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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의 에베레스트-로자: 벤허(BEN-HUR) 전집

Miklós Rózsa

by 최용성 2012. 3. 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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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벤허다. 필름 스코어 먼슬리(FSM)에서 만든 5장 박스세트는, 정말, 물건이다. 어지간한 정성과 사랑 없이는 만들 수 없는 음반이다. 우선 영화 순서대로 수록한 2장의 사운드트랙 전곡 앨범은 음악성 면에서 라이노 버전을 훌쩍 앞지른다. 음악의 흐름을 끊어놓는 인위적인 선곡이나 편집이 전혀 없다(다만 음반 1의 트랙 21에서 22로 넘어갈 때 메살라의 테마가 두 번 나오게 한 대목은 마음에 안 든다). 영화에서 들린 음악 자체에 구애받지 않고 작곡가의 의도를 최대한 반영한, 그야말로 "이상화된" 전곡앨범이다. 물론, 나라면 조금 다른 선곡/구성을 택하였을 것이니, FSM 제작진의 선택이 모든 이의 이상이나 취향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평균적 이상의 근사치에는 접근하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음원 선택에서도 음악적 혜안이 돋보인다. 베들레헴의 별/동방박사의 예배 부분에서 인위적 단절이 아니라 두 부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음원을 선택하여 뒷날 콘서트 버전처럼 곡의 통일성을 돋보이게 한 대목, 아프리카인들의 춤(Fertility Dance)에 라이노 버전에서 빠트린 북이 생생히(!) 들어간 대목, 전차들의 행진에서 영화에 실린 축약본(라이노 버전)과 달리 도입 리듬 부분과 경과부 등이 생생히 살아 있는 음원을 선택한 대목 등등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정도로 제작진의 내공이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라이노 버전에서 누락된 메살라 팡파르도 들을 수 있다. 트랙 수도, 산만하였던 라이노 버전과는 달리, 적절하게 배분되었다. 앞으로도 이 첫 두 장을 계속 자주 듣고 점점 더 사랑할 것 같다.

     

 

    남은 디스크 3장에는 오랜 세월 사운드트랙으로 군림하던 카를로 사비나 지휘 앨범, 2종의 에리히 클로스 지휘 앨범과 함께, 사운드트랙 미사용/ 대체 음원들이 꼼꼼하게 수록되어 있다. 로자의 다양한 아이디어들, 음악적 사고의 발전 과정을 체험할 좋은 기회.

 

    사비나 앨범 ‘개선행진’의 첫 도입부나, ‘기적과 피날레’ 앞부분 등이 이미 영화를 위하여 작곡 ․ 연주되었으나 단지 영화에 쓰이지 않았을 뿐이라는 점, 곡 초반부 클라이막스라고 할 ‘사막’ 부분에서는 최종 곡과 현저히 다른 초기 아이디어가 있었던 점 등등은, 진정, 큰 발견이다. 전차경주를 예고하는 최초의 간주곡(두 번째 클로스 앨범의 '서곡' 도입부와 종결부에 쓰인 주제이다)도 들을 수 있다. 로자의 음악적 아이디어가 변화하는 과정은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연구대상으로도 자료가치가 높다. 특히 <벤허> 음악에 익숙해져 있는 귀에는 쓰여지지 않은 음원들이 오히려 더 신선하고 즐겁게 들리기도 한다. 마지막 음반에는 2개의 희귀 보너스가 마지막 두 트랙에 실려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쿼바디스> 전주곡이다.

 

   디스크 3~5에 수록된 카를로 사비나와 에리히 클로스 지휘 앨범에 관하여는 설명이 좀 필요하다. 원래 영화에는 로자 지휘로 일부 음원이 이탈리아에서, 대부분의 음원이 MGM 오케스트라에 의하여 미국에서 녹음되었다. MGM 레코드사는 사운드트랙 대신 새 녹음으로 앨범을 내던 당시 관행에 따랐다. 비용절감을 위한 계약으로 인하여 미국이 아니라 로마에서 앨범 녹음이 이루어진다. 이에 반발한 미국 음악가 조합에서는 로자에게 미국 밖에서는 지휘하지 말라고 명하였고, 그 결과 카를로 사비나가 로마 교향악단(녹음을 위하여 임시편성)과 로마 바실리카 합창단을 지휘한 음반이 공식 사운드트랙 앨범으로 나왔다.

