 예를 들어 제1악장의 후반부에서 제1주제가 격렬하게 질주하는 대목에서 그야말로 아주 약간만 더 격정적이었으면 하고 아쉬워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하는 일에 너무 완벽을 기대할 필요는 없겠다. 맥더피 연주의 또 다른 매력은 세번째 악장의 종결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세번째 악장을 위하여 로자는 두 가지 종결부를 작곡해두었다. 하이페츠는, 평소 그의 에고를 반영하여, 독주자의 기교 과시 후 단 한 방의 투티로 끝나는 버전을 선택하였고, 그루프만(KOCH)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맥더피와 레비는 음반에서는 처음으로, 관현악이 맹렬히 질주하면서 종결하는, 진정으로 멋진 버전을 연주한다. 텔락의 탁월한 음향기술에 힘입어 그 효과는 압도적이다.
린 해럴은 강인하고 추진력 있는 첼로 협주곡을 만들어낸다. 그의 집중력은 특히 첫째 악장과 셋째 악장에서 빛난다. 모두 끊임없이 앞으로 질주하는 역동적인 악장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해럴의 추진력은 레토(SILVA)와 스미스(KOCH)의 연주를 허약한 것처럼, 진중하고 호흡이 긴 라파엘 월피슈의 훌륭한 연주(ASV)조차 어딘가 굼뜬 것처럼 들리게 만들 정도이다. 둘째 악장은 어떨까. 헝가리 민족의 절규를 담은 듯한 둘째 악장에서 해럴의 첼로는 흠잡을 데가 없이 정확하다. 반면 너무 냉정하여 다소 밋밋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오히려 감성적인 스미스, 음표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듯한 월피슈나 레토의 연주가 둘째 악장의 정서에 더 들어맞는 것이 아닐까. 연주력은 분명히 해럴이 단연 뛰어나지만, 느린 악장에서는 감성적으로 좀 더 녹아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평하자면 그래도 느린 악장에서조차 해럴의 연주가 가장 앞선다. 첼로 협주곡에서도 레비와 애틀란타 오케스트라는 최상의 연주력을 과시하여 세드리스의 뉴질랜드 군단(KOCH)이나, 그 보다 한 수 아래인 지방색 강한 펙슈 심포니(SILVA)를 압도하면서 스케일 큰 곡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다. 한편 월피슈와 협연한 배리 워즈워스 지휘,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의 음반(ASV)도 관현악의 정교함에서는 애틀란타 군단과 쌍벽을 이룰만큼 탁월한 수준이다.
맥더피와 해럴 두 사람이 함께 한, 이중협주곡 '신포니아 콘체르탄테'의 둘째 악장인 주제와 변주도 훌륭한 연주이지만, 완전한 일체감을 느낄 정도로 완벽한 융화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두 사람이 각 협주곡에서 보여준 성과가 똑같이 나타났으면 좋았을 터인데 조금 아쉽다. 그러나 두 독주자의 개성이 충돌하는 듯한 재미와 오케스트라 독주자들의 놀라운 연주력으로 말미암아 흡인력 자체는 대단한 편이다. 여하튼 커플링으로 손색 없는, 높은 수준이다.
텔락의 녹음은 선명하고 위력적이어서 특히 제3악장 도입부의 팀파니는 유례 없이 폭발적으로 들릴 정도이다. 다만 저역이 정확하지 못한 시스템에서는 저역의 경계가 다소 불분명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바이올린이 다소 근접 녹음된 것이 못마땅할 오디오파일도 있을 것이지만, 내 생각엔 맥더피의 생동감있는 활긋기를 느낄 수 있어 오히려 좋다. 이런 저런 지적을 하였지만, 사소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음반은 로자의 연주회 음악 녹음 중 단연 최고수준이다.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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