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크든 작든 꿈을 꿉니다. 로자의 <아이반호>를 음반으로 만나는 것은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CD가 음반계를 평정하기 이전에는 원하는 클래식 음반 하나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본 평론가들의 영향을 받은 명반안내서에 나온 음반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지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아티스트가 연주하거나 혹은 바로 개봉된 영화의 사운드트랙 음반이 아니면, 국내에서 고전 영화음악 음반을 구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벤허> 음반조차 재개봉 시점이 아니면 구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 갈증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하기 쉽지 않을겁니다. 그러니 1952년 영화 <아이반호>(우리나라 개봉제목은 ‘흑기사’)의 음악을 구해 듣기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로자의 음악을 듣기 위하여 AFKN에서 방영하는 텔레비전 음향을 카세트 녹음기로 녹음하였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텔레비전 음향을 녹음하였으니 대사와 효과음, 그리고 잡음이 어우러진 열악한 음질이었지요. 게다가 테입을 아끼려고 영화를 보면서 음악 부분만 녹음하다보니 음악이 시작되는 앞 부분이 늘 잘릴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그 테입을 듣는 시간은 행복하였습니다. 거의 외울 정도로 반복하여 들으면서 저는 <아이반호> 음악이 정말 뛰어난 걸작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다채로운 선율과 그것을 대위적으로 엮어내 전개하는 작곡가의 탁월한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렇게 훌륭한 음악이 연주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정의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지요. 내가 지휘자라면 이 음악을 반드시 연주할 터인데 라는 불가능한 꿈도 꾸면서. 그런데 머나먼 미국 땅에도 같은 꿈을 꾼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영화음악 전문인 인트라다(Intrada) 레이블을 경영하는 더글러스 페이크(Douglas Fake)는 <아이반호> 악보를 복원하여 음반을 만들어냅니다. 페이크는, 로자는 연주회에서도 청중을 가진 작곡가이므로 세계최고수준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그의 영화음악 음반을 클래식 애호가들도 찾게 될 것이며, 모든 음표가 오리지날 그대로 연주되어야 곡의 전체적 통일성이 확보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음반은 그 신념의 결과물입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MGM 대학살’(MGM Holocaust)로 불리는 영화음악사의 대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주차장 공간을 늘리기 위하여 스튜디오에서 보관하고 있던 영화음악 총보들을 소각하게 된 것이지요. 작곡가들조차 자신의 영화음악이 특별한 모음곡 형태가 아니면 다시 연주되거나 녹음된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방화에 견줄만한 영화음악사의 큰 비극이었습니다. 소실된 많은 악보 중에는 로자의 <아이반호>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다행히 모든 음표가 보존된 로자의 오리지날 스케치는 남아 있었고, 이를 토대로 로자의 제자인 다니엘 로빈스가 영화를 들으면서 관현악 총보를 복원하게 됩니다(할리우드 시스템에 따라 로자의 MGM 영화음악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유진 자도르(Eugene Zador)가 맡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관현악법의 대가인 로자가 모든 관현악법을 지시한 상태에서 자도르에게 사보에 가까운 마무리를 맡겼던 것이니 관현악법에 능하지 못하여 전문 오케스트레이터에 의존하는 경우와는 다릅니다. 따라서 클래식 음악의 용어법으로 오케스트레이션이라는 단어를 로자 영화음악에 쓰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전람회의 그림>에서 라벨이 한 역할을 연상하면 곤란하지요).
여하튼 다니엘 로빈스는 힘겹게 악보를 복원해냈고, 더글러스 페이크는 영화음악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표현해줄 지휘자로 우리 시대의 뛰어난 영화음악가인 브루스 브로튼을 지휘자로 삼고,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와 녹음팀을 찾아 영국으로 갑니다. 그리하여 영화음악 분야 녹음에서 제1급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신포니아 오브 런던이 런던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1994년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 <아이반호> 전곡(엄밀히 말하면 사자왕 리처드의 보컬 발라드와, 프롤로그에 나오던 멜로디를 플루트 독주로 다시 연주하는 짧은 부분이 빠져 있으니 전곡은 아닙니다. 전자는 로버트 테일러가 부르는 노래여서 뺀 것이지만, 후자는 착오로 인한 누락이라고 합니다)을 녹음하게 됩니다. 녹음은 유명한 마이크 로스-트레버가 맡았지요. 엄청난 예산과 여러 사람의 노력이 투입된 결과, 잠자고 있던 로자의 걸작은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엑스칼리버 컬렉션 시리즈의 제1호로 탄생한 이 음반은 이어 로자의 또 다른 걸작 <줄리어스 시저>의 복원과 녹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인트라다에서 <그라모폰>과 <팡파르>같은 클래식 음반잡지에 광고까지 올리며 홍보하였지만, 영화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꽤 많은 판매량을 올렸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자 팬이 아닌 클래식 애호가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은 탓인지 투입비용에 대비하여 수익을 올리지는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세 번째 프로젝트였던 <이중배상>(Double Indemnity)의 전곡 녹음은 실현되지 못합니다. 로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왔던 같은 시리즈의 <스펠바운드> 녹음은 이런 ‘재정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아쉽게도, 신포니아 오브 런던보다 연주력이 다소 처지는 슬로박 방송교향악단을 택하여 이루어진 것이지요.
<아이반호>는 악보복원, 연주와 녹음 모두 탁월한 음반입니다. 특히 엑스트라 단원까지 증원된 신포니아 오브 런던의 금관악기 군은 화려하고 세련된 광채를 뿜어내고, 영국 오케스트라의 정교함은 동유럽 악단들의 앙상블과는 차원을 달리 합니다. 게다가 세계 최고의 영화음악 전문연주단체라는 신포니아 오브 런던의 명성에 걸맞게 극적인 긴장감이나 역동감을 표현하는 것도 단연 일품입니다. 브로튼의 해석은 로자의 오리지날에 비교하면 호흡에 여유가 있고 템포도 약간 느립니다. 물론 완전무결한 절대명연이라고 하기에는 망설여지는 대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면 굳이 사운드트랙의 연주와 비교하며 장단점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명한 녹음에 힘입어 로자의 대위적 선율도 세부가 잘 살아납니다. 특히 아이반호의 주제와 레베카의 주제가 병렬진행하는 ‘레베카의 사랑’이나, 수많은 주제와 동기들이 엮어져 장대하게 펼치지는 ‘전투’와 그에 이어지는 ‘색슨의 승리’는 그야말로 대편성 관현악의 매력을 멋지게 보여줍니다.
<아이반호>에는 성격이 전혀 다르면서 아름다운 두 가지 사랑의 테마가 나옵니다. 하나는 레이디 로위너의 주제로 원숙하고 기품있는 귀족 여인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음악입니다. 중세 프랑스 북부지방의 민요를 원용하였다고 하지요. 다른 하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레베카의 비통한 주제입니다. 히브리 풍의 선율로 그 뒤의 작품인 <벤허>에 나오는 사랑의 테마를 예감케 하는 유사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당당하게 영웅적인 아이반호의 테마를 비롯하여 색슨, 노만, 보아 길베르, 사자왕 리처드, 시종 웜바, 세드릭 경, 심지어 성문격파용 병기인 배터링 램(battering ram) 등등 다채로운 인물과 물건, 설정에 따른 다양하고 멋진 주제들이 정교하게 짜여지면서 종횡무진 귀를 즐겁게 합니다. 이처럼 화려하고 찬란하며 흥미진진하게 잘 만들어진 관현악 음반을 만나기는 진정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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