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와 1960년대 초기까지 헐리웃에서는 성서사극이나 역사극이 많이 만들어졌다. TV에 빼앗긴 관객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하여 거대한 스케일의 컬러 영화가 필요하였기 때문. CG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이니 엄청 큰 규모의 세트와 화려한 의상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역사극은 그 자체만으로 어마어마한 구경거리였을 것. 작은 브라운관과는 차원이 다른 70밀리(또는 시네마스코프, 시네라마, 비스타비전 등등) 대형화면과 멀티채널 입체음향이 만들어내는 장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다시 영화관을 찾았다.
사극이 유행한 데에는 매카시즘의 광풍(狂風)이나 청교도 윤리관에 터 잡은 검열을 피하기 위한 상업적 고려도 한몫했다. 현대극에서 반라의 여자가 춤을 추는 장면은 음란하므로 검열대상이 되지만, 성서사극에서 반라의 여자들과 난교 파티를 벌이다가 신의 징벌을 당한다는 설정은 윤리적이고 신앙을 고취하니까 허용된다는 식이다.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위선적인 기준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검열관의 눈은 이처럼 제 멋대로(恣意的)이다. 이러한 미국 검열제도의 위선적인 허점을 가장 잘 활용한 영화인이 <십계>를 만든 세실 B. 데밀.
1950년대부터 <쿼바디스>, <성의>, <벤허> 같은 대작들이 잇달아 나왔지만 정작 예수의 얼굴과 목소리가 모두 드러난 것은 1961년 니콜라스 레이가 연출한 <왕중왕>에 이르러서였다. 이 영화는 스페인의 사뮤엘 브론스톤이 제작하였는데, 당시 장기상영 중이던 <벤허>와의 경쟁을 우려한 MGM이 배급권을 확보한 덕분에 <왕중왕>에 당대 최고의 영화음악가였던 미클로시 로자의 음악도 지원된다. 외관상으로는 미국영화이지만, 스페인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스페인에서 출발한 영화여서인지 미국 영화답지 않게 <왕중왕>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베드로가 각별한 존재로 부각되는 등 친(親)카톨릭 성향이 두드러진다. 단순히 종교를 떠나 교황의 추천을 얻으려는 브론스톤의 '사업적 감각'이 반영된 탓일 수도 있다. 경위야 어떻든 영화의 가톨릭 색채는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이것이 미국 개신교계의 반발을 샀을 터. 조지 스티븐스의 <위대한 생애>(The Greatest Story Ever Told)가 연이어 만들어진 이유도 거기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불과 몇 년 사이에 거액을 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 영화를 연이어 만들어 내겠는가(혹은 제작기간이 길어 우연히 중복된 탓일 수도 있는데,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처한 사회적-역사적 맥락 및 사람들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강조하였던 니콜라스 레이와는 달리, 조지 스티븐스는 영화의 분위기에 극적 요소를 거의 지우고 예수의 정적(靜的)인 면모를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스웨덴 배우 막스 폰 시도우가 열연하는 예수의 모습은 근엄함 그 자체이다. 성당 '벽화'와 같은 화면에, 호흡이 길어 템포가 느리며 조용하다. 70밀리보다 더 큰 시네라마로 촬영하였지만, 그랜드 캐넌의 장관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대작 같은 느낌도 별로 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세례 요한 역의 찰턴 헤스턴에서 백부장 역의 존 웨인까지 엄청난 스타들이 조연이나 카메오로 출연하지만, 그 효과도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조용하고 느린 영화의 흐름에는 어떤 강력한 힘이 있다. 하지만 역시 절제와 균형이라는 말이 자꾸 떠오를 정도로 일말의 아쉬움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감독의 의도는 일관되게 알프레드 뉴먼(Alfred Newman)의 음악에도 관철되었다. 뉴먼의 그리스도 주제는 바버(Samuel Barber)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듣는 듯한 경건한 정적미를 담고 있고, 그러한 분위기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흐른다. 물론 <성의>를 연상시키는 강력한 합창이 나오는 대목도 있지만, 뉴먼의 특기인 화려하거나 장대한 음악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새 시대를 여는 선언과 같은 로자의 <왕중왕> 또는 뉴먼의 낭만적이고 화려한 전작 <성의>처럼 강력하지도 다채롭지도, 독창적 영감이 돋보이지도 않지만, <위대한 생애>의 음악에는 절제의 미학이 있고 그것이 영화에 어떤 진실성을 더한다. 그렇게 가야만 했다. 문제는 항상 자기 몫을 넘어 무엇인가 하려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생긴다. 뉴먼의 음악적 업적을 망치는 것은 감독의 요구로 사용된 클래식 음악이고, 이것은 결국 영화 자체도 망친다.
