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이 걸렸다. 로자가 쓴 모든 음악이 음반으로 나오기까지. 결국, 로자의 첫 성서극 음악은 제 길을 찾았다. 1951년 영화 <쿼바디스>(Quo Vadis)는 걸작은 아니지만, 영화를 위하여 작곡된 음악은 걸작이다. 헐리웃 영화음악 중 시대적 정격성에 기초하여 작곡된 첫 작품이라 영화음악사에서 큰 의미도 있다. 이처럼 중요한 곡이지만, 정작 <쿼바디스> 전곡 사운드트랙은 나온 적이 없다. 음악 트랙이 유실되었기 때문. FSM에서 발매한 15장 세트인《미클로시 로자 명곡집》(Miklós Rózsa Treasury)에 실린 것도 음악과 효과음이 합쳐진 사운드트랙과 음악 트랙 중 일부, 영화 개봉 당시 MGM 레코드에서 나온 앨범에 실린 12곡의 모노 음원이 전부이다. 물론 1976년 로자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지휘하여 재녹음한 데카 앨범이 매우 세련된 연주와 음향으로 뛰어나지만, 전곡을 수록하지 않았고 구성이나 해석이 사운드트랙과는 달라 영화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전곡 앨범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작자 제임스 피츠패트릭, 복원자 리 필립스, 지휘자 닉 레인, 프라하 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모여 만든 이 음반(Prometheus)은 진정한 의미의 첫 전곡 앨범이다. 영화에 실리지 않은-못한!-곡까지 모두 복원하여 연주․녹음하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카타콤과 콜로세움에서 부르는 합창은 물론이고(여기에 적절하게 금관을 첨가하여 화성적 긴장도 만들어내고 있다), 연기가 되는 남성 가수를 참여시켜 네로가 부르는 독창곡, 여성 가수가 부르는 유니스의 독창곡까지 전부 담고 있다. 그 세심함과 집요함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게다가 4곡의 연주용 모음곡도 보너스로 담고 있으니 금상첨화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말일게다.
연주는 아주 뛰어나다. 닉 레인은 사운드트랙에 담긴 음악성을 재현하는 데에 혼신을 다하고 있고, 결과는 놀랍다. 물론 단순히 사운드트랙을 기계적으로 따라 하지는 않고 있지만, 순수주의자들도 흠잡기 어려울 정도로 충실한 재현이다. 물론 사운드트랙이 음악적으로 늘 최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 눈에는, 연주가 아니라 해석상으로, 아쉬운 점도 보인다. 예를 들어 전주곡은 로자의 데카 음반에서 들려주는 다소 느린 템포가 더 종교적인 감성을 잘 불러일으키고 곡의 세부를 잘 나타내며 클라이막스 부분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똑같은 팡파르를-비록 정말 멋진 팡파르이지만-영화 순서대로 계속 들려주는 것(디스크 2의 트랙 8, 9가 특히 그렇다)도 좀 과한 느낌을 준다. 바카날레 장면의 해석도 레인은 템포를 너무 빠르게 잡아 놀라운 추진력을 얻은 대신 곡의 뉘앙스를 다 살려내지 못한 듯하다.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로자가 지휘한 로열 필하모닉의 연주가 표현력이 더 풍부하고 정교하며 아름답다.
곡의 구성에 대하여는 특히 지적할 점이 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만나 “쿼 바디스, 도미네”라고 말하는 장면(디스크 2의 트랙 5 후반부 “베드로의 비전”)과 피날레를 결합하여 완성된 한 곡(기적과 피날레)을 만든 것이 77년 데카 앨범에서 로자가 선택한 음악적 해결이었고, 이것이 전곡을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최고 작품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번 전곡 앨범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두 음악이 두 번째 음반의 트랙 5와 트랙 13을 두고 멀리 떨어지는 바람에, 두 곡이 모여 하나가 되었을 때 증폭되는 감동은 다소 약화되고 말았다. 어차피 피날레 합창도 영화에서 축약된 형태대로 하지 않고 로자의 아이디어대로 연주하였으면서 왜 조금 더 음악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는지 아쉽다. 이런 경우에는 트랙 5는 그대로 두고, 트랙 13의 앞 부분에 트랙 5의 기적 부분을 붙여 편집하면 되었을 터. 마찬가지로 고귀하고 기품이 넘치는 페트로니우스의 테마를 다루는 방식도 데카 앨범처럼 하나로 묶어 음악적 흐름을 만들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
트랙 구분이 악곡보다는 영화의 흐름 위주로 되어 있어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곡을 묶어 들어야 하는 상황도 있다(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베드로의 비전’을 들으려면 전혀 분위기가 다른 ‘감옥’ 음악을 들어야만 한다). 가장 아쉬운 것은 아름다운 유니스의 테마이다. 트랙 8에서 짧게 나온 뒤에 바로 음악적으로 관련이 없는 '인질' 부분이 이어지고, 트랙 13에서 분위기 자체도 완전히 다른 '탈출' 다음인 '페트로니우스와 유니스'에서 잠깐 나왔다가 트랙 17에서 노래로 전개되는데, 이건 영화 순서대로 악보를 살려 연주한 결과이다. 나라면, 이 세 부분을 교묘하게 묶어서 하나의 곡으로 완성하거나, 아니면 둘로 나누어 하나는 완결된 관현악곡, 다른 하나는 노래로 살렸을 것같다. 그게 음악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로자 자신이나, 로자 음악의 최고 권위자였던 크리스토퍼 파머(Christopher Palmer)라면 당연히 이런 방식을 택하였을 것. 우리는 음악을 듣는 것이지, 단순히 영화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 개선행진곡 Ave Caesar의 녹음세션 연주. https://www.youtube.com/watch?v=Z8jIOgJzjLk
그런데 이런 문제를 극복(?)하려면, 역설적으로, 영화 사운드트랙이라는 '원전'을 숭배하는 순수주의자들의 방법대로 하면 된다. 가능하면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듣는 것. 전체를 들으면 음악적 흐름이 나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역시, 어디로 가든 , 로자의 길로 간다.
녹음은 데카 트리라는 전설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예측할 수 있듯이 그 결과는 눈에 보일 정도로 생생하면서도 극도로 자연스러운 음향으로 구현된다. 피츠패트릭이 제작한 음반들 중 가장 뛰어난 녹음 중 하나이며, 까다로운 오디오파일들도 만족할 성과이다. SACD 멀티채널로 나오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
몇 가지 이런 저런 지적을 하였지만, 실은 사치스러운 푸념에 불과하다. 이 앨범은 최고 수준의 연주와 녹음을 담고 있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선물이다. 로자가 직접 지휘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트라와 합창단이 연주한 데카 앨범(보칼리온 레이블에서 나왔다가, 최근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엘로퀀스 레이블에서 <벤허> 데카 앨범, 버나드 허만이 지휘한 로자의 <줄리어스 시저> 모음곡과 묶어 나왔다. 이 앨범 필청반으로 적극 추천한다)을 나란히 두고 함께 번갈아가면서 감상하면 이 곡의 아름다움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을 것.
이처럼 공들인 멋진 앨범이 외면당하거나 잊혀진다면 이 세상에 정의는 없다.
http://www.tadlowmusic.com/2012/10/quo-vad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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