 

 

    이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MGM은 첫 앨범에 수록되지 않은 곡들을 모아 에리히 클로스가 지휘하는 프랑켄란트 심포니 오케스트라(현재 뉘른베르크 심포니)의 <More Music from BEN-HUR> 앨범을 발매한다(소니에서 사비나 앨범과 묶어 2장의 앨범으로 발매한 적이 있다). 이것이 이번 전집 박스 다섯번째 음반에 수록된 두 번째 클로스 앨범이다. 기이하게도 사비나 앨범에서는 영화의 하일라이트인 전차 경주 장면에 사용된 '빵과 서커스', '전차 행진' 같은 중요곡들이 빠져 있었는데, 모두 두 번째 클로스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전차 행진'과 '그리스도의 테마'는 뉘른베르크가 아닌 로마에서 녹음하였다는 점.

 

 

    그럼 첫 번째 클로스 앨범은? 사비나 앨범과 동일한 곡을 합창단 없이 프란켄란트 심포니의 연주로 MGM 레코드 산하 염가 레이블인 라이온(Lion) 레코드에서 발매한 것. 호화사양인 사비나 앨범의 값싼 대체재인 셈. 그런데 클로스 앨범을 에리히 클로스(실존 지휘자임)가 아니라 로자 자신이 지휘하였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돌았다. 프란켄란트 심포니는 <벤허> 앨범 이전과 이후에도 로자와 여러 차례 음반작업을 관현악단이기도 해 이런 의문이 커졌을 것. 결국 로자가 나중에 두 번째 클로스 앨범에 한하여 이를 인정하였다고 하는데(캐나다에서 로자가 지휘한 연주회가 끝난 뒤 사인을 받던 팬이 물어본 말에 대한 대답이라고 하니 공식적인 인정은 아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시 조합의 압력 때문에 꼼수를 동원한 셈.

 

    FSM의 박스 세트에는 이들 3종의 LP 버전이 세번째 음반부터 차례대로 실려 있다. LP 앨범은 곡의 전개와 오케스트레이션 등이, 영화에 최적화된 사운드트랙과는 달리, 순수한 감상에 적합하게 재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로자가 영화음악 앨범을 내는 일관된 방식이었다.

 

이 음반이 염가 음반으로 나온 첫번째 클로스 앨범이다.

 

    그렇다면 사비나 앨범과 중복되는, 이번에 최초로 CD화된 첫 번째 클로스 앨범은 어떨까? 만약 이 앨범이 로자가 직접 지휘한 것이라면 기대가 클 수도 있겠지만, 사비나 앨범보다 대체로 연주력이 처진다. 물론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모두 처지는 건 아니다. 로자 자신은 몇몇 부분이 사비나 앨범보다 더 훌륭하다고 칭찬했다는데, 그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주곡에서 벤허 주제가 나오기 전 경과부에서 벨 소리가 2배 정도 더 많이, 바쁘게, 나와 템포가 빠르게 느껴지는 대목(원곡보다 못하지만 재미있다는 뜻이다. 이 부분 때문에 첫 번째 클로스 앨범은 로자가 지휘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설득력이 있다), 리듬 처리가 가볍고 탄력적이어서 사비나 버전보다 경쾌하게 들리는 ‘로마군 행진곡’(이를 두고 로자는 이탈리아인에 비해 독일인들은 행진할 줄 안다고 말했다나. 그리고 사비나 앨범의 로마 행진을 이것으로 대체하자는 의견도 제시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렇게 되진 않았다) 같이 흥미로운 부분들도 없지 않다. ‘개선행진’은 사비나 앨범의 음원과 같다. 