먼저 뉴먼은 사도들의 주제로 리스트의 전주곡 일부분을 원용한다. 다행히 그 숭고한 장엄미는 뉴먼의 스타일로 변형되어 영화의 맥락에 조화롭게 스며든다. 문제는 베르디와 헨델, 특히 헨델이다. 영화의 전반부 마지막인 라자로의 부활 장면 뒷 부분에서 헨델의 ‘할레루야’가 사용되면서 영화의 사실성은 심하게 흔들린다. 영화의 종결부에 가면 뉴먼의 음악은 힘을 잃는다. 십자가 장면에서 베르디의 레퀴엠이 나타나고 피날레인 부활 장면에서 헨델의 걸작 ‘할렐루야“가 다시 울려 퍼지면서, 감동적이어야 할 마지막 장면은 영화음악사상 가장 생뚱맞은 분위기가 되고 만다. 사실감 있던 영화의 분위기가 갑자기 학생들이 만든 교회 주일 연극처럼, 혹은 바로크 시대의 음악극처럼 희화화되는 것. 물론 저작권료도 받지 못한 헨델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 아무리 위대한 음악이라도 맥락을 벗어나 사용되니, 영화도, 음악도 함께 추락하는 것. 감독의 의도는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적 표현을 보여주려던 것이라지만, 사태는 뉴먼이 우려한 바대로 가고 말았다. 자기 분야가 아닌 것까지 통제하려던 감독의 욕망이 만든 참담한 결과이다.
영화 개봉에 맞춰 나왔던 영화의 사운드트랙 LP 앨범에까지 베르디의 레퀴엠, 헨델의 할렐루야가 그대로 실려 있어 뉴먼 같은 영화음악계의 거물조차도 그리 강한 발언권을 갖지 못했던 1960년대의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진다.
혹시 뉴먼 자신이 조지 스티븐스의 생각에 결국 동조했던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베르디나 헨델이 사용된 장면에서 따로 뉴먼 자신의 음악을 작곡하여 두었기 때문에 압력에 굴복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 물론 베르디나 헨델은 훌륭한 대작곡가이지만, 뉴먼의 원곡이 더 드라마틱하고 영화에 잘 맞는다. 비교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한 번의 청취로도 기억에 남을만큼 강력한 영감이 넘치는 곡이었다면 스티븐스의 마음을 돌려 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조금 들기도 한다. 그러나 책임은 여전히 스티븐스에게 있다. 탈락된 비운의 원곡을 듣는 길은, 헨델이 수록된 영화 개봉 당시의 사운드트랙 앨범 1장, 뉴먼의 '진짜' 사운드트랙 2장이 수록된 3장 CD 세트를 통해서이다.
<벤허> 작곡 당시 그리스도 탄생 장면에서 ‘Adeste Fideles’를 집어넣자는 윌리엄 와일러의 고집을 꺾었던 로자는, 뉴먼이 조지 스티븐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어야 했다고 아쉬워하였다. 그 점에서 보자면 전문가로서 예술성을 수호하지 못한 뉴먼에게도 책임이 있다. 어떻게 보면 <엘시드> 음악 중 일부를 상의 없이 덜어냈다는 이유만으로 대제작자 브론스톤과 결별할 정도로―<북경의 55일>이나 <로마제국의 멸망> 같은 돈 되는 작품을 포기하였다는 뜻. 그 결과 우리는 영화의 맥락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독특한 티옴킨의 음악을 듣게 된 셈. 그래도 나는 로자가 음악을 맡았더라면 이들 영화가 더 살아났을 거라 믿는다. 아울러 더 뛰어난 음악이 남았을 것이라는 '편견'어린 상상'도―강한 신념과 결기를 지닌 음악지상주의자 로자와, 작곡가이면서도 뛰어난 행정가여서 타협과 조정에 능하기도 했던 뉴먼이 가는 길은 애당초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로자의 말이 옳다. 충분히 훌륭한 작곡가보다 음악을 더 잘 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감독이나 제작자가 늘 문제이다. 영화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가 대체로 그렇다. 각자에게 그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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