 

    녹음을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풍성한 울림이 돋보이는 사비나 앨범에 비하여 첫 번째 클로스 앨범은 음향이 건조한 대신 스테레오 분리도가 뚜렷하다. 전체적으로는 사비나 앨범에 비하면 울림이 적고 오르간이 전자악기처럼 들리기도 하며 결정적으로 합창도 빠져 있어 아무래도 불리하다. 그래도 사비나 앨범과는 해석이 다르고 사비나의 음반에서 비교적 덜 들리던 성부가 더 드러나기도 하니 비교하여 듣는 재미도 적지 않다(로자가 선호한 프란켄란트(뉘른베르크) 심포니의 연주들을, 예외도 있지만, 나는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다. 장점이라면 윤곽이 명료한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지만, 내 짧은 귀로 듣기에는 각 파트가 자연스럽게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며 특히 현악이 건조하고 피치도 부정확한  듯 느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로자가 이 악단과 자주 작업한 것이 아쉽다. 그나마 두번째 클로스 앨범만 해도 연주력이나 녹음이 훨씬 좋다. 하기야 값싼 첫 번째 클로스 앨범이 고가의 사비나 앨범을 능가하였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을 것). 여하튼 이들 3장의 앨범은 사운드트랙과 독립된 콘서트 버전을 연주한 것이어서 그 자체로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여기에 1970년대에 로자가 내셔널 필하모닉을 지휘한 데카 앨범(종합적으로 가장 탁월하다), 4곡을 지휘한 뉘른베르크 심포니의 캐피톨 앨범, CBS/소니에서 나온 서곡, 전차행진 2곡의 라이브 앨범까지 더하면 로자 자신이 지휘한 <벤허>의 음원은 거의 전부 모이는 셈).

 

    리마스터링은 기존에 나온 어떤 CD 버전과도 다르다. 음량이 커진 덕분인지 선명하고 힘차며 저역의 양감이 늘었다(음원 비교를 할 때 사람들은 큰 소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점이 반영된 리마스터링일 수도 있다. 오디오 시스템의 정밀도에 따라서는 양감이 인위적으로 증폭되었고 클리핑이 생긴다고 느낄 여지도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 물론 세월을 잊게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성과이다. 북클릿도 잘 만들었다. FSM은 자세한 곡 해설을 온라인으로 미뤄두었지만, 북클릿에 제공된 기본적인 해설과 사진자료들만으로도 메이저 레이블이 만들어내는 음반들의 평균치보다 훨씬 뛰어나고 양적으로 풍부하다. 한 작곡가의 음악적 아이디어가 어떻게 변화되고 구현되는지 낱낱이 보여주는 대기록답다. 

 

    음반 하나하나에도 영화 스틸을 컬러로 입혔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 번째 디스크에서 실수가 생기고 말았다. 벤허가 전차를 모는 사진이 뒤집혀 인쇄된 것. 이건 옛날부터 영화스틸 사진에서 종종 생기는 실수인데, 오른쪽 방향으로 진행하여야 할 전차가 왼쪽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것만이 지금까지 발견한 유일한 옥의 티인데, 이 정도면 애교라고 보면 될 것.

 

    음악적으로는 물론이고 음반 자체의 가치 면에서 보더라도 이번에 나온 전집 박스세트는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 SACD 포맷을 활용하여 멀티 채널로 복원된다면 모를까, CD 버전으로는 최종 결정판이 아닐까. 그야말로 큰 선물이다.  이제 사운드트랙은 잊어버리고 로자의 음악적 아이디어 자체에 부합할 창의적인 <벤허> 전곡 앨범이 새로 연주되고 녹음되어야 할 때이다. 기이하게도, 사운드트랙 음원이 잘 보관된 탓인지, <벤허>의 디지털 전곡 녹음은 아직 이루어진 적이 없다.  영화음악의 에베레스트에 걸맞는 새로운 해석을 들려줄 이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새로운 기다림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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